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언젠가 내게 쪽지를 건네줬었던 여자애.
“왜… 나가지 않고?”
“아!”
그녀가 나를 보며 반색했다. 그러고 보니 왼쪽 다리가 이상해 보였다.
“급히 나오다가 삐끗해서….”
나는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지금 나가야 해. 여긴 위험해.”
“불이 난 것 같진 않은데?”
“그보다 더 위험하다고.”
이미 계단 쪽은 도화지가 다 부숴놔서 나갈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2층으로 내려와서 창가에 섰다.
“눈 감아.”
“으응? 눈을? 꺄아!”
내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자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꽉 감았다. 휙! 밖으로 뛰어내렸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기에 그녀를 무사히 내려놓을 수 있었는데 다시 건물을 향해 돌아서려 할 때 이상한 게 보였다.
‘뭐지? 저 불빛은?’
전기가 나가서 건물 전체가 어두웠는데 한 곳의 창에서 희미한 빛이 느껴졌다. 가린다고 가려고 어쩔 수 없이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그런 것 말이다.
‘3층 상가 쪽?’
나는 단숨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야! 위험하다면서! 가지 마!”
뒤에서 여자애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대꾸할 틈도 없었다.
빠르게 2층으로 돌아와서 계단을 향해 뛰었다. 그리곤 막 3층으로 들어섰을 때 한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너는….”
“여어, 오랜만인데? 냄새는 기막히게 맡았네?”
피의 주인이었다. 그는 굉장히 더러운 옷을 입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는데 눈빛은 잔잔했다.
“하긴 오늘 같은 날엔 손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그런데 너, 로드의 패거리가 아니었다면서? 대체 정체가 뭐야?”
내가 활을 겨냥하자 그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웃었다.
“워, 진정하라고. 아직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지?”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거든.”
“…주인공?”
내가 이마를 찡그리자 그의 뒤쪽으로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로드였다.
“흠? 귀찮은 녀석이 나타났네. 아까 그 소란도 저 녀석 작품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퀸은 어떻게 됐어?”
“근처에 있을 거다. 나도 막 도착했으니까.”
며칠간 추격전을 벌이느라 진이 쏙 빠졌지만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니 그의 표정이 좋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저들의 목적이 내가 아닌 것이다.
‘퀸을 잡으려고 하는 건가?’
일단 놈들이 둘이었고 나는 혼자였기에 섣불리 움직이기보단 상황을 지켜보는 게 나았다.
로드가 말했다.
“준비는 다 됐어. 이제 퀸이 오면 마법진이 자연스럽게 가동될 거다.”
“못 나가는 건 확실하고?”
“마력이 전혀 없는 일반인들은 드나들 수 있지만 너나 나처럼 특별한 사람들은 나갈 수 없어. 이 건물에 구속되는 거지.”
“언제까지?”
“의식이 끝날 때까지.”
“좋군. 그 안에 그녀를 죽이면 되겠어.”
“조심하는 게 좋아. 마법진이 발동하면 상당히 약해지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괴물이야.”
“알아. 세상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 수도 있다고.”
그가 혀를 날름거리며 피 맛을 느끼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로드가 콧등을 찡그리더니 나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우리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보내주마.”
괜히 예원이의 일을 언급할 필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놈들의 경계심만 높아지고 내 목적을 들킨다.
“뭘 하려는 거지?”
내 질문에 로드가 웃었다.
“사냥. 별 거 아니야. 이 사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지우려는 거지. 너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 둘은 평화주의자거든. 딱히 욕심도 크지 않고. 인간과 공존하는 걸 바라지. 그런데 아닌 걸림돌이 하나 있어. 오직 파괴와 혼돈만 바라는 괴물이.”
피의 주인도 흡족한 듯 맞장구쳤다.
“맞아, 내가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어? 평화주의자, 그 말이 딱 어울리네! 우린 이 세상을 위해 싸우려는 거야!”
북 치고 장구 치며 웃는 놈들을 보며 기가 막혔지만, 퀸을 제거하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놈들을 이용할 수도 있겠는데?’
적으로 적을 잡는 방법이 가장 좋은 상책이었다. 나중엔 저 두 놈도 제거해야겠지만 지금은 모른 척하는 게 좋겠다.
“퀸은 강해. 너희만으로 상대할 수 있을까? 내가 볼 때는 어려울 것 같은데?”
내 말에 로드가 웃음기를 지웠다.
“우리도 그 정돈 알아. 그래서 준비를 해뒀다. 너도 말려들기 싫으면 마법진이 가동하기 전에 여기서 나가. 한번 시작되면 나도 멈출 수 없으니까.”
“마법이라도 쓰려는 거야?”
“비슷하겠지.”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계단을 보았다.
“아까 누군가 나한테 칼을 던졌는데 너희 부하들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좋아, 나는 위에서 기다리지. 그녀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거든. 혹시 너희가 실수라도 한다면 마무리는 내가 할 거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론 놈들이 3층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김우태와 도화지를 만나 다시 와야 돼.’
놈들이 퀸과 싸우고 있을 때 예원이를 구해내는 방법도 있을 거다.
그런데 이때였다.
와장창!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저쪽 복도 끝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왔다!”
“가동해!”
두 사람이 급히 뛰었다. 나도 퀸과 얽히는 건 사양이었기에 4층 계단을 향해 뛰었다.
‘퀸이다.’
그녀의 옷도 흙먼지가 잔뜩이었다. 하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피의 주인을 따라 며칠을 달렸으니 저 꼴일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나 같은 건 안중에도 두지 않고 피의 주인만 노려보며 뛰었다.
무전기를 들었다.
“형! 누나! 어디에요?”
-우리? 13층!
“내려오세요! 3층이 놈들의 본거지 같아요!”
-만났어?
“네!”
나는 빠르게 설명하면서 아까 밖에서 보았던 불빛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리고 이때였다.
『외부의 힘이 작동했습니다. 힘이 거둬질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재능마켓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아까 놈들이 말했던 그게 바로 이것인가 보다.
“예원아! 괜찮아?”
-아앗! 뭐 하는 거예요? 이건 뭐죠?
예원이가 누군가와 이야길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무사한 것 같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곧 갈게. 조금만 기다려줘!”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걸 보면 가까이에 놈들이 있는 것 같았다.
7층쯤 올라갔을 때 김우태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민준아!”
“형!”
나는 놈들이 퀸을 사냥하기 위해 이 판을 벌였다는 걸 설명한 뒤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도화지가 말했다.
“놈들의 말을 다 믿을 순 없어. 그놈들이 퀸을 잡고 난 후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니까.”
김우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놈들이 퀸을 사냥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좋은 일이긴 해. 잠깐 기다리는 게 좋지 않나? 네 여자친구는 무사하다고 했지?”
“네, 아직은요.”
“좋아. 3층엔 상가만 있으니까 어디 있는지 찾긴 어렵지 않을 거야. 일단 내려가서 놈들이 뭘 하는지 보자.”
이때 우르르르르릉!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워…벌써 시작했나 본대?”
우린 긴장하며 아래로 내려갔는데 도화지의 가방 속에서 가이가 머릴 빼꼼히 내밀었다.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줘. 지금은 숨어야 해.”
도화지가 가이의 머리를 손으로 만져주며 말했다.
“그 셋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처음 아닌가?”
김우태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놈들은 여기에 재능마켓이 있는 것까진 모르는 것 같아요. 애초에 우리를 잡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요. 그건 어떻게든 숨겨야 해요.”
“당연하지. 우리 밥줄인데!”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며 나는 조금씩 더 움직였다.
콰앙! 쾅! 쾅!
소음이 더 커졌다. 뭘 하는진 모르겠지만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파괴력은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욱-!
뭔가가 계단 쪽으로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활을 겨눴지만, 안으로 처박힌 그건 곧 축 늘어졌다. 얼굴이 완전히 뭉개진 사내였다.
“…웁스….”
김우태가 사내를 보며 치를 떨었다. 누구의 부하인진 모르겠지만 즉사했다.
애애애애애애애앵!
밖에선 사이렌이 계속해서 들려왔고 로드의 말에 의하면 일반인은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 그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근데 민준아. 그 애, 어디 있는지 파악이라도 해야 하지 않냐? 놈들이 싸우고 있는 지금이 기회인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아까 밖에서 본 위치를 떠올렸다.
‘아마도 저쯤일 거야.’
폐업한 식당인 것 같았는데 아직도 복도에 간판이 나와 있었다.
“제가 예원이를 데리고 나오면 형과 누나가 앞과 뒤를 맡아주셔야 해요.”
“어디로 가게?”
“예원이부터 내보내야죠. 2층 정도면 뛰어내릴 수 있을 거예요.”
“오케이! 가자!”
소음이 복도 저쪽 끝에서 들리고 있었기에 우린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곤 곧장 문을 열었다.
띠리릭.
잠긴 문이 만능 키에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촛불들이 보였다. 수백 개는 될 것 같았다.
“프로포즈라도 하려던 거였냐?”
김우태가 농담을 하며 내 뒤를 따랐는데 더 안으로 들어가자 몇 사람이 보였고 공간의 중심에 앉아있는 예원이도 보였다.
예원이 옆에서 여자가 칼을 빼 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
여자가 위협적으로 외쳤다.
“민준아….”
예원이가 나를 보며 입만 뻥긋거렸다. 혈색을 보면 딱히 문제가 있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여자가 재차 말했다.
“마법진이 해체되면 퀸을 잡지 못해. 움직이지 마.”
김우태가 내 옆으로 서면서 팔짱을 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지?”
나는 일부러 예원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내가 예원이와 아는 사이란 걸 알면 저 여자의 칼이 예원이의 목을 노릴지도 몰랐다.
‘예원이가 마법진의 일부라는 건가?’
나는 여자를 보며 물었다.
“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걸 위해 한 준비다.”
“어떻게 작동하는데?”
“나는 그것까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오직 주인님께서….”
로드의 부하인가?
콰앙!
벽 저쪽이 진동했다. 근처에서 셋이 어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지금까진 두 힘이 비슷하다는 뜻. 여기서 마법진이 깨지면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었다.
“좋아. 그러면 우리도 여기서 지키겠다. 너희들론 퀸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더 가까이 오지 마.”
“알았다고. 여기 있을게.”
활을 내리며 여자에게 말하고 김우태를 보았다.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잠시 지켜보다가 틈이 생기면 구출할게요.’
나는 벽으로 붙어서 빙 돌아 창가로 걸어갔다. 여자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퀸을 의식한 것인지 더 말은 없었다.
커튼으로 가린 창에 붙어서 살짝 젖혀 밖을 내다보았는데 대로 쪽이 완전히 마비되어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강나은이다.’
그 형사의 모습도 보였다.
‘계단이 막혔다고 해도 사다리 같은 걸 이용하면 2층이나 3층으로 들어올 수도 있겠지.’
어쩌면 헬기를 이용해서 옥상에 내려설지도 모른다.
‘퀸이 약해졌다면 저들이 잡을 수 있을까?’
총은 든 전문 인력도 보였다.
‘지금부터는 머리를 잘 써야 해.’
그래야 모두가 산다.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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