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로드가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의식이 진행될 때 제물의 몸에 약간의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위해가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까 당황해서 일을 그르치지 마라.”
내가 예원이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변화?”
“그녀의 순결한 냄새가 지옥불을 자극할 거다. 하지만 죽거나 다치는 게 아니니까 방해하지 마.”
“확실하겠지? 거짓말이면 다음에 죽는 건 너야.”
“좋을 대로.”
표정을 보니 지금까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화지와 김우태가 예원이의 곁으로 가서 섰다. 여차하면 구해내려는 거다. 그걸 보는 로드가 피식 웃었다.
“어지간히 사람을 못 믿는 것들이군.”
김우태가 씨익 이를 드러냈다.
“너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 더 못 믿지.”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로드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그의 주문인 무척 길었는데 이따금씩 예원이가 화들짝 놀랐다.
도화지가 그런 예원이에게 물었다.
“괜찮아?”
“…예,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그래요. 속이 뜨겁고 매스껍다고 해야 하나…. 이 안쪽에서요.”
명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예원이를 보며 도화지가 김우태에게 말했다.
“도와줄 수 있겠어요?”
“이미 하고 있는데 저건 고통이 아니야. 전혀 다른 것이라서 내게 가져오지 못해.”
“아….”
고통이 아니라니 견딜 순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예원이의 표정은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갑자기 납치되어 경황이 없으니 웃진 못하겠지만 우리가 곁에 있어서인지 한결 나았다.
“그런데… 이게 다 뭐에요?”
어느 영화에서 본 것처럼 기억을 지우는 장비가 있다면 속 시원하게 말해주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겠지만….
“모르는 편이 좋아.”
도화지도 그걸 아는지 예원이를 보며 웃어주었다. 아는 만큼 위험하다. 우린 거의 매일 같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어 왔고 강해지는 과정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예원이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저 나쁜 꿈을 꿨다고 생각해. 그래야 편해.”
예원이의 이마를 손으로 쓸어주며 도화지는 그렇게 말하고 로드의 등을 보았다.
그녀의 감정이 읽혔다.
【끝나면 곧장 저놈도 해치우자.】
아직 향수의 지속시간이 남았는지 도화지나 김우태, 예원이의 마음도 읽혔는데 이상하게도 로드나 시녀의 감정이 읽히질 않았다. 아까 김우태가 했던 말이 와닿았다. 저들은 사람이 아니라서 통하질 않는 건가?
【민준이 키가 더 큰 걸까?】
이 급박한 상황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기에 나는 멍하니 예원이를 봤는데 예원이가 얼굴을 붉혔다.
“왜? 뭐 묻었어?”
“아니야. 괜찮은지 해서.”
급히 말을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저 언니도 우리 편이야?”
시녀를 말하는 거다.
“아니.”
“으응.”
내가 목소릴 살짝 낮추자 예원이도 무언가를 감지한 것 같았다. 뭘 하려는 건지 몰라도 다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뒤의 여자는 내가 맡을게.】
김우태의 속도 읽혔다.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드는 계속 염불처럼 중얼거리다가 눈을 번쩍 떴다!
“오라! 위대한 불꽃이여! 찬란한 악마의 심장이여!”
로드가 두 팔을 번쩍 들자 관에 화르르륵! 불이 붙었다.
“우앗!”
김우태가 물러났다. 멀찌감치 떨어졌는데도 열기가 엄청났다. 용암 속에서 물고기까지 잡던 우리였는데도 그것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저 관이 아니면 지옥불을 담지 못한다. 지옥불이 강림하면 모든 것을 녹이고 태워서 대지조차 감당할 수 없어 계속 추락하지. 이 마법진과 관이 그걸 막아주고 있는 거다.”
로드가 예원이를 보았다.
“네가 불길을 더욱 거세게 하는 원천이고. 의식이 끝나면 너는 필요 없으니 돌아가도 좋아. 그때까지만 기다려.”
로드의 말에 예원이의 표정이 풀어졌다. 돌아간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우릴 의식하고 있군.’
속을 알 순 없었지만, 로드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진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노리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거다.
【똑똑한 놈인데?】
【자칫하면 저 애가 다칠 수도 있겠어요! 우선 상황을 봐요!】
불길은 점차 커지며 천정까지 솟구쳤는데 그 열기만으로도 솜사탕처럼 천장이 사라지며 위층이 보였다.
“저게 얼마나 지속하지?”
내 질문에 로드가 답했다.
“관이 모두 타버리면 끝나겠지. 물론 그렇게 되면 그 안에 있던 것도 흔적을 남기지 못할 거다.”
드드드드드드!
관이 심하게 흔들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순간에 우리 셋은 동시에 메시지를 들었다.
『퀸을 사냥했습니다.』
“…아.”
“….”
메시지를 들었는데도 얼떨떨해서 실감이 나질 않았다.
『대단한 업적을 올렸습니다!』
『모든 육체적 능력이 한계치까지 올랐습니다!』
『모든 숙련도가 한계치까지 올랐습니다!』
『10,000,000p를 얻었습니다.』
『퀸 슬레이어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벌레는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무려 천만 포인트! 그 숫자를 들으니까 갑자기 확 와닿는 것 같았다. 김우태와 도화지도 멍하니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
그런 우릴 보더니 로드가 말했다.
“뭐야? 기분 나쁘게? 너희, 꿍꿍이를 부릴 생각하지 마라. 나도 참지 않아.”
경고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불과 얼마 사이로 내가 훨씬 강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보다 로드가 작아 보인 거다. 그건 존재감의 영향일 것이고 퀸을 사냥해서 부쩍 올라간 내 능력 덕분일 것이다.
【오오오! 힘이 넘친다! 넘쳐!】
김우태가 부르르 떨었다. 재능으로 성장하는 감각은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만 공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천만 포인트면 앞으로 훨씬 더 강력한 아이템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끝났어. 진짜 끝인 거야….’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재능마켓이 결과를 알려주었으니 퀸은 이제 없다. 하층에서 본 그 피라미드에서부터 존재해왔던 괴물을 우리 손으로 영원히 잠재운 것이었다.
“…크하하하! 퀸을 제거했다!”
로드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감격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었다. 불길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는데 로드가 광신도처럼 그 앞에 서서 치켜든 두 팔을 흔들었다.
【확 밀어버리면 저놈도 타죽나?】
김우태의 생각이 읽혀서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로드가 남았지만, 저놈은 우리가 아까보다 얼마나 강해졌다는 걸 모른다. 몇 달간 길게 이어졌던 악연이 여기서 끊어진다. 초기엔 벌레만 만나도 무섭고 긴장했지만 이제 그것들의 어머니를 죽였으니 벌레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나온다고 해도 상관없고.’
무한한 자신감이 생겼다. 천만 포인트를 돈으로 바꾸면 그게 대체 얼마인가? 1억 포인트짜리 반지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다 살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 놈이 더 있다는 게 중요했다.
【흐흐, 저놈도 잡으면 또 천만인가?】
【로또 맞으면 이런 기분이겠죠?】
우리가 속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흥분해서 그렇다. 살면서 다시 올 일이 아니었다.
시녀가 로드의 곁에서 물었다.
“이제 끝난 것입니까? 마이로드.”
“그래. 끝났다. 앞으로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축하드립니다.”
스녀의 무미건조한 말에도 로드는 껄껄 웃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법과 계책이 다 먹혀들었다는 것이 기쁜 것 같았다.
화라락.
불길이 꺼져가며 관이 조금씩 먼지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버티던 형체가 더는 열기를 막지 않고 받으며 타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나는 무언가 매우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그러고 내가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관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손으로 로드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커헉?”
로드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렸을 때 그의 가슴에 박혔던 손이 밖으로 나왔다.
푸핫-!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꺄아아아아! 로드!”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 손이 로드의 심장을 꺼내버렸기 때문이다.
비틀!
로드가 뒤로 넘어지며 쓰러졌다. 시녀가 로드를 부축하는 걸 보며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퀸이 죽었다는 메시지는 들었다. 그런데 그것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저놈이 죽었다는 메시지를 듣지 못한 걸 의식하지도 못한 것이다.
“하하하하하하하--!”
쩌렁쩌렁하게 웃는 피의 군주는 얼굴에 붉은 혈관이 툭툭 튀어나와 있었다. 저거, 퀸의 흔적에서 보던 것이다.
“멍청한 놈! 으하하하하하! 내가 고작 지옥불에 죽을 것 같았느냐? 나는 악마의 저주로 태어난 몸이다! 지옥불은 내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 덕분에 퀸의 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어. 큭큭큭! 네놈은 나까지 죽이려고 했겠지만, 머리 좋단 놈들이 자기 꾀에 넘어가곤 하지.”
쿨럭-!
로드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아무리 마법의 일인자라고 해도 심장이 뽑혔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콰직!
피의 군주가 로드의 심장을 손으로 으깨버렸다. 그도 흥분했는지 우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로드에게 감정을 쏟아냈다.
“네놈이 반 리치라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다. 심장을 뽑고 뇌를 터뜨리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도.”
고통과 상처로 힘을 얻는 로드였지만 그도 육체가 있어야 살 수 있었다. 그 육체를 이루는 핵을 두 곳에 봉인했는데 그것 중 하나가 터져버렸다. 둘 중 하나가 없어졌다고 힘이 절반이 된 게 아니다. 둘이 있어야 완성이 되는 것이었으니 하나를 잃은 지금은 전부를 놓친 것과 같았다.
“네놈 대가리를 지금까지 놔둔 건 퀸을 제거할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관이 지옥불을 불러낸다는 것도 알았고 어쩌면 네놈이 나까지 가두려 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지. 아까 내가 왜 무력하게 퀸과 함께 관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나?”
“…일부러….”
“큭큭! 잠깐이었지만 전에 퀸의 피를 마시고 깨달았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피! 그게 그녀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그걸 마음껏 취할 수 있다면 나는 완전해질 것 같았지. 그리고 오늘 그 목표를 이뤘다. 네게 고맙다곤 하지 않겠어. 피차 우린 공존할 수 없으니까.”
“으으으…. 네놈이 나를….”
“아니지. 서로 이용한 거잖아?”
볼일을 마쳤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선 피의 군주가 우릴 보여 씨익 웃을 때 아까 불길로 뚫린 위층에서 뱀파이어들이 내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어쩐지 피의 군주가 관에 담겨 끌려오는데도 저놈들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상했다.
피의 군주는 로드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던 것이다. 로드의 계획을 알고 그보다 다음을 생각했으며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로드까지 복구 불가한 타격을 주었고 이제 남은 것은 우리였다.
“너희들은 참 신기하단 말이지. 인간인데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지? 마법사는 아닌데.”
피의 군주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세상을 다 가진 넉넉함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 비밀을 알려주면 내 곁에 두마. 나와 함께 영생을 사는 거다. 나는 너희에게 불멸을 선물할 수 있다!”
그 말에 김우태가 입을 열었다.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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