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무슨 스터디를 새벽같이 해?”
“곧 시험이잖아! 하하!”
후다닥 집에서 나오며 도화지에게 전활 걸었다.
“누나!”
-오고 있어?
“네, 막 집에서 나왔어요.”
자려고 했는데 갑자기 도화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냄새가 난단다. 피의 군주나 퀸은 죽었지만, 아직도 균열이 열리고 있는 걸까? 밤거릴 빠르게 이동하는데 묘하게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만나!
“범아!”
내 목소리에 반응한 범이가 가방에서 뛰어내리며 오토바이 형태로 변했다. 냄새가 난다는 건 저쪽에서 뭔가가 넘어왔다는 것인데 이미 강해질 대로 강해져 버려서인지 두려움은 없었고 가벼운 흥분만 가득했다.
부우우웅.
야심한 시각이라 차가 거의 없었기에 도화지가 말해준 장소까지 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불빛이 번쩍거리고 있었고 경찰들이 사방을 돌아다녔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다리 위에서 내려보고 있었는데 저 아래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강나은 경위다.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20분쯤 지나자 차가 한 대 섰다.
“여어!”
김우태였다.
“어? 새 차 사셨어요?”
“아버지 차야. 내 차가 퍼졌어.”
“아….”
“근데 왜 저렇게 난리야? 벌써 놈이 선수 친 건가?”
“모르겠어요. 누나가 와야 알 것 같은데….”
“화지도 아까 택시 탔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김우태가 내 옆에 서서 저 아래를 바라보았다.
“누가 죽었나?”
“아마도… 그랬으니까 저렇게 경찰이 많이 왔겠죠.”
“쳇, 한발 늦었네.”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잡으면 돼요.”
“…오.”
“왜요?”
“이제 완전히 히어로 같은 얼굴이 됐는데?”
“제가요?”
“그래.”
나는 그저 웃어버렸다. 의협심이 강하거나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잠시 후 도화지까지 합류했다. 엊그제 무려 1천만 포인트짜리 ‘기적의 명약’을 재능마켓에서 산 도화지는 곧장 할머니에게 달려갔는데 할머니의 치매가 완전히 나았다고 했다. 돈으로 따지면 엄청난 금액이었겠지만 도화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할머니가 건강해져서일까? 그녀의 얼굴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어때?”
김우태의 말에 도화지가 말했다.
“근처에 있어요. 아무래도 강 속에 있나 본데. 아니면 지하거나.”
“어떤 놈인지 알겠어?”
“냄새 자체는 퀸과 비슷한데 똑같진 않아요.”
“퀸이라….”
퀸은 죽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식들이 남아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지네 같은 거 한 마리만 튀어나와도 서울이 마비될 거다.
“기다리자. 놈이 기어 나오면 바로 잡으면 되겠지.”
김우태가 난간에 기대며 말했다.
“어머니는 어떠셔?”
그의 말에 내가 미소 지었다.
“똑같죠.”
장사는 여전히 잘되고 학교에서 봉사도 하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을에 이사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오! 잘됐네!”
재능마켓 포인트를 이용하면 당장에라도 목돈을 쥘 수 있겠지만 어머니가 하나하나 목표를 이뤄가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도화지가 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코를 벌름거리는데 그게 귀여워 보여서 웃었다. 그런데 나처럼 도화지를 보던 김우태가 얼굴을 붉혔다. 같은 걸 바라보는데 느끼는 감정이 달랐던 것이다.
“…이제 아이돌 사생팬은 안 하시는 거예요?”
“아, 음. 그게 갑자기 식어버리더라고. 널 보면 평범한 사람하고 연애하는 것도 좋진 않아 보이고. 우리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잖아. 가까이하면 예원이처럼 인질이 되어버릴 수도 있고.”
“저 연애 하는 거 아닌데요….”
“아니긴…. 예원이가 너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알긴 하냐? 눈동자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
“뭣보다 이 빌어먹을 매력 때문에 사람들이 날 좋아하질 않아.”
“상쇄하는 아이템 없었어요?”
“덕지덕지 바르면 어떻게든 제로까진 될 것 같은데 그런 데 쓰긴 포인트가 아깝더라. 그냥 이대로 살려고. 적응하니까 귀찮게 달라붙는 사람도 없어서 나쁘지 않아. 근데 저 경찰, 그때 그 조력자지?”
“네.”
“자주 보네.”
강나은이 저 아래에서 열심히 주변을 뒤지고 있었다.
“설마 저길 덮치는 건 아니겠지?”
“모르겠어요. 근데 대비는 해야겠죠?”
내 활의 사정거리를 넘어서기에 그렇게 되면 뛰어내려야 할 거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내겐 날개가 있고 한강 다리의 높이 정돈 부담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진짜 정상의 범주를 한참 넘어버린 것 같았다.
30분을 더 기다렸지만, 변화가 없었다. 김우태가 하늘을 보았다.
“이렇게 있으니까 다 꿈같네.”
지금도 강남역에 가면 재능마켓이 있고 그 안엔 난쟁이들이 바글바글 놀고 있다. 문 하나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열리고 언제든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김우태가 분위기를 잡아서일까? 지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처음 재능마켓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당황했었던가. 고블린 하나 잡는 것도 벌벌 떨었는데….
“형은 후회하지 않아요?”
“무슨 후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
“전혀! 나는 지금이 좋아. 이렇게 재미있는 게 세상에 또 있겠냐?”
누군가에게 우리 얘길 들려줄 순 없겠지만 이 흥분은 진짜다. 그리고 이제 이 긴장감을 우릴 살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아앗! 저기! 민준아!”
갑자기 도화지가 외쳤다. 우리도 급히 강을 바라봤는데 무언가 수면으로 떠 올랐다가 다시 잠수했다.
“봤지? 방금?”
도화지의 말에 내가 활을 꺼냈다.
“꽤 컸어요. 처음 보는 형태였고요.”
“악어처럼 생기지 않았어?”
“모르겠어요. 보면 알겠죠. 더 있을지 모르니까 찾아봐요.”
“응!”
다행인지 불행인지 경찰들은 놈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랬다면 끔찍한 소란이 났을 거다.
“또 나오면 저건 제가 잡을게요.”
드링크 몇 개를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다닌다거나 모습을 잠시 감출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빠르게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조심하고.”
김우태의 말에 내가 피식 웃었다.
“어쩌죠? 전혀 긴장이 안 되는데요.”
“솔직히 나도 그래. 크크큭!”
우리는 강하다. 세상을 지킬 힘이 있었고 저런 괴물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왜… 전에 정글에서.”
“네.”
“내가 저 녀석에게 잡혀갔을 때 있었잖냐.”
김우태가 가이를 보았다. 그때를 생각하니까 웃음이 터졌다. 지금은 저렇게 귀여운 가이였지만 그 시기엔 사상 최고의 강적이었다.
“그때 혼자라서 그랬는지 진짜 무서웠거든. 저 녀석이 당장에라도 갖고 놀다 잡아먹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고.”
“하하!”
“그때 깨달았어. 이 세상에도 그렇게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거.”
“형도 그 얼굴 됐네요.”
“뭐?”
“히어로요.”
“크으…. 그럼 뭘 하냐. 나만 보면 다 표정이 썩는데. 어제는 그냥 편의점 가려고 나왔는데 경찰이 잡더라니까? 검문하겠다면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하는 때가 있다. 우리에겐 그것이 일상이었고 그 대가로 힘을 얻었다.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도 우리가 좋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오… 경찰들 간다.”
다는 아니고 일부였지만 경찰차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조사가 끝난 것 같았다. 강나은은 아직도 남았다.
“근데 아까 그놈은 왜 여기에서 얼쩡거리는 거지? 둥지라도 있나?”
“그럴 수도 있죠. 퀸이 알을 잔뜩 낳고 죽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도 찾아야겠네.”
퀸이 낳은 자식인지 아니면 이 근처에 균열이 열린 것인지 아직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이 도시를 지키는 수호자다. 내게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움찔!
활을 감추며 우리가 돌아섰는데 젊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에게 와서 말했다.
‘군인인가?’
머리가 짧고 잘생긴 남자였다.
“무슨 일이에요? 도와드려요?”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집에 가는 길에 그냥 잠깐 답답해서 바람 쐬고 있었어요.”
김우태의 말에 그가 우릴 보며 갸웃거렸다.
“그러시구나. 일행이신 거죠?”
“네.”
그가 우리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면서 도화지를 바라봤는데 만약 우리가 도화지를 구속하고 있는 게 느껴지기라도 하면 곧장 달려들 기세였다. 하긴 도화지가 얼마나 예쁜가? 단순히 이목구비뿐만이 아니라 매력이 극한까지 높아져서 후광까지 두를 정도였다.
싱긋.
도화지가 웃자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다시 자전거를 탄 남자는 의심이 풀렸는지 다리를 넘어갔다. 그걸 본 김우태가 말했다.
“그래도 아직은 세상, 살만하네. 저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돕기 위해 나서는 이들. 우리는 그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나나 김우태처럼 강한 힘이 없다고 해도 그 마음만은 우리와 같을 것이다.
“괜히 저런 사람들까지 당하게 하지 말고 빨리빨리 처리하자.”
“네, 이번에 보이면 바로 뛸게요.”
자전거를 탄 남자가 저 끝에서 우릴 한번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김우태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어느 것이 더 값어치 있다고 말할 순 없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겐 같은 무게일 테니까.
“…아아앗? 오빠! 저기! 날아간다!”
도화지가 깜짝 놀라 외쳤다. 아까 그 악어 같은 놈 말고 다른 놈이 또 있었다. 그게 우리 반대편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는데 한 쌍의 날개가 있었고 키가 3미터는 되어 보였으며 몸통은 사람처럼 생겼다.
“이런!”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다.
“도망가게 하면 안 되는데!”
도화지가 말할 때 우리 뒤에서 뭔가가 거대한 게 날아올랐다.
“허억!”
“아리야!”
“야! 여기서 그러면 안 돼!”
모두가 동시에 기겁하며 외쳤지만 이미 날아오른 아리는 저쪽 하늘로 날아가더니 파닥거리며 날아가던 괴물을 덥석 부리로 물고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허억? 방금 뭐였어?
-뭐지? 뭐가 날아갔는데?
-비행기인가?
-새였습니다! 엄청나게 큰 새요!
저 아래에서 소란이 일었다. 워낙 찰나의 일이라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아리에겐 더 주의를 시켜야겠다. 동영상이라도 찍히면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힐 거니까.
“아오, 놀래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김우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한 마리는 잡았잖아요. 날아다니는 놈이라 도망쳤으면 골치 아팠을 거예요”
다시 활을 꺼내며 내가 난간에 붙었다.
“보이면 바로 갈게요.”
많은 이들이 평온한 꿈나라로 가 있을 깊은 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이었지만 외롭거나 두렵진 않았다. 내겐 동료가 있었고 저 아래에도 사명감으로 잠을 쫓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가 있는 한 안전한 밤은 계속될 것이고 세상이 그걸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아니까.
“어엇! 저기! 나왔다!”
“오오옷! 아까 그놈이야!”
두 사람이 동시에 한곳을 바라보며 외칠 때 나는 난간을 손으로 잡으며 미소 지었다.
오늘도 날아볼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