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흠칫,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니다. 김우태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위화감이 든 것이다.
“헌혈 받고 회춘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그런 상태냐?”
김우태가 건들거리며 인형을 들고 그에게 걸어갔다. 웬만해선 전면에 나서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도화지도 냉큼 김우태의 옆으로 섰다.
“네놈들의 움직임 따위는 아까 다 파악….”
말이 끝나지도 않았다.
휘익-!
날아든 김우태의 인형이 피의 군주의 가슴에 달라붙더니 콰악! 칼을 꽂아 넣었다.
“…헉?”
치명적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김우태의 속도가 아까보다 훨씬 빨라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박혀든 칼은 애들 장난 같았지만 이어 터지는 저주는 그도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민첩함이 떨어졌습니다.』
『몸이 무거워집니다.』
퀸을 잡고 오른 건 육체만이 아니었다. 그가 보유한 스킬과 능력, 인형까지도 전부 강해졌다.
“…미친!”
피의 주인이 인형을 잡고 내동댕이쳤는데 저주는 아직 그에게 걸려 있다.
“…저주라니… 이 몸에 저주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는 저주와 악마, 피로 태어난 존재다. 아까 지옥불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저주 역시 그에겐 별 효과가 없어야 했다. 그런데 저놈의 저주는 선명하게 몸에 남아 작용하고 있었다.
“야, 그렇게 패대기치면 우리 애가 얼마나 서운하겠냐. 이리 온. 우쭈쭈.”
김우태가 쪼그려 앉아 부르자 인형이 강아지처럼 뛰어왔다. 이 사이에 이미 도화지의 망치는 절반쯤 뒤로 돌아가 있었고 후우우우웅-! 피의 군주를 향해 날아가는 건 찰나였다. 아까보다 휘두르는 속도가 몇 배 빨라진 거다.
콰아아앙-!
“…커헉?!”
인형이 가슴에 칼을 박았을 때보다 더 놀란 피의 군주가 망치에 맞아 벽으로 날아가다가 팍! 안개로 변해버렸다. 도화지의 스피드가 아까의 퀸에 버금간 거다.
“놓치지 마! 도망치게 둬선 안 돼!”
김우태가 버럭 외쳤다.
휙휙휙! 위층에 있던 뱀파이어들 역시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감히 우리에게 내려오지 못하고 피의 군주 명령에 반응한 거다.
“칫! 내 망치에 맞았는데!”
도화지도 깨달았다. 피의 군주는 아까보다 세졌다. 게다가 영리하다. 모두를 속이며 관에 들어갈 정도다.
김우태와 도화지가 방에서 뛰어나갔을 때 나는 로드에게 가서 물었다.
“이 마법진이 있으면 놈이 못 나가나?”
“그래…. 하지만 그것도 해가 뜰 때까지만이다…. 해가 떠올라 이곳의 모든 초를 꺼뜨리면 봉인도 깨진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로드!”
시녀가 그의 뻥 뚫린 가슴에 두 손을 박아넣고 있지만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고작 이렇게 끝나려고 그렇게 오래 살아왔던가….”
인생무상이라 한다. 그 감정이 로드의 얼굴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법을… 마법의 끝을 보고 싶었다….”
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임종이나 지킬 때가 아니었다.
“예원아! 가자!”
내가 부르자 범이와 가이, 아리도 예원이를 따라왔다.
“잘 들어야 해. 네가 다치면 절대 안 돼.”
“으응.”
“너를 여기 두고 갈 수도 없을 것 같고….”
예원이만이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 움직이기 편할 거다.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
“응!”
복도로 나갔다. 인기척은 없었다. 퀸을 잡고 레벨업을 했으니 도화지와 김우태도 한동안 버틸 순 있을 거다.
나는 무전기를 꺼냈다.
“경위님.”
-들려요! 괜찮아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가 머릴 파고들었다. 무전기를 예원이가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계단이 막혀서 2층 커피숍으로 갈게요. 후문 쪽 창문요.”
-알았어요!
그녀라면 예원이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까는 마법진을 해체하려고 그녀에게 연락할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법진을 지켜야 했다. 피의 군주가 도망치면 우린 또 불안에 떨면서 배일 밤 악몽을 꿀 것이다.
이미 몇 달이나 오가면서 이 건물에 뭐가 있는지 위치 정도는 대략 알고 있었다. 문을 열고 커피숍으로 들어가서 가게 안쪽을 돌아 뒤쪽으로 넘어갔다. 건물 정면과 후면에 창이 난 길쭉한 구조였는데 드르륵! 창문을 열자 강나은이 보였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감전된 기분에 급히 손을 치웠다.
“으윽….”
나를 보던 예원이가 자기도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흡!”
예원이도 깜짝 놀라서 손을 치웠다. 마법에 공명한 예원이마저 나갈 수 없어진 거다.
“왜 그래요! 뛰어요! 별로 높지 않아요!”
밖에서 강나은 경위가 외쳤지만 나는 낭패한 얼굴로 예원이와 물러섰다. 그리곤 무전기를 들었다.
“사정상 저희는 못 나갈 것 같습니다. 다시 연락드릴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예원이의 손을 잡고 커피숍을 나섰다. 한 자리에 계속 있으면 놈들이 몰려들지 모른다. 나 혼자라면 괜찮아도 예원이까지 지키려면 둘러싸여선 곤란하다.
‘아,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
숨바꼭질은 퀸보다 피의 군주가 훨씬 잘하는 놈이었다.
.
.
.
“갑자기 뭐야?”
강나은 경위는 황당한 표정으로 위를 올려보았다. 방금 예쁜 여자애를 봤다. 납치되었다던 그 아이돌일까? 그런데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왜 다시 간 거지?
그녀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부터 혼란이 잦아들고 있었다. 서로를 향해 비난이나 욕설을 퍼붓던 사람들도 ‘어? 내가 뭘 하고 있었지?’란 표정으로 머쓱 해했다.
“뭔가 바뀌었어….”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끓어오르던 분노가 씻겨나갔다. 사방에서 들리던 고함도 뚝 끊겼다. 빠앙, 빠아앙! 쉴 새 없이 울리던 경적도 들리지 않았고 그녀 역시 빠르게 쿵쾅대던 심장이 평소로 돌아간 걸 느꼈다.
“후…. 모르겠네.”
안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괜히 방해만 될 것 같았다.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놈까지 있으니 그놈에게 걸리면 자신도 히트맨을 향해 공격할지도 모른다. 히트맨이 그런 것에 당할 만큼 약할 것 같진 않아도 그 꼴이 되는 건 싫었다.
“경위님!”
갑자기 뛰어간 그녀를 찾아 윤일권이 달려왔다.
“뭐였습니까?”
“일단… 그 납치된 아이돌은 찾는 것 같아요.”
“거! 다행입니다!”
한시름 덜었다는 듯 윤일권이 말했다. 그러면서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보시겠습니까?”
“뭐죠?”
“저격수들 카메라에 달려있던 영상입니다. 여기요. 아까 옥상에서 촬영된 겁니다.”
“으응? 어? 남자인가요?”
“그렇게 보이죠? 누가 옥상에 숨어 있습니다. 탈출하지 못한 걸로 보이는데 구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이 상황에서 옥상까지요? 그러다가 투입된 인원들 전원이 다….”
서로 총질할 수도 있다는 말은 참았다.
“하지만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주민일 수도 있는데요.”
“지금은 오히려 그렇게 숨어 계시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저 안에 있는 용의자들도 찾지 못했다는 뜻이잖아요.”
그가 그 자릴 슬금슬금 떠났다는 것을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속에 오크가 들어있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윤일권이 화면을 넘겼다. 이번엔 동영상이다.
“열화상카메라에 촬영된 겁니다. 기계가 일부 고장 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아까 안에서 불이 났던 것 같습니다.”
어이없는 온도가 찍혀 있었기에 강나은도 그렇겠거니 하며 화면을 보고 끄덕거렸다.
“이젠 꺼졌고요?”
“네.”
“다행이네요.”
여기서 대형 화재까지 겹치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강나은이 위를 올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가 떠났다면 건물 전면에 있는 게 창문이 더 커서 잘 보인다.
“곧 서장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도로가 이렇게 꽉 막혔는데요?”
“경찰 오토바이로요.”
“…아.”
그거라면 올 수 있겠다.
“그 전에 보고할 이야기를 만들어놔야 합니다.”
안에서 자경단이 괴물과 싸우고 있다, 이렇게 말했다간 뺨을 맞을 수도 있었다.
“인질범들이 아이돌을 잡고 있어서 쉽게 접근이 어렵다고 하면요?”
“일단… 저격수의 오발 사고부터 설명해드려야 합니다. 이미 보고를 받으셔서….”
한 발도 아니고 50발 넘게 쏴댔다. 그건 무언가 목표를 노리고 저격수들이 발포했다는 뜻이 된다. 결코 오발이 아니란 것이다.
그와 그녀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윤일권에게 보고가 날아들었다.
“주변 상황이 심각합니다. 다소 진정된 것 같긴 하지만….”
차가 부서지고 인근 상점 유리가 깨지고 서로 고소하겠다고 언성을 높이고 있다. 이런 사건들 때문에 브라킨 빌딩에 대한 관심은 조금 멀어진 것 같긴 해도 지척에 경찰이 있으니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람이 벌떼처럼 모이고 있었다.
다른 사내가 말했다.
“아직까지 사망자는 없는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사람들이 많아서 병원으로 이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급차가 들어올 틈이 없다.
“일단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처리하고 병을 다 동원해. 이 건물은 우리가 통제하면 된다.”
“병력을 다 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많아 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저격수 사건에서 알아버렸다.
사내들에게 지시를 마친 윤일권이 피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 끝날까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변화를 보면…. 무언가 바뀌고 있다는 뜻일 거예요.”
서로 멱 잡고 싸우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 안에선 지금 예상조차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어떤 결과를 내느냐에 따라 고작 이 강남 거리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었다.
.
.
.
“하악, 하악. 민준아 조금만 천천히….”
“아, 미안.”
잡은 손을 놓아주자 예원이가 허리를 굽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예원이는 보통 사람이다. 잠깐 그걸 잊고 서둘렀나 보다.
“아까 그 아저씨 찾는 거야?”
“…어.”
대놓고 묻진 않았지만 예원이도 나를 보며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살다가 누군가를 죽이려고 찾는 경험을 얼마나 해보겠는가? 하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이때 예원이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얼씬댔다. 내가 활을 겨누며 돌아서려고 할 때 이미 범이가 몸집을 키우며 앞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퍼억-!
가슴이 짓이겨진 뱀파이어 사내가 어둠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세, 세상에….”
예원이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범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몰라보나? 아까도 품에 안고 있던 귀여운 고양이였는데.
“아, 음….”
녀석 딴엔 예원이를 지키려고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 같은데 덕분에 참으로 어색해진 상황이 되어버렸다.
예원이가 입을 떡 벌린 채 무슨 말도 못 하고 시선을 돌렸다. 우끼끼! 웃는 원숭이를 보는 아까의 시선과는 확실히 달랐다. 옆에서 닭도 푸드득 날아오르며 범이를 칭찬했는데 아리를 보는 예원이의 시선이 복잡했다.
“그냥 크기만 커진 거야. 안 물어….”
내가 범이의 목을 팔로 끌어안으며 말했지만 예원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몸길이만 7미터가 넘었다. 선 높이에선 범이의 아가리가 딱 우리 얼굴에 닿는다. 무섭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얘가 약을 잘못 먹어서….”
내가 말하면서도 헛소리라는 걸 인식할 때 복도 끝에서 뭔가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839-322-6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대한 편집권은 저자와의 계약에 의해 ㈜알에스미디어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 수정, 배포 행위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