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알아볼 수 있겠어?”
“당연하죠. 집안 장부는 모두 제가 관리했다고요. 정말 신물 나도록 봤죠.”
유아는 어려움 없이 장부를 읽었다.
잠시 장부를 살피던 유아가 미간을 좁히며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꽤나 복잡하게 써놨네. 뭔가 수상한 짓을 할 때 이렇게 하는 건데…… 한참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 장부 저 장부를 맞춰가며 살피던 유아가 어느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나쁜 새끼들!”
“왜 그래?”
“이거 봐요. 이 장부와 연결되는 요 장부! 차이가 나잖아요. 포목점 하나가 어느 순간 사라졌어요. 이건 누가 해먹은 거라고요.”
유아가 장부 몇 개를 펼쳐 놓고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장부는 거짓말을 못해요. 한쪽에서 사기 쳐도 다른 쪽에서 발각되죠.”
“…….”
무한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천하상단…… 너희도 한패였구나.’
무한이 말이 없자 유아가 벌떡 일어났다. 유난히 큰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부주!”
유아가 이런 목소리로 무한을 부른 적은 처음이다.
“검천부를 책임지는 부주이시잖아요. 그러면 장부 정도는 볼 줄 알아야 돼요. 세상은 돈! 돈이 최고라고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심각한 얼굴이다.
“큰일이라고요. 이대로 가면 재산을 물려받기도 전에 파산하겠어요.”
“그렇게 심각해?”
“이것 봐요. 검천부 사업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잖아요.”
유아가 장부 한쪽을 가리켰다.
“천하상단이 가장 큰 수입원인데 매년 줄어들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몇 년 안 가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거라고요.”
그럼 안 되지.
“강 각주님이 후견인이잖아요. 가서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천하상단이 장난치는 것 같다고요.”
강유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부탁한다고 할 것 같지도 않고.
“됐어. 오늘은 이만해.”
돌아서는 무한의 눈빛이 서늘했다.
***
강유가 천무관 입관 서류를 보냈다.
‘포 총관이 말했나 보네.’
천무관은 문무, 즉 문향전과 무화전으로 나뉜다.
‘문향전부터.’
무한은 천무관으로 향했다.
“이걸 모두 읽었다고?”
문향전 수석학사 왕선유가 어림도 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으로 무한을 쳐다보았다.
“네.”
“사실대로 말해야 하네.”
“쓰인 그대로입니다.”
그동안 읽은 책을 쓰라고 해서 대충 적었는데 왕선유는 믿지 않았다.
“올바른 길을 밝혀줄 스승이 없는 다독(多讀)은 위험할 수도 있지. 이제라도 진정한 배움의 길에 들어서겠다니 다행이군.”
“…….”
“정말 다 읽었는지 확인해봐야겠어. 몇 가지 물어 볼 테니…….”
왕선유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는데 뒤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뭔가?”
왕선유가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뒤를 돌아보니 약간 마른 얼굴에 백발수염이 기다란 노인이 서 있었다.
꼬장꼬장한 인상에서 딱 학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왕선유가 무한에게 일렀다.
“대학사께서 오셨다. 인사를 드려라.”
대학사라면 문향전 전주 동중용이다.
“무한입니다.”
대학사 동중용은 무한을 잠시 보다가 왕선유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시선에 왕선유가 공손히 말했다.
“입관 면접을 하던 중입니다.”
왕선유는 동중용을 무척 존경하는 눈치였다. 그가 무한이 읽은 책의 목록을 정중히 건넸다.
묵묵히 목록을 살펴본 동중용이 왕선유에게 말했다.
“상방으로 보내게.”
“네에?”
왕선유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바로 상방에 간 예가 없습니다만.”
“그 예가 지금 생긴 것이로군.”
동중용이 무한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다가가자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 아이가 누구의 핏줄인가? 무로는 천하제일이고, 문으로는 나와 견줄 수 있었던 이의 후손이네.”
왕선유가 입을 삐죽거렸다.
“핏줄이라도 다 같은 재능이 있는 건 아닐 건데요.”
“이 많은 책을 읽은 아이가 상방에 또 있던가?”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됐군.”
동중용이 무한에게 말했다.
“무공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 그러나 학문을 게을리 하면 손발만 고생한다는 걸 명심하거라.”
그러더니 무한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갔다.
왕선유가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흐음. 너무 파격적이야. 이래선 안 되는데. 문향전마저 타락하면 안 되는데…….”
“제가 상방을 가는 게 문향전이 타락하는 겁니까?”
“왜 아니야? 배경을 내세워서 아무나 받아들이면 그게 타락이지.”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제가 아무나라는 말씀인가요?”
왕선유가 아, 하고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수습했다.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니고…… 상방은 문향전에서 가장 수준이 높다. 과시를 봐도 붙을 수준이란 말이다.”
수습한다고 하는 말도 영 거슬렸다.
“…….”
무한이 왕선유의 얼굴을 살폈는데 악의는 없어 보였다.
어머니에게 배운 천목투심술은 이럴 때 유용했다. 상대의 속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어쨌거나.
왕선유가 서류에다 상방이라고 적었다.
“일단 들어가서 해봐. 따라잡기 어려우면 언제든지 말해.”
“그러죠.”
무한은 문향전을 나와 무화전으로 갔다.
무화전 대교두 송양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수석교두 우문조는 체구가 단단한 무인이었는데 무척 고지식해 보였다.
“무공을 익힌 적이 없다고?”
“네.”
우문조는 더 묻지도 않고 서류에 도장을 꾹 누르며 말했다.
“하방!”
***
무한은 아침 일찍 천무관 문향전으로 갔다.
문향전 상방 강학당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마침 강학당 정원에 있던 왕선유가 손짓을 했다. 그가 퉁명스레 말했다.
“일찍 왔군.”
아무래도 무한이 상방으로 온 게 아직 불만인 모양이다.
“나이 찼다고 다 상방으로 넘어오는 건 아냐. 실력이 되어야지. 상방 문턱도 못 넘고 출관하는 관원들이 적지 않아. 상방 문하생이 몇 안 되는 이유지.”
왕선유가 상방 강학당으로 들어서는 문하생들을 보며 개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상방 문하생들은 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에 가까웠다. 그의 말대로 몇 명 되지 않았다.
중방 강학당을 보니 거기에는 수많은 문하생들이 들락거리고 있다.
왕선유가 혀를 찼다.
“천하방 앞날이 암울한 거지. 돌대가리들이 넘쳐나니.”
천하방은 무를 숭상한다.
무화전 상방으로 출관하는 걸 최고의 명예로 여기고, 문향전은 대부분 중방을 마치고 출관한다.
“저 녀석이야말로 문향전에 걸맞는 인재지.”
왕선유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시선을 따라가니 체구가 작은 소년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형소, 이리 와라!”
형소라 불린 소년이 뚱한 얼굴로 다가왔다.
왕선유가 무한을 소개했다.
“새로 온 문하생이다. 그러고 보니 너희 둘이 나이가 같구나. 잘 지내도록 해라. 강학당 생활에 대해서도 일러주고.”
형소가 무한을 흘깃 보고는 말했다.
“따라와.”
형소를 따라 상방으로 들어갔다.
“저쪽이 서가야. 책은 저기 두고 다니면 돼.”
형소는 지필묵이 있는 곳 등, 강학당 비품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점심은 뒤쪽 식당에서 먹으면 돼.”
형소는 꼭 필요한 말만 했다.
“알려줘서 고맙다.”
“별, 별거 아냐.”
고맙다고 하자 형소가 갑자기 말을 더듬더니 고개를 돌렸다.
문향전 상방 문하생은 이십여 명 정도였다. 대개 무한보다 서너 살 위였다. 서너 명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소소?’
기천부의 무남독녀 강소소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소소는 무한을 본 척 만 척 바로 바로 지나쳤다.
‘쌀쌀 맞기는. 근데 저 무표정은 집안 내력인가?’
강유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소소다.
강학에 앞서 왕선유가 무한을 소개했다.
“새로운 문하생이다. 아직 어리니 선배들이 잘 이끌어주도록.”
“심무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했다.
문하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무한이 심양조의 손자이자 검천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다.
천하제일인의 유일한 핏줄.
그 한 가지만으로도 무한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검천부에 틀어박혀 지낼 때는 몰랐는데 나와 보니 그랬다.
“자. 책을 펼쳐라.”
왕선유가 서책을 펼쳤다.
“오늘은 진서(秦書) 마지막 강의다.”
무한은 잠시 후 상방으로 온 걸 후회했다.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왕선유는 같은 말도 무척 지루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돌아보니 모두 하품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말로 고문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 숨을 쉬자, 숨을.’
내관반청의 호흡.
무한은 무아지경의 호흡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왕선유는 자기 책에 코를 박고 혼자 중얼중얼거리고 있어 무한이 그러거나 말거나 몰랐다.
오전 강학을 마치고 식당으로 갔다. 배식을 받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녀의 아들이었대.”
“검천부의 핏줄이 천기의 출생으로 이어지다니. 검천부는 끝장난 거나 마찬가지지.”
무한이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보다 서너 살은 더 먹어 보이는 놈들이 대여섯 모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 떠들던 놈들이 시치미를 떼고 딴 짓을 하였다.
무한이 놈들을 살폈다.
건들거리는 놈이 눈에 들어왔다.
뭘 봐?
놈이 눈빛으로 대꾸했다.
제법 덩치가 컸다.
그때, 누군가 앞에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같이 먹자.”
무한보다 두어 살 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반갑다. 나, 남궁명이라 한다.”
“심무한입니다.”
“알아. 문향전에서 인사했잖아.”
그러고 보니 문향전 상방에서 본 사람이다.
반듯하게 생긴 데다 가볍게 웃고 있어,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검천부주라지? 나는 남궁가에서 왔어.”
천무관이나 진무관에는 대파와 세가 사람들도 간간이 들어온다고 들었다.
“무화전도 상방인가?”
“하방인데요.”
“뭐? 하방은 애들이나 가는 덴데.”
남궁명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무공은 이제 처음 배우는 거라.”
“……그래?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나도 별로 아는 건 없지만.”
“저기 저 놈은 누구죠?”
무한의 시선을 따라간 남궁명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천부 고영? 같은 천하사패인데 모르나보네?”
‘도천부 고영…….’
마음 속에 이름을 새겨두었다.
오후.
무화전 하방 수련장에 들어선 무한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궁명의 말처럼 여덟 살에서 열 살 남짓한 애들이 뛰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까불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무한이 난감해하는데,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형소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보니 새삼 반가웠다.
“너도 하방이야?”
형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툭, 쏘아붙인다.
“하방이 어때서?”
“……?”
“하방이라고 만만히 보지 마! 여기는 천무관이라고!”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후다닥 가버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하방을 만만히 보지 말라는 형소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시 보니 애들이 그냥 애들이 아니다. 꼬마들이 가볍게 제 키만큼 뛰어올랐고, 권장을 휘두르는데 제법 매서운 바람이 일곤 했다.
‘이래서 천무관인가?’
가문의 무공을 익힌 아이들이 온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모두 제자리!”
무화전 대청에 한 사람이 서서 호통을 쳤다.
“교두!”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가더니 연무장에 도열했다.
단상에 오른 교두는 생각보다 젊었다. 이십대 중반이 조금 넘어 보였다.
젊은 교두가 무한을 향해 물었다.
“넌 뭐냐?”
“오늘부터 하방에서 수련할 심무한입니다.”
교두가 아래위로 훑어보곤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온다고 들었다. 나는 하방 전담교두 하기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