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오늘은 기천부에 가는 날인 거 잊지 않았죠?”
“아!”
무한이 깜박 잊었다는 듯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한 달에 한 번, 기천부로 가서 강유를 만나야 한다.
기천부주 강유.
무한의 후견인이다.
할아버지는 세 명의 의제들 가운데 천기자와 가장 친했다고 한다.
천기자의 아들이 강유다.
담철조는 그가 아버지와 막역했다고 말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가면을 쓴 듯 표정의 변화가 없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도 기천부주 강유는 무표정한 얼굴에 고저가 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라.”
그는 말수가 적었다.
찾아가면 차를 내주고는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는데 두 번째부터는 무한도 가져온 책을 펼쳐 읽었다.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이 말없이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데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큰 눈이 유난히 또랑또랑 빛나는 여자아이다.
“아버지. 만현각에서 사람이 왔어요.”
강유는 천하방의 서고, 만현각의 주인이기도 하다.
“알았다. 곧 간다고 전해라.”
여자아이가 커다란 눈으로 무한을 슬쩍 보고는 조용히 나갔다.
뒷모습에 시선을 주니 강유가 말했다.
“소소라고 하지. 너와 동갑이다.”
“네…….”
딸이 있었구나.
새삼 강유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유는…… 그런 사람이다.
너무나 무심해서 존재하는 것 같지 않은 사람.
그러니 그에 대해 뭘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 말이다.
강유가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 만현각에 가봐야겠구나.”
무한이 일어나는데 강유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삼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무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방을 나왔다.
그렇다.
그새 삼 년이 지났다.
무한은 그사이 머리 하나 정도 컸다.
***
천하방 내성 총관 포승이 사당으로 찾아왔다.
할아버지 장례식 때 한 번 보고 두 번째였다. 약간 배가 나온 인상 좋은 중년 사내였다.
포승이 향에 불을 붙이고 제단 앞에서 두 번 절을 하더니 향로에 꽂았다.
향을 올린 포승이 무한 옆자리에 앉아 말했다.
“심 부주. 삼년상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상을 마치면 거처를 옮겨야 할 것 같네.”
“거처를 옮기다니요?”
“장로회의에서 검천전을 심 방주의 위업을 기리는 전으로 단장하기로 했네.”
포승의 얼굴에 약간 난감해하는 빛이 스쳐 갔다.
“그렇군요.”
“할아버지를 기리는 전당을 꾸미는 일이잖은가. 심 공자의 거처는 아버지가 쓰던 검각으로 옮기면 될 걸세. 그리고…….”
포승이 잠시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북쪽에 있는 전각 일부를 도천부에서 빌려달라고 하네.”
도천부라면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하방주에 오른 도왕의 가문이다.
“전각을 빌려달라고요?”
“그렇다네. 도천부에 인원이 늘어나면서 전각이 부족하다더군. 대가는 충분히 치르기로 했네.”
상의가 아니라 통보다.
무한이 잠시 생각하곤 대답했다.
“거절한다고 전해주세요.”
포승이 의외라는 듯 흠칫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핫핫. 뭐, 자네 마음이니까. 그런데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네. 빌리는 대가를 치르겠다지 않은가.”
무한은 이미 끝난 이야기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포승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렵지 않게 성사시킬 줄 알았는데 무한이 딱 잘라 거절했다.
재차 설득하려는데 무한이 말했다.
“거기는 무적대가 머물던 곳이잖아요. 밖에서 고생하고 돌아왔는데 거처가 없어졌다면 서운해 할 거예요.”
“그, 그렇긴 하지. 그럼 그리 전하겠네.”
포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천하사패의 일원 검천부에게 뭔가를 강요할 수는 없다. 무한이 어리긴 해도 검천부주 아닌가.
포승이 헛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삼년상을 마쳤으니 심 부주도 이제 무관에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로 보면 많이 늦은 셈이네.”
‘무관?’
무한은 생각지 않았던 일이다.
삼년상이 끝나면 검천부 비밀연공실에 처박혀 경천십이식을 익힐 생각이었다.
“천하방에는 학당이나 무관이 꽤 많다네. 성 안팎에 사는 사람만 일만여 명이 넘으니 당연한 일이지.”
잠시 생각을 한 무한이 물었다.
“어떤 무관이 좋은가요?”
“가장 명성이 높은 곳은 천무관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포승이 잠시 생각하곤 말했다.
“자네에게는 진무관이 맞을 것 같군.”
“진무관이요?”
“무공을 익히려면 진무관이 나을 걸세.”
포승이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라고 확신이라도 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관 명성이 가장 높다면서요?”
“천무관은 문무를 겸비한 곳이네. 단순한 무관이 아니라 장차 천하방을 이끌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네. 그런 만큼 아무나 받지 않지.”
무한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저는 자격이 안 된다는 건가요?”
차가워진 무한의 눈빛에 포승이 급히 손을 저었다.
“오해하지 말게. 심 방주의 후손인 자네도 충분히 자격이 있지. 다만 무공을 익힐 생각이라면 진무관이 낫다는 이야기네.”
“무슨 이유로 낫다는 건데요?”
“천무관에는 천하방 고위직의 자제들이 다니지. 천하방 고위직들이 누군가? 하나같이 고수들이잖은가.”
포승의 말에 따르면, 천무관에 입관하는 문하생들은 뛰어난 가전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천무관에서는 새로운 무공을 전수하는 것보다, 문하생들이 각자 가전무공을 성취하는 걸 목표로 지도한다.
“반면 진무관은 자신이 원하는 무공을 익힐 수 있고 수련 과정도 다양하다네.”
“그렇군요.”
“방주께서 자네에게 경천무궤를 남겼지만, 열여섯이 되기 전에는 받을 수 없지 않은가.”
포승은 마치 심양조가 살아 있기라도 한 듯 꼬박꼬박 방주라고 불렀다.
무한도 할아버지가 경천무궤를 남겼다는 건 알고 있다.
후견인 강유가 보관하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무한이 열여섯 살이 되면 주라고 유언을 남겼다.
무한이 잠시 생각을 하고는 대답했다.
“천무관으로 가겠습니다.”
“엥?”
포승은 기껏 설명해줬는데 무한이 천무관을 고집하니 기분이 좀 상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무한이 포승의 말을 잘랐다.
“천무관은 학문도 익힌다면서요?”
“그렇긴 하지.”
“학문을 익히는 건 제게 무척 중요한 일이에요. 물론 무공도 중요하지만.”
포승이 멀뚱멀뚱 무한을 보다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게.”
그날 밤.
무한은 지하 비밀연공실 서가로 갔다.
서가에 놓인 책은 몇 권 되지 않았기에 바로 원하던 책을 찾았다.
검천의궤(劍天儀軌).
천기자가 검천부를 지으면서 남긴 설계도.
첫 장을 펼치니 천기자가 남긴 글이 눈에 들어왔다.
「검천부는 건축에 대한 나의 이상을 실현한 공간이다.」
천기자가 자부할 만했다. 검천부의 전각들은 정말 적재적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뛰어난 천재가 치매라니.’
유아는 천하방 안에서 떠도는 소문을 전해주었다. 그중에 천기자에 대한 소문도 있었다.
“젊어서 머리를 너무 써서 그만 치매에 걸렸대요. 그래서 기천부 안에 갇혀 있다더군요.”
그래서일까?
천하방에 와서 도왕과 권왕은 봤는데 천기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무한은 검천의궤를 살피다 옮길 거처를 정했다.
‘우천각(憂天閣).’
비밀연공실에는 비밀통로가 있는데, 우천각으로 연결된다.
‘이름은 좀 이상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
삼년상이 끝났다.
검천전을 비워줘야 했다.
무한은 우천각으로 짐을 옮겼다.
“아니 왜, 우천각으로 가는 겐가?”
마침 찾아온 총관 포승이 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아버지가 머물던 검각(劍閣)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은가?”
“나중에 크면 갈게요. 지금은 너무 커요. 우천각이 아담하고 좋아요.”
“뭐, 자네 의사가 중요하니까. 검천전은 이대로 보존할 것이니 언제든 이용하게.”
“그럴게요.”
검천전에서 비밀연공실로 가는 비밀통로는 막아두었다. 안에서 열지 않는 한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포승이 가져온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건 지난 삼 년 간 검천부의 재산 변동사항을 정리한 것이네. 자네가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내가 관리했는데 이제 자네도 알아야겠지?”
검천부 재산집행권은 강유가 가지고 있고, 장부 관리는 총관 포승이 해왔다.
“이게 다 검천부 재산인가요?”
보따리를 풀자 장부가 여러 권 나왔다.
“신경 쓴다고 썼는데 재산이 좀 줄었네.”
포승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천하상단 놈들이 농간을 부리는 것 같더군. 내가 강 각주에게 따로 말을 해뒀네. 천하상단에 주의를 주라고 말야.”
검천부 사업 대부분을 천하상단이 위탁경영 하고 있다.
“솔직히 내가 맡은 일이 많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네. 미안하네.”
포승이 변명하듯 말했다.
무한이 장부를 보았다.
무언가 복잡하게 적혀 있다.
“장부를 보는 법을 익혀야 할 걸세. 아니면 믿을 만한 총관을 구하던가.”
“할아버지는 어떻게 관리하셨는데요?”
“천하상단에서 알아서 했지. 그런데 심 방주께서…….”
포승이 말하다 말고 인상을 썼다.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천하상단에서 소홀히 한다는 말이겠지.’
검천부 밖을 나간 적이 없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무한도 안다.
천하제일인도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사람들은 살아야 하니 지금의 천하제일인 도왕을 떠받든다.
포승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아무래도 총관을 두는 게 좋을 건 같은데. 마침 추천할 만한 사람도 있고.”
무한이 잠시 생각하곤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생각해볼게요.”
포승은 새삼 무한이 자신의 제의를 번번이 거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무관의 일도, 도천부의 제의도…… 지금처럼 딱 잘라 거절했다.
왠지 부아가 치민 포승이 목소리를 높였다.
“총관은 반드시 필요하네. 그리고 유능한 총관을 얻는 것은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진배없다네.”
무한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천군만마와 비교할 만한 총관은 어떤 분일까요?”
“그야 영민하고 이재에 밝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지.”
“포 총관 같은 분이군요.”
포승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크흠.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 뭘까요?”
“그 셋을 나눌 수는 없지. 총관이 될 자라면 세 가지를 다 갖춰야 한다네.”
“모두요?”
“그렇지. 총관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네. 그러다 큰 코 다치는 문파를 여럿 봤어.”
“아, 그런 거군요.”
무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 내 말대로 하게. 내가 좋은 사람을 추천해줄 테니…….”
“아뇨.”
“엥?”
무한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중요한 분을 모시는 일이잖아요. 신중하게 생각해볼게요.”
“그렇긴 하지만…… 계속해서 내가 관리할 수는 없다네. 나도 할 일이 많아서…….”
포승이 말하다말고 입을 닫았다.
사실 총관이 온다 해도 강유가 재산집행권을 가지고 있는 한 할 수 있는 게 없다.
“으음. 알겠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말하게.”
포승이 돌아간 뒤 무한은 유아를 불렀다.
유아는 상인 집안 출신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상인 집안이라도 여자에게까지 일을 시키지는 않았을 테니.
그런데 유아는 스스럼없이 장부를 펼쳐 들었다.
“이게 검천부 재산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