소설리스트

지존무한-12화 (12/250)

12화

하기주가 진검을 건네며 말했다.

“이제 진짜 검의 길을 익혀야지?”

검의 길?

내려치고 올려치고 좌우 치고.

사실 이는 쇠몽둥이라고 할 수 있는 간(鐗)의 길이다.

“우직한 타법은 묵직한 간과 같은 무기로 상대의 병기를 부수고 뼈를 박살내는 것이지. 하지만 검으로는 그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하기주가 검을 밀고 당기며 말했다.

“내려치되 밀거나 당기면서 베는 타법! 그게 검의 길이지.”

하기주가 철목을 가리켰다.

“순간적으로 당기거나 밀어서 베는 검의 길을 익히면 이 나무토막을 자를 수 있다. 그때 승방을 고려하마.”

무한이 검을 쥐었다.

‘무화전 하방으로 출관할 수는 없지.’

진검을 쥐니 기분이 새로웠다.

진짜 검법을 익히는 기분이랄까.

그 새로운 기분은 바로 사라졌다.

그물진에 뛰어 들어 한 번 휘두르자.

깡!

철목과 검이 부딪히는 순간 검이 부러졌다.

‘이게 무슨 나무토막이냐? 쇳덩이지.’

황당했다.

받자마자 부러진 검을 망연자실 쳐다보고 있자니 하기주가 말했다.

“기껏 검의 길을 설명해줬는데 귓등으로 들었냐? 검이 몽둥이냐?”

하기주가 혀를 찼다.

“문하생에게 진검은 한 차례만 지급된다. 부러지면 네가 사서 써야 한다.”

“……?”

“대장간에 가면 검을 판다.”

하기주가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요즘 들어 하기주의 안색이 편해졌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졌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가릉산과의 비무 이후 하기주의 태도가 조금씩 바뀐 것 같았다.

삼 년 가까운 세월에 정이라도 든 걸까.

그것만은 아닌 듯했다.

하기주 본인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사라진 걸 보면 다른 무언가가 있다.

아무튼 좋은 쪽으로 바뀌는 것 같아 무한 역시 덩달아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기주는 별 게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검의 길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밀거나 당기는 순간 써야 할 근육이 달랐다.

‘심의삼재검은 정말 끝이 없구나.’

다 익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길이 나온다.

정돈된 검로가 있는 검법이 아니라 마치 자신만의 검로를 세워가는 길인 듯했다.

무한은 다시 검의 길에 빠져들었다.

이제야 진정한 심의삼재검에 들었다는 하기주의 말이 맞았다.

그냥 내려치는 타격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당기거나 밀어서 베는 타법은 이제까지와는 미묘하게 다른 근육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특히 검을 쥐는 손 모양과 손가락, 손목의 움직임이 중요했다.

손가락 하나, 손목의 방향에 따라 전신근육이 요동친다.

날아드는 철목을 검으로 받아 기운을 흘리고, 베거나 쳐내면서 검을 운용하는 능력이 점차 향상되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무한은 진검으로 그물진을 통과할 수 있었다.

다만 철목을 베거나 흘려내기는 했지만 자를 수는 없었다.

내공도 없는데 쇳덩이처럼 단단한 철목을 벤다는 건 무리였다.

낮에는 철목 그물진 수련을 하고, 밤이면 비밀연공실에서 경천심결을 운용했다.

그날도.

“어?”

무아지경에서 무심코 벽면에 새겨진 경천십이식을 보는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자세?

심의삼재검은 기본적으로 공격을 위한 움직임이다.

모든 공격 검초에는 중간을 이어주는 방어 초식이나 적의 이목을 분산시키는 변초가 들어 있다.

공격이 자연스레 이어지도록 초식을 만들고 검로를 형성하는 것이다.

눈앞의 경천십이식도 공격 검초뿐이다.

밤마다 그 앞에서 경천심결을 외웠기에 도해는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무한이 일어나 검을 들어 경천십이식 제 일식 천의격(天意擊) 초식의 한 부분을 쳐다봤다.

‘내려치고 찌른 뒤 다시 비껴 치면…….’

천천히 호흡을 이어가며 검식을 펼쳤다.

목검을 내려치고 좌에서 우로 그은 후 찌르기를 한 다음 다시 내려쳤다.

내려친 상태에서 검을 꺾어 바로 좌측 치기를 할 때 손목과 팔은 물론 전신근육이 요동을 쳤다.

‘경천심결!’

근육과 골수에 배인 힘이 순간적으로 뻗어 나오며 천의격 검초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런 거였어!’

경천심결과 경천십이식의 비밀이 풀렸다.

이 초식이 제대로 펼쳐진다면 상대는 내려치는 검과 좌에서 베어오는 검, 그리고 똑바로 찌르는 검을 거의 동시에 방어하다 마지막 내려치는 검에 당하고 말 것이다.

경천십이식 그림 하나하나가 결국은 삼재검 천지인과 찌르기이거나 거기서 변형된 검초였다.

그냥 내려치는 게 아니라 베거나 미는 타법이 섞여 있어 검을 쥔 파지법이나 팔목의 자세가 약간씩 다를 뿐이다.

무한은 다시 한 번 천의격 자세를 처음부터 천천히 취해 보았다.

천의격의 검세는 이랬다.

검을 세웠다가 앞으로 나아가며 내리치고, 상단 찌르기, 다시 내리치고, 하단 찌르기, 다시 내리치고 중단 찌르기를 이어 친다.

중요한 건, 한걸음에 이 모든 과정을 끝내야 한다는 것.

엄청난 쾌검이면서도 삼재검을 섞어 치는 것보다 훨씬 더 근육과 뼈에 부담이 갔다.

경천심결에 의해 근육과 골수에 배인 기가 흘러나와 비록 느린 동작이지만 천의격을 행할 수 있었다.

‘된다!’

무한의 가슴이 뛰었다.

그동안 심의삼재검만 익히며 회의감에 빠진 적도 있었다.

솔직히 제대로 된 검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심의삼재검이 경천십이식을 익히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삼재검을 무한 반복하며 근육과 장부의 움직임을 익히지 못했다면 결코 경천십이식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천심결로 쌓인 기운이 없었다면 내공이 있더라도 펼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내공만으로 경천십이식의 검로를 이어가려면 엄청난 공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거였어. 경천심결을 통해 몸을 완성시켜야 무리 없이 경천십이식을 펼칠 수 있는 거였어.’

무한은 할아버지가 경천심결을 완성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하기주는 할아버지의 안배였어.’

***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낙엽이 떨어졌다.

서걱!

내려치면서 베는 검격에 철목이 거짓말처럼 잘렸다.

‘아!’

한동안 멍하니 섰다가 철목 토막을 들고 하기주를 찾아갔다.

싹둑 잘린 철목토막을 본 하기주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알아서 연습해라.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남들이 보면 대단한 신공이라도 전수했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심의삼재검 덕분에 경천십이식을 익힐 수 있었다는 걸 알고 나니 그동안 꺼림칙했던 감정이 씻은 듯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하기주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뭐가 고맙다는 거지?”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하기주는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잠시 보다 가볍게 탄식을 하더니 가라고 손짓했다.

‘드디어 중방에 올라가는 걸까?’

이제 얼마 후면 해가 바뀌고 열여섯이 된다.

그러면 할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만현각주 강유가 경천무궤를 건네줄 것이다.

경천무궤가 무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지킬 힘이 없다면 경천무궤는 죽음을 부르는 화근일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 경천십이식을 완성하자.’

하기주의 지도는 끝났으나 무한의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낮에는 천무관 하방에서 삼재검을 수련하고, 저녁이면 지하 연무장에서 경천십이식에 매진했다.

아직까지는 경천십이식을 동작 순으로 이어갈 뿐이었다. 그나마 경천심결이 있어 가능했다.

‘후, 쉽지 않네. 경천심결을 한시라도 빨리 대성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졌다.

하루는 밤새워 검식을 되풀이를 하는데 갑자기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뒤이어 혈관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헉!”

놀라서 경천심결 운용을 멈췄다.

그러자 서서히 고통이 사라졌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수련의 과정일까? 아니면 부작용일까?’

알 수가 없었다.

기의 운용은 지극히 까다롭다.

고수도 혈맥이 뒤틀리거나 주화입마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명문대파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운기 수련을 해도 잘못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구결에 의지하여 운기 수련을 한다는 건 극히 위험한 일이다.

‘주화입마가 아닐까?’

무한에게는 물어볼 곳이 없었다.

‘무공서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어딘가에 답이 있을 것이다.

다음 날.

문향전 강학을 마치고 오후에 검천전 서재로 갔다.

서재에는 다양한 무공서가 있었다. 이미 대부분 한두 번씩 읽은 것들이다.

‘놓친 게 있을지 몰라.’

내공에 관련된 내용을 위주로 다시 살폈다. 하지만 혈관이 타들어가는 느낌에 대해 언급한 서적은 없었다.

‘만현각으로 가야 하나?’

만현각은 천하방에서 수집한 모든 책이 있는 곳이다.

만현각주 강유가 떠올랐다.

지난번 대화 이후 한 달에 한 번 가지던 침묵다담도 부르지 않았다.

무한은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만현각.

삼층으로 된 본전과 책을 보수하거나 사본을 만드는 부속 전각들이 줄지어 있었다.

만현각의 출입은 무척 까다로웠다.

층에 따라 들어가려는 이유와 소속된 부서장의 확인서 등이 필요했다.

삼층의 경우, 천하사패 직계와 천하방 요직에 있는 인물들만 드나들 수 있다.

무한의 신분은 검천부주.

만현각 모든 서고를 드나들 자격은 있다.

일층은 서고 앞에 가서 이름만 적으면 된다. 이층 역시 서고 담당자가 신분만 확인하면 들어갈 수 있다.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일층 서가부터 섭렵했다. 주로 내공을 위주로 하는 유파의 무서를 빠르게 훑어 나갔다.

검천전의 무공서를 읽었기에 머릿속에 쌓아둔 무학 지식은 제법 많다. 익히지 않아서 쓸모가 없을 뿐이다.

무공은 책으로만 익힐 수 없다. 몸으로 움직이며 묘리를 체득해야 한다.

그동안 무한의 머릿속에 있는 무공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심의삼재검에 이어 경천십이식을 수련하며 무공서의 묘리가 대충 짐작이 갔다.

어지간한 무공서는 대충 훑어봐도 어떤 무공인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내공서는 좀 달랐다.

경천심결로 기운에 대한 이해가 깊었지만, 내공은 각기 달라 직접 익히지 않는 한 묘리를 체득하기 어려웠다.

일층을 모두 돌아봤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중에서 보기 힘든 진귀한 책들이 있기는 했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충 둘러보고 삼층으로 올라갔다.

“각주께 말씀 드렸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서고 담당자가 만현각주 강유에게 보고를 한 후 서고 문을 열어주었다.

다른 이들의 경우라면 강유의 재가가 떨어져야 하지만 천하사패의 직계는 보고만 하면 된다.

삼층 서고는 아래층에 비해 책이 많지 않았다. 대신 한쪽으로 줄지어 작은 방이 있었다.

“책을 고르셔서 저 방 중에 하나 택하여 들어가서 보시면 됩니다. 다만 사본을 만드시거나 외부로 유출하는 건 안 됩니다.”

만현각의 진수는 삼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가를 꼼꼼히 살펴 나갔다.

각종 서적이 분류되어 꽂혀 있었다. 의외로 무공서는 많지 않았다.

서고 앞에 앉아 있는 담당자에게 가서 물었다.

“삼층에 있는 무서는 저게 다입니까?”

“그렇습니다만. 혹시 찾는 무서가 있으신지요?”

“정말 저것뿐이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서고 담당자가 주위를 살피더니 조용히 일러주었다.

“삼층에 올라올 만한 수준의 무공서가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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