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놈이 당황했는지 다급한 숨을 들이켰을 때 김우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콱콱콱!
날아든 인형이 피의 군주의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저 광경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인형이 우리 편인 게 천만다행일 정도였다.
“지금이야! 민준아!”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활을 놓고 다른 걸 꺼내 놈에게 달려들었는데 3초는 순식간에 지나갔고 두 번째 망치질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놈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내가 바짝 접근했을 때였다.
“허엇?”
내가 든 걸 본 놈이 기겁했다. 다시 사라지려고 했지만 내 ‘눈’은 녀석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푸욱-!
“크아아아아학!”
자지러지는 비명과 울컥 토해내는 피가 허공에 함께 뿌려졌다. 놈의 심장에 정확히 파고든 나뭇가지는 화르르르륵! 불타면서 놈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괴로운지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움직이는 피의 군주는 두 손으로 가지를 뽑아내려고 발버둥 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커허억-!”
엎드려서 피를 토해낸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방심은 금물이었다. 아까도 저렇게 죽어가다가 갑자기 관에서 튀어나온 놈이었다.
“형! 누나!”
“알았어!”
말하지 않아도 도화지가 부웅! 떠오르며 망치를 힘껏 휘둘렀다.
콰앙-!
우리가 선 건물 자체를 부숴버리겠다는 힘으로 찍어누른 망치는 놈의 등을 가격했고 가지는 더욱 깊숙이 그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
고음의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그의 몸에서 뭉게뭉게 검은 기운들이 뿜어져 나왔다.
“악마다!”
김우태가 알아보며 소리칠 때 피의 군주의 몸에서 빠져나온 검은 것들이 하늘로 솟구치며 사라져갔다.
“….”
“….”
“….”
화르르륵! 검게 타들어 가며 한 줌 재도 남기지 않는 그를 보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이제 모두 끝난 것이다. 절대자 셋을 모두 사냥했고 찝찝함은 기우였는지 메시지가 떠올랐다.
『피의 군주를 사냥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재능마켓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오오오! 마켓 열렸다!”
김우태가 반색했다.
『10,000,000p를 얻었습니다.』
셋을 사냥해서 누적한 게 무려 3천만 포인트! 이 정도면 재능마켓 물건을 싹쓸이하고도 남겠다.
『이제 모든 뱀파이어가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모든 악마가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흡혈의 저주에 빠진 이를 구해냈습니다. 재능마켓에 가서 보상을 수령하세요.』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꿈 같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간 하층을 넘나들며 했던 고생이 눈 앞을 가리는 것 같았다.
『한계 돌파를 이뤘습니다. 이제 전설급 필라테스를 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돌파했기에 전설급 필라테스로만 능력을 올릴 수 있습니다.』
흠칫!
필라테스라는 말에 모두가 움찔거렸다. 심지어 전설급이란다.
“와하하하! 끝났다! 우리가 해냈다고!”
“이거 꿈 아니지? 진짜지?”
김우태와 도화지가 서로를 얼싸안고 외쳤다.
그런데….
“꺄아아아아아!”
날카로운 비명에 모두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예, 예원아?”
“…!”
“뭐야?”
모두가 저쪽을 보고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낯선 남자가 예원이를 등에서부터 끌어안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 누구야? 너는?”
도화지도 당황해서 남자를 보며 얼떨떨해했다. 딱 봐도 뱀파이어가 아니었고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개자식들…. 너희는 나를 몰라보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이 여자가 너희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거든. 이 여자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입술이 덜덜 떨렸다.
“…민준아….”
그런데 내 ‘눈’이 녀석의 속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나만 보이는 것 같았다.
‘오크….’
찝찝함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저놈이 넘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다른 적이 하도 강력해서 잊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손가락만 까딱해도 이 여자 목은 그대로 부러질 거다.”
내가 이를 악물고 김우태를 봤다. 김우태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가 고통이나 피해를 흡수한다고 목이 부러지며 즉사한 사람을 살릴 순 없었다.
【오크라고?】
【우리가 아는 그 오크?】
내 속을 읽은 두 사람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오크를 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놈이 씨익 웃었다.
“네놈들의 비밀을 알아야겠다.”
“…비밀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에 강해질 수 있지? 저쪽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지?”
두 가지 질문이 쏟아졌다.
“알려주면 이 여자는 나중에 풀어주겠다.”
“…나중에?”
어이가 없어서 내가 놈을 바라보는데 오크는 그 나쁜 머리로 굳은 심지를 보여주었다.
“말해. 너희는 인간이 낼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섰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상황이 굉장히 심각했는데 김우태는 기막혀서 곧장 대답했다.
“운동했어. 그게 다야.”
“…나는 장난 하는 게 아니다.”
“그럼 우린 장난하는 거로 보이냐?”
나는 문득 생각했다.
“잠깐! 알려줄게. 눈으로 직접 보면 될 거 아니야?”
“허튼수작 부리면 바로 이 여자는 죽어! 무기를 버려!”
“알았어. 버렸다. 됐지?”
우린 바닥에 활과 망치를 놓았다.
“너도! 그거 버려!”
“…알았다고.”
인형이 김우태의 손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어쩔 생각이야?】
【민준아! 예원이 어떡해?】
두 사람의 속이 읽히는 지금 나는 복잡한 생각을 깡그리 날려버리며 앞서 걸었다.
“따라와.”
보여달라면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서 생각했다.
‘재능마켓에 외부인이 들어갈 수 있던가?’
생각해보면 늑대나 고블린도 왔었다. 그렇다는 건….
【오오?】
【설마?】
두 사람이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원하는 걸 줄게. 거기에 네가 필요한 게 다 있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계단을 내려가며 오크가 내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 없이 빠르게 5층으로 향했다. 오크는 오크인지 예원이는 거의 들려서 이동하고 있었는데 놈은 숨도 차지 않았다.
“…여기라고?”
“그래.”
재능마켓 앞.
놈이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열어.”
나는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오오오오? 공간 왜곡인가?”
열린 틈으로 안쪽을 바라본 오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밖에서 볼 때는 좁아 보였지만 저 안은 대궐이었다. 마법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멈춰! 거기에서 기다려!”
오크가 우릴 위협할 때 가이와 범이, 아리가 재능마켓 안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콰아앙-!
문이 거칠게 닫혔는데 나는 김우태를 보며 잠시 기다렸다. 도화지가 말했다.
“인제 어쩌지?”
“잠깐만요.”
저 안의 시간과 밖은 다르게 흘러간다. 아직도 명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지만 오크는 힘을 다 되찾지 못했고 재능마켓엔….
.
.
.
“오오오오! 마법 아이템인가!”
“꺄아아아!”
예원이를 거칠게 옆으로 밀친 오크가 유리 벽으로 달려갔다. 진열대엔 화려한 각종 아이템이 수백, 수천 개나 있었다.
“이놈들이 이것으로 그렇게 강했던 거였어!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어!”
그는 도망칠 수도 있었다. 퀸과 로드, 피의 군주까지 차례로 죽는 걸 보면서 이놈들은 자신이 과거의 힘을 다 찾아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놈들에게 소중한 여자를 인질로 잡으면 놈들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으하하하하하! 나는 이제 무적이다!”
그가 주먹을 유리로 힘껏 뻗었다. 아이템을 어서 착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퍼억-!
“허억!”
유리가 어찌나 단단한지 손목이 부러질 뻔했다.
“이, 이…?”
오크가 당황할 때 그의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홱!
돌아본 그가 목격한 것은 자신의 제국을 박살 내던 그 괴수들의 얼굴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
예원이는 뒤쪽까지 밀려나 버렸다. 갑자기 덩치가 커진 원숭이는 남자를 통째로 우적우적 씹어 삼켰고 그 몸에 밀려 모든 기구들이 사방으로 휩쓸릴 때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 같아서 두려움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뒤에서 뭔가가 엉덩이를 쿡 찔렀다.
“…흐읍?”
깜짝 놀라서 돌아봤는데 손가락 하나 만한 작은 사람들이 그녀를 올려보며 웃고 있었다.
“요정?”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
.
『지난주, 강남구 일대에서 일어난 교통혼잡은 브라칸 빌딩 지하의 가스 누출로 인한….』
언제나처럼 사회는 빠르게 안정화되어갔다.
『강남의 모 빌딩에서 있었던 납치극은 경찰의 빠른 대처로 마무리되었으며 피해자는 무사히 귀가….』
세상은 모른다. 우리가 그때 무얼 했으며, 어떤 것을 지켜냈는지.
“민준아! 학교 가야지!”
몇 년 만에 푹 자고 있었다. 어머니가 흔들어 깨워야 일어날 만큼.
“네.”
웃으며 몸을 일으키자 어머니가 서둘러 나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아들이 1분이라도 더 자게 하려고 기다리셨을 거다.
“….”
머엉.
요 며칠 계속 이런다. 목표가 사라져서일까? 아니면 그간 누적되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서일까?
“아차.”
학교부터 가야지.
오늘은 소집일이다. 아직도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학교에 가야 한다.
학생으로 사는 삶.
이것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는데 막상 평범해져 버린 일상으로 돌아오니 묘하게 허전했다.
대충 씻고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어?”
그런데 익숙한 뒷모습이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예원아?”
교복을 입은 예원이가 내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예원이도 그간 내게 연락이 없었다. 나도 뭐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미뤄뒀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재능마켓에 예원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이유가 컸다.
“늦었네?”
“아, 잠이 많아져서….”
머쓱한 표정으로 예원이와 나란히 발을 맞췄다.
“범이도 안녕?”
예원이가 내 가방을 보며 웃었다. 머리만 쏘옥 내민 범이가 갸르릉 울었다.
“….”
“….”
학교까지 가는 길. 이미 부지런한 녀석들은 모두 교문을 통과했을 시간이라 우리 둘은 한적한 거리를 걸었다.
“저기….”
말은 해야겠지?
“민준아.”
“응?”
그런데 예원이는 내가 예상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주말에 떡볶이 먹으러 갈래?”
“…떡볶이?”
“응!”
“그래, 그러자.”
두 손을 뒤로 모으고 빙글 돌아서며 웃는 예원이는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물어보려고 하다가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 예원이의 얼굴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앗! 녹색불! 뛰자!”
건널목 앞에서 예원이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야, 천천히! 다쳐! 저기 자전거 오잖아!”
내가 급히 말하자 예원이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네가 지켜줄 거잖아?”
활짝 웃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피식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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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839-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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