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할아버지…….’
짧은 순간이지만 할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진심은 통하니까.
그래서 더더욱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슬펐다.
무한이 비록 어린 나이지만 지난 사 년, 홀로 지낸 그 긴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보낸 건 아니다.
생각하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본 곳.
도왕의 도천부다.
도천부는 도왕의 아들 셋과 손자들까지 고수들이 우글우글하다.
반면 기천부 천기자는 치매에 걸렸고, 남은 이는 외아들 강유와 무남독녀 강소소뿐이다.
권천부 권왕 복호명은 아예 혼인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만 사라지면 도왕과 그의 아들들 세상이 된다.
실제로 지금 그렇다.
‘도천부…….’
“듣고 있느냐?”
강유의 말에 무한은 현실로 돌아왔다.
“들었습니다.”
강유의 시선이 답을 요구했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무한은 답을 피했다.
이미 할아버지 앞에서 무인의 길을 선택했다.
재고의 가치가 없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고, 침묵이 길어졌다.
잠시 후, 강유가 가볍게 탄식하더니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말했다.
“도왕은 압도적인 이인자였으니 무난히 방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 하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면 순탄하게 마무리되지 않을 것이야. 그 과정에서 피를 볼 수도 있다.”
“제가 위험해질 것을 염려하시는 겁니까?”
“이번 후계구도는 방주와 소방주를 동시에 정할 것이다. 너를 방주로 추대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소방주로 반드시 검신의 유전을 이은 너를 거론할 것이다.”
소방주.
그 자리 때문이었구나.
강유가 직접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계 구도에서 빠지는 것. 그게 네 안위를 도모하는 길일 것이다.”
“아직 어린 저를 소방주로 추대할 사람이 있기나 합니까?”
강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너를 주시하고 있다.”
무한은 내심 씁쓸했다.
천하방 외톨이로 검천부에 틀어박혀 있고 아무도 찾지 않는데 모두가 주시한다니.
“네가 천하제일인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강유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모두가 잊은 듯하지만 검신 어르신을 마음속으로 추앙하는 이들이 있다.”
“…….”
“또한…… 도천부가 방주와 소방주까지 모두 차지하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차기 방주는 세력이나 후대로 물려준다는 순리로 보아 도천부 장자 고강후가 유력하다.
도천부와 대립하는 문파들은 소방주마저 도천부에서 차지하여 천하방이 고씨 일가의 방파가 되는 걸 막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럴수록 네게는 화가 될 것이다.”
강유가 탄식하듯 말했다.
“지킬 능력이 없을 때 보물은 오히려 명을 재촉하는 화근이 된다. 무인의 길을 포기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무한이 강유를 주시했다.
강유는 무한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묵묵히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아버지와 막역했다는 강유.
할아버지가 후견인으로 삼은 강유.
할아버지가 사람을 잘못 봤을 리가 없다.
그래서 강유를 믿는다.
아니, 믿고자 해왔다.
그러나 강유는 후견인 노릇을 하지 않았다.
후견인 노릇이 뭔지 모르지만 한 달에 한 번 침묵의 다담을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무한은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리고 화로 위에 있는 찻주전자를 집어 뜨거운 물을 다기에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다기 뚜껑을 닫으며 생각했다.
강유는 기천부의 후계자다.
천기자의 외아들이니 천하방 요직을 맡았을 법한데 만현각주로 지내고 있다.
만현각은 서고일 뿐이다.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천기자의 후예에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군사부의 한 자리는 차지하고 있는 게 어울린다.
강유의 사형, 그러니까 천기자의 대제자 손우자가 군사부 총군사를 맡고 있다.
사형제가 나란히 군사부에 있는 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천하방 군사부는 요직 중의 요직이니 기천부 출신이 장악하는 걸 도천부는 원치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만현각주라는 신분은 그저 겉으로 내세운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와 군사부 총군사 손우자와의 교감이 천하방을 끌고 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무인의 길을 포기하라고 하는 건 총군사 손우자의 생각일 수도 있다.
‘총군사라면 천하방이 후계 다툼으로 사분오열되는 걸 막고 싶겠지.’
거기에 강유는 후견인으로서 무한의 안위를 도모한다는 명분도 있고.
무한의 긴 침묵을 강유는 오해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무한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강유가 화제를 돌렸다.
“너를 지켜보는 이목이 있다.”
그건 무한도 안다.
지난 사 년간 따라다니는 그림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시선을 느끼고 산다. 그래서 말 한마디조차 조심하며 지낸다.
‘……?’
그러고 보니 지금은 감시자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서 보낸 자입니까?”
강유가 이목의 존재를 안다면 어디서 보냈는지도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천부.”
강유가 짤막하게 답했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강유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가 붙인 자가 그를 견제하고 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강유의 말에 무한이 흠칫했다.
‘강유의 사람이 나를 호위하고 있었다고?’
“자객이 아닌 단순한 이목인 듯싶지만 그래도 주의해야 한다. 천하방을 벗어날 때는 반드시 호위를 대동해야 한다.”
강유가 돌아간 뒤 무한은 물끄러미 창밖을 봤다.
‘나를 지켜보는 자가 둘이란 말이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자가 도천부의 이목인 줄 알았는데 강유는 그자가 암중호위라고 했다.
암중호위가 일부러 무한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기운을 노출했다는 사실도 일러주었다.
그렇다면 도천부의 이목도 은신술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천목투심술의 단계가 오성이라지만, 어지간한 주위 기운은 감지하는데 그자의 감시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자가 살수였다면 나는 벌써 죽었겠지.’
무한은 창밖 어디쯤에 웅크리고 있는 기운을 느꼈다.
‘저자가 강유가 보낸 자.’
지난 사 년간 느껴왔던 시선.
검천부 밖을 나가지 못한 것도 저 시선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호위하고 있었다니…….
세상일은 겉만 보고 알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
천하사패지연은 돌연 취소됐다.
도왕이 천하방은 한 형제인데 천하사패만 모여 연회를 한다는 건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며 앞으로도 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런 이유였는지 알 수 없었으나 무한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자리였던 만큼 다행으로 여겼다.
강유의 염려는 기우로 끝난 셈이다.
**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기주는 새로운 과제를 내주었다.
“연달아 사검을 펼쳐봐라.”
지금까지와 달리 연결동작으로 치라는 뜻이었다.
‘어려울 것 없지.’
이제 심의삼재검은 눈감고도 펼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퍽!
어깻죽지에 하기주의 목검이 떨어졌다.
“큭!”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기주는 멈추지 않았다.
목검을 휘두르는데 사정없이 허리와 허벅지, 발목을 쳤다.
퍽! 퍽!
“지금 춤을 추는 것이냐? 검과 검 사이 연결동작을 제대로 하란 말이다!”
하기주는 내려치고 올려치는 사이의 흐름을 지적했다.
“천지인 삼도를 연속해서 친다. 물 흐르듯 이어질 때까지!”
그날부터 한 번 내려치고 뒤로 물러났다 다시 전진하며 올려치고, 뒤로 물러났다가 전진하며 옆으로 좌우치기를 반복했다.
‘확실히 다르구나…….’
천의 도나 지의 도만 펼칠 때는 철인형에서 퍽퍽 기파가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연결동작으로 하니 깡, 소리만 난다.
‘연결동작 역시 근육의 움직임이 달라.’
초식과 초식 사이 연결동작에서 호흡이 끊기고 근육의 움직임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잠력이 끊어지지 않도록 호흡을 이어가야 해.’
한 달 후.
“완성했다고?”
하기주가 믿기지 않는 듯 눈앞에서 쳐보라고 했다.
퍽! 퍽! 퍽!
검이 닿을 때마다 철인형에서 퍽퍽, 타격 소리가 둔중하게 터졌다. 힘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뜻이다.
하기주는 애써 태연해하며 말했다.
“그런대로 쓸 만하군.”
이제 찌르기로 들어갈 줄 알았다.
“일진일퇴 연결동작은 어려운 게 아니지. 한 번에 천지인 삼도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한 번 치고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앞으로 전진하며 다음 동작을 하곤 했는데, 한 번 공격에 내려치고 그어 치고 사선으로 치라는 것이다.
“나아가는 기세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나아가는 속도 그대로 천지인 삼도를 펼친다면 인정해주지. 아! 마지막 인의 도는 음양 모두 펼쳐야 한다.”
한걸음 내딛는 사이에 사검(四劍)을 펼치라는 뜻이다.
난감했다.
얼마나 빨리 휘둘러야 한걸음에 사검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인가.
“될 때까지 해라!”
하기주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가버렸다.
다시 한 달이 흘렀다.
일수(一手) 사검(四劍).
정말 하니까 됐다.
‘경천심결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하지만 누가 이런 수련을 한단 말이야.’
이 년 동안 고작 삼재검만 수련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정식 삼재검법이라도 대개 석 달에서 여섯 달 정도 익히면 과정을 마친다.
하기주가 왜 심의삼재검만 가르치는지 이유는 모른다.
처음 적의가 담겼던 하기주의 눈빛은 이제 혼란스러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덕분에 경천심결을 연성할 수 있었잖아.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짓이야말로 경천심결의 효과를 최대로 하는 방법일지도 몰라.’
경천심결은 정말 놀라웠다.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는 근육과 장부에 배어들더니 이제는 골수로 스며들고 있다.
무한은 이제 온몸 구석구석 심지어 뼛속까지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물어볼 곳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무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수련법은 없었다.
또 하나 성과는 경천심결 덕분에 천목투심술이 한 단계 올라 육성이 된 것이다.
천목투심술은 심안(心眼)을 익히는 무공이다.
무한은 몰랐지만 흑천의 흑천노조가 심검을 익히고자 온갖 방법을 쓰는 과정에서 비롯된 무공이다.
그동안 무한의 천목투심술은 오성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 후일 내공을 익히면 천목혈이 자극을 받아 자연히 단계가 오를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공을 가르치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었다.
천목투심술이 육성으로 오르자 뭔가 달라졌다. 천목혈이 항상 깨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천목이 열리는 건가?’
***
퍼퍼퍼퍽!
언제부터인가 형소는 찌르기를 그만두고 일수사검(一手四劍)을 펼쳤다.
형소는 가전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었기에 쉽게 일수사검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공도 없는 무한이 일수사검을 펼치자 경쟁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형소도 손바닥 허물이 벗겨질 정도로 맹렬하게 수련했다.
“너희 둘, 이리 와라.”
무한과 형소가 일수사검을 완성하자 하기주가 불렀다.
“지금까지 천지인 삼도는 순리라고 할 수 있지. 이제부터는 역(逆)삼의삼재검이다.”
‘역심의삼재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