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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3화 (3/250)

3화

거인이 세상을 떠났다.

사십여 년 동안 무림을 오시하며 군림했던 천하제일인.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마저 눈치를 살펴야 했던 절대자.

검신 심양조.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천하방은 급보를 받고 달려온 인근 대소문파의 조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천하방은 장례식 이후에도 삼 년 간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조문객을 받겠다고 선포했다.

***

사당으로 가는 길에 봄볕이 따스하게 깔렸다.

하인들이 사당 주위를 쓸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늙은 하인 마씨가 고개를 숙였다.

무한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늙은 하인의 허리가 더욱 내려갔다.

무한이 사당 계단을 오르는데 뒤에서 쳇,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하인이 못마땅한 눈으로 무한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놈아, 눈 깔아.”

마씨 할아범이 손자를 야단쳤다.

“흥! 보는 것도 못해요?”

젊은 손자가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 불손한 눈빛으로 보니까 그렇지.”

“에이, 더러운 세상. 누구는 할아버지 잘 만나서 커다란 장원을 물려받고, 누구는 그 장원을 쓸고…….”

마씨 할아범이 빗자루로 손자의 등짝을 치며 호통을 쳤다.

“이놈이? 오냐 오냐 했더니. 미친 게냐?”

“흥! 두고 보세요. 저도 무공을 익혀 출세할 거라고요.”

“이놈아, 아무나 칼질을 하는 게 아니다. 네놈 신세가 세상에서 젤 편한 것이야.”

“뭔 소리래? 평생 하인 노릇하고 살라는 거야?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그런 악담을 해도 돼? 말이 안 통한다니까 정말.”

손자가 빗자루를 팽개치고 가버렸다.

“에구, 분수를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하루 세 끼 밥 먹으면 그게 다행인 줄 알아야지.”

마씨 할아범은 손자가 버린 빗자루를 집어 들고는 비질을 했다.

“꽃을 피우기도 전에 꺾이는 신세를 네가 어찌 알겠누…….”

마씨 할아범이 노래를 하듯 곡조를 섞어 중얼거렸다.

노랫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무한의 귀에 들렸다.

마씨 할아범이 알았다면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가 비질하고 있는 자리와 사당과의 거리는 꽤 멀었으니까.

무한은 묵묵히 사당 문턱을 넘었다.

심씨 사당은 크지 않았으나 단정했다. 기둥 하나하나 기름을 먹인 천으로 닦아 윤기가 흘렀다.

제단 위에 놓인 위패는 셋이었다.

할아버지의 위패가 위에 놓여 있고, 아래 아버지와 어머니 위패가 있다.

할머니의 빈자리가 궁금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지. 밤새 안녕하셨어요?”

무한이 할아버지의 위패에 향을 피웠다.

“아버지, 어머니. 잘 계시죠?”

이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패에도 차례로 분향했다.

위패를 가만 바라보면 말소리가 들린다.

- 무한아, 이번에 갔다 돌아오면 앞으로 함께 살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가 네게 가르쳐줄 게 있다. 그동안 열심히 학당에 다닐 거지?

- 할아버지께서 사람을 보내실 거야. 그 사람들을 따라가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들리는 목소리다.

무한은 제단 옆에 좌정하고 앉았다.

상주로서 조문객을 맞아야 한다.

하지만 찾는 이가 없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반년.

천하방에서는 삼 년 동안 조문을 받겠다고 했으나 일찌감치 조문객은 끊어졌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사당에서 무한은 조식(調息)을 하거나 어머니가 가르쳐준 투심술을 익혔다.

할아버지에게서 어머니가 수련시킨 수련이 투심술이라 말을 들은 뒤, 무한은 천목투심술(天目透心術)이라고 이름 지었다.

실제로 머릿속 천목혈을 단련하는 수련이었기 때문이다.

고른 호흡을 하는 조식을 할 때는 경천심결을 외웠다.

그러면 몸이 편해지고 아랫배에 기운이 찬다.

- 의식을 지우고 단전을 관조하라.

할아버지가 알려준 경천심결(驚天心訣)의 첫 구절이다.

그 말대로 의식을 지웠다.

숨소리가 들리다 그마저 사라진다.

호흡을 한다.

아니, 몸이 절로 숨을 쉬었다.

어느 순간 졸음이 쏟아진다.

졸음에 겨워 혼곤한 의식 사이로 소리가 들린다.

무한은 가만 소리를 들었다.

지나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사당 지붕에 햇볕이 흘러내리는 소리.

주위의 모든 게 소리로 들린다.

내관반청(內觀返聽).

늘 그렇듯.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떨어졌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

검천전(劍天殿).

사당에서 돌아온 무한은 대전 기둥 앞에 쪼그려 앉아 졸고 있는 유아를 보곤 잠시 멈춰 섰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항상 나와서 기다린다.

무한이 다가가자 유아가 벌떡 일어났다.

유아는 무한보다 두 살 많다.

“핫핫. 또 깜박 졸았네. 저녁 드셔야죠.”

유아는 천하방과 거래하던 상인의 후손이었다. 갑자기 부모가 돌아가자 검천부에 의탁했다.

고아지만, 여느 남자보다 더 씩씩하다.

검천부에 몇 남지 않은 하인들 중에 가장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유아다.

오늘 저녁밥은 닭고기와 야채, 탕면이었다.

“같이 먹자.”

“난 먹었어요.”

“기다리라고 했잖아.”

“배고픈 걸 어떡해요.”

“내일은 꼭 같이 먹자.”

“그래요.”

유아는 늘 그렇듯 선선히 대답했다.

그리고 지키지 않는다.

그래서 무한은 늘 혼자 먹는다.

저녁밥을 먹고 씻고 난 다음 서재로 갔다.

할아버지 심양조의 서재에는 정말 책이 많았다.

무한은 왼편에서부터 하나씩 읽어가는 중이다. 오늘은 드디어 세 번째 칸으로 넘어갔다.

굉천기(宏天記).

지은 이도 알 수 없는 책이다.

두어 장 읽어보니 천하를 주유하며 본 문물을 적은 책이다.

「서쪽으로 한없이 가면 모래로 이어진 땅이 나온다.」

모래로 이어진 땅이라니.

무한은 본 적도 없는 사막을 상상했다.

모래만 있는 땅.

아버지가 사막에 대해 들려준 적이 있다. 그때는 아버지가 그 사막을 건너 서역에 다녀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상인이 아니었다.

천하방 검천부주가 상인이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왜 아버지는 상인이라고 신분을 속였을까.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신을 감추고 싶어 했을 거란 생각을 무한은 가끔 한다.

- 쟤 엄마는 기녀였대.

어렸을 적 누군가 말했던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엄마가 기녀라서 부끄러웠던 걸까?

정말 그랬을까?

가끔 스스로 물어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죠? 아버지? 할아버지도 아니랬어요.’

할아버지 심양조를 첫 대면했을 때, 무한은 천하방으로 오는 내내 품었던 질문을 했다.

엄마가 기녀라서, 천하방 검천부의 안주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자결을 명한 것이냐고.

할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아버지도 아니라며 웃는다.

따악! 따악! 따악!

삼경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야 할 시간이다.

‘갔다.’

온종일 따라다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누군가 보낸 감시자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는 감시자인데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시선이 느껴진다.

그림자가 사라진 뒤에도 무한은 잠시 더 누워 있다 일어났다.

어둠 속이지만 익숙한 걸음으로 할아버지 침실로 갔다.

스르륵.

심양조의 침실 구석 벽면을 누르면 감쪽같이 벽이 열린다.

벽 안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인데, 방 안의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

‘할아버지…….’

보름간의 외출에서 돌아온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불러 이 벽문을 열었다.

소리도 없이 벽이 열리고 서늘한 어둠이 밀려나오자 놀라서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할아버지는 그런 무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겁먹을 것 없다. 그러고 보니 무한이는 아직 어린아이로구나.”

“겁나서 그런 게 아니에요. 벽이 갑자기 열리니 놀란 것뿐이에요.”

무한의 말에 할아버지가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놈아! 아무리 어른처럼 굴어도 할아비 눈에는 어린아이란다.”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두려워했지만, 알고 보면 은근히 장난스러운 면이 있었다.

늘 다니던 길이다.

어둠 속 계단으로 내려가면 또 문이 나온다.

문을 열면 작은 석실이다.

네모난 석실 한쪽에 수로가 흐른다. 맞은편에 작은 서가가 있고 책이 몇 권 놓여 있다.

할아버지는 그 책들을 가리키며 신신당부했다.

- 이 서가의 책들은 세상에 나가면 안 된다. 네가 만일 검천부를 떠난다면 반드시 태워라.

석실 벽 앞에 선 무한이 어딘가에 손을 댔다.

스르릉.

벽이 열리고, 이번에는 커다란 원형 석실이 나왔다.

천장에 박힌 커다란 구슬들이 환한 빛을 발하고 있어 대낮 같았다.

할아버지의 비밀 연무장이다.

원형 석실 벽에는 검을 든 무사가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검으로 새겨놓은 것이다.

- 사람들은 이 검법을 경천십이식(驚天十二式)이라고 부른다. 평생 연마해왔는데……

할아버지는 무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착잡한 표정이었다.

- ……아직도 부족하구나.

할아버지는 검신이라 불렸다.

한 자루의 검으로 마천(魔天)의 무수한 고수들을 꺾었다고 했다.

무한이 벽면에 그려진 그림을 보았다.

검을 든 무사는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검을 내려치거나 올려치거나 찌르거나 당기거나 밀거나.

벽화의 무사는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지난 반년 간 수없이 보았으니 동작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박혀 있다.

무한은 그림의 자세를 하나하나 취했다.

한 동작, 한 동작.

한 동작은 가능하다. 그런데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말했다.

- 사람들은 경천십이식을 대단한 절학이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이건 형식일 뿐이다.

검과 일체가 되면 마음이 열리고 비로소 검의 극의를 접할 수 있다.

몸으로 먼저 받아들이면 마음이 따른다는 걸 명심해라.

그러고는 경천심결을 일러주었다.

- 경천심결은 내 일생의 공부를 정리한 것이다. 경천심결로 깨닫는 바가 있거든 그때 경천십이식을 익혀라.

할아버지는 천재였다.

천재는 다른 사람도 천재인 줄 아나보다.

무공을 익히라고 하면서도 심결 하나 달랑 전하고 말았다.

‘심결은 심결일 뿐인데.’

할아버지 서재에 있는 무공서를 읽은 바에 따르면, 심결은 내가공부, 흔히 내공이라는 걸 쌓는 심공이 아니다.

내공을 운용하는 심법과도 다르다.

심결이란, 깨달음의 일종이다.

깨달음을 말로 전한 것이니 그저 외우고 되새기며 그 뜻을 헤아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다.

무한은 외우는 건 자신 있었다.

들려준 첫날 바로 따라 외우자 할아버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참으로 아쉽구나. 조금만 더 일찍 너를 만났더라면.

***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뀌어도 무한의 일상은 변함없었다.

검천부는 무척 넓었으나 사람들이 몇 없다. 하인과 몇몇 무사들만 오갈 뿐이다.

무한을 데려온 담철조는 방의 명을 받아 신검대를 끌고 광동으로 갔다.

광동은 흑천의 영역으로, 지금도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다.

무적대주 공곤은 보지도 못했다. 무한이 천하방으로 오기도 전에 남만으로 갔다는데 소식이 없다.

무한은 아침에 일어나서 사당으로 가 온종일 위패를 지키고, 저녁이면 돌아와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할아버지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

이런저런 책을 읽다 술시 무렵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면 무한을 지켜보던 그림자가 사라진다.

무한은 가끔 그림자에 대해 생각했다.

어디서 보낸 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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