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9화 (9/250)

9화

역심의삼재검.

말은 거창했는데 알고 보니 천지인 삼도를 역순으로 펼치라는 것이다.

내려치던 천의 검을 올려치고, 좌에서 우로 긋던 지의 검을 우에서 좌로 긋고, 사선으로 내려치던 검을 사선으로 올려치는 것이다.

무한과 형소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 천무관을 떠날 때까지 삼재검만 익힐 것 같았다.

“연성 방법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기주가 돌아가자 형소가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러더니 묵묵히 올려치기를 하였다.

무한 역시 자기 자리로 와서 철인형을 상대로 올려치기를 하였다.

이미 요령이 익었기에 역삼재검의 성취는 빨랐다.

연말이 되었을 때 역심의삼재검으로 일수사검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형소가 무한과 인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목인형을 가지고 연무장 뒤편 구석으로 가버렸다.

이해할 수 있었다.

형소는 자존심이 강했다. 자신보다 입문이 늦고 내공도 없는 무한이 어느새 따라 붙자 비교 당하는 게 싫은 것이다.

그렇게 한 해가 갔다.

***

새해를 맞아 천무관이 휴관했다.

창밖을 지긋이 바라보던 무한이 유아를 불렀다.

“오늘 성 밖 마을로 나가서 점심을 먹을까?”

“예?”

천무관 외에는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무한이 성 밖 마을로 나간다니 유아가 놀랐다.

“성 밖 마을 홍반의 요리가 맛있다며?”

“네! 정말 맛있죠.”

유아가 신나서 외출 준비를 했다.

무한은 내성을 지나 외성을 가로질러가며 천목혈에 집중했다.

‘…….’

강유가 보낸 암중호위도, 도천부의 이목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성 문을 나서 삼십여 장쯤 지났을 때 무한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마치 성문을 구경하는 듯 바라보는 무한의 시선에 한 사람이 걸렸다.

새해를 맞아 잘 차려입은 사람들과 달리 잿빛 회의를 걸친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야.’

무한은 그가 도천부의 이목이라는 걸 직감했다.

얼핏 보기에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로, 약간 왜소한 체구였다.

도천부의 이목은 종종걸음으로 대로 옆 골목으로 빠졌다.

강유의 암중호위는 보이지 않았다.

무한은 휘휘 성문과 성벽을 둘러보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아 말대로 홍반의 음식은 맛이 있었다.

배불리 먹고 다시 거리로 나왔는데 형소가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소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바삐 걷고 있었다.

“형소!”

커다란 보따리를 품고 오던 형소가 무한이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섰다.

“어… 너냐?”

형소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한과 유아를 봤다.

유아가 형소를 보고 반가워했다.

“이분이 형소 공자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유아랍니다.”

유아가 스스럼없이 말을 걸자 형소가 당황했다.

“천무관 천재이시라면서요.”

문향전에서 형소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천재다. 수석학사 왕선유는 형소를 천무관 최고의 인재라고 치켜세웠다.

“아, 아니…….”

형소가 말을 더듬거렸다.

이제 보니 여자 앞에서 더 낯가림이 심해지는 모양이다.

형소가 고개를 돌리고는 앞으로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수줍음을 많이 타시는 분이네요.”

유아가 형소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좀 내성적이야.”

“공자도 만만치 않거든요? 사람과 어울리지를 않잖아요.”

“그런가?”

아닌데.

어울릴 사람이 없는 건데.

무한이 쓴웃음을 짓는데 뒤에서 어이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방금 지나쳤던 형소가 누군가와 부딪혀 쓰러진 게 눈에 들어왔다.

지고 있던 보따리가 풀려 서책이 나뒹굴었다.

형소의 앞에는 한 무리의 젊은 남녀가 서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고영?’

도천부의 손자들 중 가장 막내인 고영으로, 천무관 첫날 엄마에 대한 소문을 흘린 놈이다.

그 소문은 아직도 천하방 어딘가를 흘러 다닌다.

고영이 잔뜩 인상을 썼다.

“이 새끼가? 눈을 감고 다니는 거야 뭐야?”

고영 옆에는 늘 함께 다니는 무리와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이 세 명 있었다.

“이를 어떡해. 새 옷을 다 망쳐 버렸네.”

그중 한 여자가 손수건을 꺼내 옷을 닦아 주었다. 먹물이 번져 오히려 더 지저분해졌다.

“뭐 하는 거야. 손 치워.”

고영이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는 형소를 노려보았다.

형소는 흩어진 서책을 주섬주섬 보따리에 담고 있었다.

“이 자식, 권천부 놈 아냐? 야, 고개 들어봐.”

형소는 듣지 못한 척했다.

“야, 귀 먹었냐?”

고영 옆에 있던 놈이 발로 책을 담고 있는 형소를 밀쳤다.

“어?”

형소가 중심을 잃고 나뒹굴었다.

“형소!”

무한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가 형소를 일으켰다.

고영이 인상을 썼다.

“심무한?”

무한이 형소를 일으키자 유아가 흩어진 서책을 보따리에 담았다.

“이 자식들, 삼재검수들 아냐?”

옆에 있는 놈이 말했다.

천무관에서 삼재검수를 모르는 이가 없다.

“삼재검수? 그게 뭐야?”

옆에 있던 여자가 물었다.

“크크크. 천무관의 지진아들이야. 몇 년 동안 이상한 삼재검만 익히고 있거든.”

“이상한 삼재검?”

“정식 삼재검법도 아니야. 그냥 휘두르는 걸 삼재검이라고 하더라고.”

“천무관의 수치라고 할 수 있지.”

또 다른 놈이 말을 받았다.

고영은 무한을 무시하고는 형소를 향해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이 자식이 새 옷을 망치고도 사과도 안 해? 내가 우습냐?”

고영이 왼손을 뻗어 형소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키가 작은 형소가 대롱대롱 매달린 형국이 됐다.

고영의 오른손이 형소의 뺨을 때리려는데 무한이 손을 뻗어 잡았다.

고영은 눈알을 부라렸다.

“이게 무슨 뜻이냐?”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서 보고 있다.

무한이 말했다.

“천하방 앞마당에서 천무관 문하생들끼리 다툴 수는 없잖아.”

“뭐라?”

“옷 한 벌이 천무관 동문의 우의보다 중요한 건 아닐 텐데?”

“이 새끼가? 말이 짧다?”

고영이 어이없어 했다.

나이도 많고 천무관 선배이기도 한 자신에게 반말을 하니 기가 막힌 모양이다.

무한은 공손하게 대한다고 해서 고영이 좋게 나올 리가 없다는 걸 알기에 굳이 존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존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죽고 싶냐?”

“길에서 부딪힌 걸 가지고 사람을 모욕하는 건 좀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양쪽에 책임이 있는 건데.”

“뭐?”

고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천무관에서 성질 더럽기로 하면 둘째가라 할 고영이다.

“이 새끼가!”

고영이 형소의 멱살을 놓고 이번에는 무한의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무한이 형소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피해? 가지가지 한다?”

고영이 작정하고 다가섰다.

다른 두 청년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때, 지켜보던 사람들을 헤치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하기주였다.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영과 무한을 번갈아 보았다.

“동문끼리 대로상에서 무슨 추태냐?”

천무관의 문하생들은 출관하기 전까지 교두를 스승의 예로 대해야 했다. 교두 역시 문하생들의 집안내력과 상관없이 하대했다.

그러나 고영은 하기주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천하방 실세 도천부의 후손이니 무서울 게 없는데 무관의 하방 교두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하 교두시군요. 요즘 하방 애들을 어떻게 지도하시기에 이렇게 선배를 무시하는 겁니까?”

하기주가 미간이 꿈틀했다.

고영의 태도는 확실히 건방졌다.

“도천부 위세가 듣던 대로 대단하긴 하군. 내가 끼어들어 불만인가?”

“그럴 리가요. 경우를 따지는데 왜 도천부가 거론되는지 모르겠군요.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저놈이 느닷없이 달려들어 새 옷을 망쳤는데 아무래도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닌가… 권천부에는 도천부를 시기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꽤 많죠.”

고영의 말에 형소가 분개했다.

“허, 허튼 소리! 길가다 부딪칠 수도 있지. 거, 거기에 왜 권천부까지 끌어들이는 거야?”

고영이 눈알을 부라렸다.

“하여간 권천부 놈들은 위아래가 없다니까.”

천하방 패권을 두고 도천부와 권천부가 서로 신경전을 벌인다는 건 알 만한 이는 모두 알고 있다.

하기주가 말했다.

“천무관 문하생들이 저자거리에서 드잡이질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정 따지고 싶다면 비무로 정정당당하게 해결해라.”

“비무라고요? 쟤들하고? 하!”

고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무한도 내심 의아하여 하기주를 보았다.

하기주는 무한의 시선을 무시하고 고영 일행을 볼 뿐이다.

고영이 옆에 있는 일행에게 말했다.

“릉산아, 비무를 하잖다, 비무.”

고영의 심복처럼 붙어 다니는 가릉산이 어림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에이. 말씀 너무 막하시네. 쟤들하고 손을 섞으라고요?”

가릉산은 도천부 참마대주의 아들이다. 무력대주의 아들인 만큼 무공에 대한 자부심도 높았다.

“왜? 싫은가? 그럼 가던 길 가고.”

하기주의 말에 고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죠. 모처럼 나온 외출을 망쳤으니 그 대가는 받아야지.”

“내가 손 좀 봐주지.”

가릉산이 나섰다.

하기주가 무한과 형소를 봤다.

“너희는 어떡할 거냐?”

형소가 울상을 지었다.

“나, 나는…….”

그때 무한이 나섰다.

“좋아. 내가 받아주지.”

고영은 순순히 물러날 눈치가 아니었다.

무한은 일수사검을 익힌 뒤 자신감이 붙었다.

남들이 들으면 터무니없는 자신감이라고 하겠지만 맥없이 당하진 않을 것 같았다.

‘지면 뭐 어때?’

천무관 비무는 목검으로 하니 죽을 일은 없다.

“천무관 연무장으로 가자.”

하기주가 앞장섰다.

고영이 여자들에게 말했다.

“잠깐이면 돼. 먼저 가서 기다려.”

“알았어. 음식 식기 전에 와야 돼.”

“그럴 거야.”

고영은 무한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무한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유아에게 말했다.

“먼저 가 있어.”

“저도 따라갈게요.”

“별일 없을 거야.”

가지 않으려는 유아를 먼저 보냈다. 행여 두들겨 맞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형소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사과하면 될 걸.”

“저놈들이 안 받아주잖아. 비무는 내가 할 테니까 걱정 마.”

“나,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아니, 저놈들은 삼재검수를 모욕했어. 본때를 보여주자.”

“하… 삼재검수…….”

형소가 말문이 막히는지 입을 닫았다.

‘겁은 많아 가지고…….’

형소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신년 휴관이라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나를 원망 마라. 너희 교두께서 마련한 비무니까.”

고영이 형소와 무한을 노려봤다.

“선배로서 가르침, 그렇지!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거다. 팔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져도 석 달이면 낫는다. 그동안 선배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뼈에 새기면 된다.”

형소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했다.

무한은 대꾸하지 않고 목병장기들이 꽂힌 곳으로 가서 목검을 뽑아 들었다.

“이런? 이거 참. 목검을 들자네요?”

고영이 하기주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가릉산도 능글맞게 웃었다.

“가볍게 몇 대 쥐어박는 걸로 끝내려 했는데 먼저 목검을 드니 어쩔 수가 없네.”

무한은 말없이 목검을 휘둘러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목검마다 무게감이 약간씩 다르니 감을 익히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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