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런 아이템이 재능마켓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김우태는 언제 이런 걸 산 걸까?
【역시 우리 오빠! 자연스러웠어!】
‘우리… 오빠?’
이건 분명히 도화지의 마음이었다. 얼마 전부터 수상하다 싶었는데….
【음하하하! 차라리 나 배우 할까 봐?】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로드가 입을 열었다.
“곧 나타날 거다. 긴장해.”
하지만 나타난 건 붉은 안개였다.
“젠장! 튀었어.”
“어디로?”
“모르겠다. 아래쪽으로 간 것 같다. 천천히 내려와. 다시 위로 향할 수도 있으니까.”
붉은 안개가 사라지자 로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쓸모없는 박쥐 놈.】
피의 군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보인다. 와, 이거 진짜 능력 죽이는데? 몇 포인트짜리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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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수는 다 물렸습니다!”
윤일권이 강나은 경위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반항은 없던가요?”
“그게… 꼭 인형들처럼 총을 빼앗겼는데도 멍하니 있었답니다. 일단 다 잡아놨는데 허 참,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원….”
“저 안에선 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거예요. 지금 여기처럼요.”
아직도 거리는 무법천지였다. 저쪽에선 누가 상점 유리를 부쉈는지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지금 위에서 난리입니다. 왜 진압을 안 하냐고요. 일단 건물 붕괴 우려 때문이라고 둘러대신 했습니다만 이러다간 청장님까지 오실지 몰라요.”
“오셔서 이걸 보시면 이해하시겠죠.”
이 난장판에 뭘 어떻게 하겠나? 심지어 저격수들이 빌딩을 향해 총까지 쏴댔다. 기동대가 아니라 군대가 와도 이건 못 막는다. 오히려 그들의 총구가 시민들을 향하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뛰어오지 않는 한 오실 수도 없겠지만요.”
역삼부터 신논현까지 차가 멈춰있었고 경찰차도 진입을 포기하고 차에서 내려 뛰어오고 있다. 높으신 양반들이 땀 뺄 일 없으니 당분간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이봐! 지금 누굴 찍는 거야?
-어어어? 카메라에 손대시면 안 됩니다!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몇몇 기자가 도착했지만, 그들도 수난을 겪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했고 별거 아닌 일에도 주먹을 휘둘렀다. 그나마 이 주변엔 경찰들로 가득해서 강나은 경위는 상대적으로 안전했지만, 이것도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 한순간에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야.’
히트맨이 말한 재앙이 이런 모습일까?
“대장님, 저 손 망치 하나만 주실래요?”
“총이 아니라요?”
“총은 의미가 없어요.”
“망치는 어디에 쓰시려고요?”
“그냥 호신용이요.”
“알겠습니다. 망치는 없지만, 이것도 쓸만할 겁니다.”
그가 삼단봉을 건네주었다.
‘이거로 부수면 되겠지?’
언제든 건물로 진입할 생각을 하는 그녀였다. 노심초사하며 히트맨의 연락을 기다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도로가 마비되어서 기동대 헬기가 오는 중입니다. 주변 건물로 추가 병력을 내릴 건데….”
윤일권이 씁쓸하게 혀를 찼다.
“온다고 해도 진입할 수 없으니 여기 사람들이나 통제해야겠네요.”
“저기 보이세요?”
강나은 경위가 뱅뱅사거리 쪽을 보았다.
“저 지점까진 싸움이 없어요. 이게 범위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밖으로만 사람들을 물리면….”
그녀가 말하는데 경찰들도 서로 멱살을 잡았다.
-그게 왜 내 책임이야!
-아까 저한테 지시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어? 눈 안 깔아? 사람 치겠다?
와장창!
도로 반대편 사무실에서 의자가 창을 부수고 떨어졌다.
“더 심해지기 전에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할 것 같아요.”
브라칸 빌딩 반경으로 정확히 얼마나 되는진 모르겠지만 이면도로에서도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요. 이러다가 누가 죽기라도 하면….”
“조치해보겠습니다.”
그냥 짜증이 아니다. 사람들은 분노를 풀 대상을 찾았고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섰다. 강나은도 억누르곤 있지만 불현듯 폭력적인 생각이 들곤 했다.
‘정신 차려. 강나은. 너는 프로파일러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려고 애쓰며 강나은이 브라칸 빌딩을 올려봤다. 안에서 스프링클러가 작동했는지 아니면 수도 배관이 터진 것인지 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극단적이진 않아.’
싸우거나 욕하는 사람은 있지만 서롤 죽이려고 진심으로 달려드는 이는 없는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경찰이 먼저 총을 난사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다니. 만약 이런 게 무기로 쓰인다면….’
한 나라가 괴멸하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그녀는 몇 달 전 서초서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팀장을 만나 사건을 추적했고 그때는 짐작할 수도 없었던 기이한 일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 피가 모두 뽑힌 사체, 벽에 콱 박힐 만큼 강한 화살, CCTV를 무력화하는 기술부터 아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능력까지.
그래, 그건 초능력이라고 말하는 게 편할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혼란도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꼭 모두가 알아야 할까?
‘내가 말한다고 믿지도 않겠지만.’
절차란 게 있으니 보고서는 써야 하는데 벌써 막막하다. 그러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차, 그 아이돌은?’
납치된 여자애는 무사한 걸까?
.
.
.
“그만해. 간지럽단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원이는 범이를 품에 안고 웃었다. 범이가 예원이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가이가 질투가 났는지 범이의 머릴 때렸다.
갸우!
범이가 가이에게 덤벼들며 둘이 데굴데굴 구르자 아리가 그 틈에 예원이의 허벅지로 올라탔다.
“호호호!”
납치된 심각한 상황이지만 예원이는 이 녀석들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민준인 괜찮을까?’
범이는 민준이가 키우는 고양이다. 어떻게 알고 민준이가 여길 온 건진 모르겠지만 이 원숭이와 닭은 뭘까?
‘그래도… 민준이가 와줘서 너무 고마웠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서운 아저씨들을 민준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히어로처럼 나타난 민준이를 보니까 눈물이 났다.
바르르.
아리가 그녀의 품에서 몸을 털었다. 참 예쁘게 생긴 닭이라고 생각하면서 미소 짓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다. 그 무서운 언니가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했었는데….
‘나가볼까?’
아리를 안고 슬쩍 일어났다. 촛불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문을 열었는데 복도가 시커멓다.
“…헉.”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방엔 초가 많아서 밝지만, 복도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예원이는 주춤거리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창문이 있었고 밖을 볼 수 있다.
“…흐읍.”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니.
“…왜들 저러시는 거지?”
전쟁이라도 난 걸까? 사람들이 싸우고 있고 경찰들이 말리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이는 곳 끝까지 다 성난 사람들이 차도 부수고 서로를 때렸다. 여자도 남자고 할 거 없이 그러는데 저길 나가면 끔찍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았다.
“…무서워….”
부자들이 모인 곳이고 그만큼 안전한 강남인데 밖은 지옥처럼 보였다.
“힝….”
3층쯤 되는 것 같은데 뛰어내릴 순 없을 것 같았다. 밖에 경찰이 빤히 있는데도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사람들을 지켜야 할 경찰이 욕설을 하며 난폭하게 뭘 휘두르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단체로 미친 걸까.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예원이가 쪼그려 앉으며 아리를 품에 더 꼭 안았다. 범이와 가이도 우르르 뛰어왔다.
-너희가 지켜줘.
아까 민준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귀여운 얘들이 뭘 지킨다는 건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그 민준이의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오늘 데이트는 망쳤지만 민준이가 근처에 있다는 건 나쁘지 않다.
이때 문이 벌컥 열렸다.
흠칫!
“….”
그 무서운 언니다. 그녀는 예원이가 있는 걸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문을 닫았다.
콰앙!
“뭐야….”
저 언닌 왜 표정 하나 없을까? 뭘 물어봐도 답이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 뭔지…. 바닥엔 이상한 그림이 잔뜩인데 촛불은 세다가 포기했다. 언젠가 본 영화가 떠올랐다. 인질범들이 유명한 가수를 납치해서 경찰들과 대치하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경찰은 밖에서 사람들과 싸운다. 무서운 언니도 딱히 뭘 요구하는 게 없다.
그런데.
콰앙-!
문이 박살 났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철문이 저렇게 뜯겨나갈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벽까지 일부 무너졌다.
그리곤 한 여자애가 보였다. 신발도 신지 않은 여자애가 이쪽을 가만히 보다가 안으로 들어오려던 찰나,
파악-!
어떤 힘에 떠밀린 것 같이 뒤로 날아갔다.
쿠웅!
“…흐읍.”
보지 않아도 벽에 처박힌 것 같은데 아프겠단 생각을 하면서 예원이가 침을 꿀꺽 삼킬 때 여자애가 다시 나타나서 예원이를 보다가,
“치잇.”
휙! 사라졌다.
크르르르르르르!
범이가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옆에서 으르렁댔다. 그 모습도 귀여웠던 예원이는 범이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괜찮아. 괜찮아…. 고마워.”
가이도 앙증맞은 두 주먹으로 일어서서 자기 가슴을 두드렸고 아리도 날개를 활짝 폈다. 예원이는 모두를 끌어안으며 진정시켰다. 그 여자애는 누굴까?
“….”
아깐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막상 문이 사라지니까 다시 용기가 났다.
‘나가볼까?’
막 일어서려는데 누군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 아아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거짓말처럼 민준이 그녀를 부축했다.
“안 다쳤어?”
“으응….”
민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숨결은 얼굴에 닿았고 묘한 향기가 민준의 몸에서 풍겨왔다.
【어떻게! 꺄아! 부끄러워!】
흠칫, 민준이 팔을 풀고 그녀의 어깨는 두 손으로 잡았다.
“미, 미안.”
【아니야! 더 해도 돼! 흡! 어머나! 내가 무슨 생각을!】
“크흠! 밖이 위험하니까 일단은 여기가 안전할 거야. 이 촛불들이 너를 지켜줄 거거든. 이상하게 들린다는 거 아는데 거의 끝나가니까 얘들이랑 조금만 더 있어 줘.”
“으, 으응….”
민준이 예원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흙먼지를 손등으로 닦아주었다.
“용감하네.”
그 말에 예원이의 볼이 더욱 붉어졌다.
【가지 마. 나, 무섭단 말이야.】
일렁거리는 촛불, 밖에선 사람들이 싸우고 곁엔 인형 같은 동물들밖에 없다.
“….”
민준이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아까처럼 부축하려는 게 아니라 심장과 심장이 닿는 것 같았다.
“꼭 돌아올게.”
기다렸다는 듯 문에 사람이 나타났다.
“야! 빨리! 놓친다! 퀸이 약해졌어!”
민준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꿈인가? 싶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고 민준의 손엔 커다란 활이 들려 있었다.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아직도 민준이의 온기가 품에 남아 있는데….
‘퀸?’
그건 또 뭘까?
이때 머릿속으로 민준이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돌아올게.
환청인가? 너무 간절해서 아까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오르나?
하지만 그녀는 대답해버렸다.
“꼭이야!”
-응.
대답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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