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콩닥콩닥.
‘들키면 어떡하지?’
민준이가 무슨 수로 연락해오는진 모르겠지만 한편으론 민준이마저 이 무서운 사람들에게 들키게 하고 싶진 않았다.
화장실에 앉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여자가 말했다.
“허튼수작 부리지 않는 게 좋아.”
“안 해요. 근데 저한테 왜 이러세요?”
“알 거 없어. 모르는 편이 더 좋을 거다.”
여자는 매우 사무적이었는데 목소리에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흑흑.”
괜히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볼일 다 봤으면 나와.”
여자의 말에 예원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말했다.
“무서운데 불 켜면 안 돼요?”
“잔말 말고 앉아.”
여자의 강압적인 어투에 예원이는 촛불 중앙에 다시 앉았다.
“저는 인기도 별로 없는데…. 그냥 보내주시면 안 돼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아니.”
여자가 처음으로 예원이를 보며 웃었다.
“네가 맞아.”
.
.
.
“이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어두워서 불을 켜달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밖으로 나가서 불 꺼진 곳들을 봐야겠어요.”
“우리는 어떻게 할까?”
“의식을 준비하고 있다면 혼자선 못할 거에요.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봐주세요. 그리고 상황 봐서 제가 EMP를 쓸게요. 핸드폰이 안 되면 놈들도 당황할 거니까.”
“우리 무전기는 되겠지?”
“아마도요. 이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알았어. 수시로 연락하자. 우리도 놈들 찾으면 바로 말할게!”
여기가 오크 도시라면 그냥 들이닥쳐서 다 확인해보면 되겠지만 강남 한복판 오피스텔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괜한 소란을 일으켜서 경찰이라도 오면 더 복잡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엔 재능마켓이 있다. 어떻게든 지켜야 할 장소와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었어. 불 꺼진 곳.’
밖으로 나와 오피스텔 창문을 바라보았다. 간판 전체로 가린 곳도 있었고 사무실로 사용하는 듯 셔츠 차림의 남자가 보이는 곳도 있었다.
‘위인지 아래인지만 알아도 편할 텐데.’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일상에 찌든 모습이었다. 이 건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도 못 한 채 퇴근을 재촉하고 있었다.
‘예원이가 어디 있는지 확보하려면….’
결단이 필요했다.
‘재능마켓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거야. 문제는 예원이고 의식을 막으려면 우선 사람들부터 없어야 해.’
나는 무전기를 들고 김우태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이대론 못 찾겠어요. 혼란을 주죠. 경찰이 온다고 해도 당장 뭘 할 순 없을 거예요.”
-알았어. 준비할게.
“놈들이 예원이를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갈지도 모르니까 주차장을 감시해주세요.”
-인질을 데리고 대로변으로 나오진 않겠지. 알겠어!
나는 다시 건물로 들어가서 비상구로 향했다. 그간 계딴을 오르내리며 봐둔 것이 하나 있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퍼억!
화재경보기를 보자마자 겉의 플라스틱 마개를 깼다. 그리곤 버튼을 힘껏 눌렀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화재 발생, 화재 발생!
위이이이이이이이이잉!
-신속히 대피해주세요. 화재 발생. 화재 발생.
그리곤 곧장 EMP발생기를 썼다.
화악-!
건물 전체로 퍼져나가는 기운은 모든 전자장치를 마비시켰다. 경보가 울려봐야 무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TV나 핸드폰마저 안된다면 이상을 느끼고 확인하려고 할 거다.
‘경비실에서도 난리가 날 거고.’
CCTV도 안될 테고 어디에서 불이 났는지 육안으로만 확인해야 하니 일단 사람들을 내보내려고 하겠지. 이 틈을 타서 나는 예원이를 찾는다.
-불이야아아아아아!
-불이다! 불이 났대! 어서 나가자!
오시프텔 문이 벌컥벌컥 열리며 사람들이 계단으로 뛰었다. 엘리베이터마저 작동이 안 되어서 사람들은 진짜 불이 난 줄 알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나는 복도로 나와 어두운 주변을 훑어보았다.
‘열리지 않는 문들이 있어. 빈집일까?’
아직 퇴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질이 예원이 하나일까? 황제의 의식을 보면 무려 1천의 생명이 동원되었고 일백의 흑마법사가 있었다. 그 정도의 의식은 아니라고 해도 오크가 이쪽으로 넘어오려고 동원한 탑도 무너지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의식이란 게 그냥 쉽게 뚝딱!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물관 물건들이 사라졌다고 했었지.’
그런 것들이 여기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무전기를 들고 강나은에게 연락을 취했다.
“형사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강남역 브라칸 빌딩에서 놈들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와서 대응하고 있긴 한데 아직 인질을 찾지 못했어요. 화재 경보가 울려서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으니까 당분간 통제 부탁드립니다.”
-설마 아이돌 납치 사건이 그 인질인가요?
“소식 들으셨나요?”
-네!
“브라칸 빌딩입니다. 주의하세요. 절대 진입하시면 안 됩니다. 밖에서 사람들만 통제하세요. 위험합니다.”
무전을 마치고 잠깐 복도에 서서 대기했다. 이제 더 열리는 문들이 없다.
“…보자….”
나는 ‘만능 키’를 꺼냈다. 세상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아이템!
가장 가까운 문부터 열어보았다. 혹시 이 난리에도 누가 자고 있을지 모르기에 조심스럽게 살펴야 했다.
끼이이이익.
열린 문 안쪽으로 원룸 형태의 내부가 보였다. 인적은 없었다. 가구도 별로 없는 단출한 주인이 사는 집이었다.
‘여긴 아니고.’
이 건물엔 4층부터 위쪽으론 한 층에 약 15개에서 20개의 객실이 있었다. 1층부터 3층은 상가다. 상가엔 아직 사람이 있을지 모르기에 위부터 뒤지기로 했다.
-민준아! 사람들 대부분 밖으로 나가서 주차장으론 오질 않았어! 불이 꺼져서 더 그런 것 같아!
전기가 나갔으니 본능적으로 밝은 곳으로 대피했을 것이다.
-수상한 놈들은 보이지 않았어!
“놈들이 의식을 준비한다면 끝날 때까지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예요. 제가 방마다 확인하고 있으니까 찾으면 처리할게요. 그리고 곧 강나은 형사가 올 거예요.”
-오케이!
이 거대한 건물에서 술래잡기를 해야 했다. 실제로 불은 나지 않았지만, 급히 대피한 사람들 덕분에 복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뭘 하려는 거지?’
의식이라곤 하는데 이렇게 눈에 띄는 장소에서 사건을 벌여 얻을 이익이 무엇이 있을까?
끼이이이익.
두 번째 방문이 열렸다.
“…실례했습니다.”
여자 혼자 사는 곳이었는지 속옷이 보여서 급히 닫았다. 직전까지 사람이 있었는지 온기도 느껴졌다.
4층 전체의 문을 모두 열어보았지만 특별한 것을 찾지 못했다. 사람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계단으로 가서 5층으로 올랐는데 도화지에게 무전이 왔다.
-소방차가 왔어!
“들어오지 못 하게 해야 하는데요.”
-어떻게든 해볼게!
뭘 하려는 진 모르겠지만 전문 인력이 투입되어 건물을 수색하다가는 놈들과 부딪힐 수도 있었다. 우린 대응할 수 있지만, 일반인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막 5층으로 올라와 첫 번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밖을 내다보니 쿠웅! 묵직한 소음이 들려왔다.
-꺄아아아아아아!
-뭐야?
-입구가 무너졌어!
-진짜 불이 난 건가?
-연기가 전혀 안 나는데?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도 들렸다. 오피스텔로 통하는 입구는 정문과 후문, 각 상가들에서 안쪽 복도로 이어지는 곳들이 있었다.
-민준아! 화지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위쪽을 다 부숴버린대!
헐….
-그 정도면 되겠지?
“아, 네, 뭐….”
사람만 다치지 않는다면야.
-헉!
-저기도 무너진다!
-건물이 붕괴하나 봐!
발을 동동 구르는 입주민들은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는데 소방관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불 끄러 왔는데 불길이나 연기는 보이지 않고 안에서 무너지는 소리만 난다. 괜히 진입했다가는 깔릴 수도 있는 것이다.
‘신나게 부수고 다니나 본데.’
오크 제국도 박살 내는 여자가 이 정도 건물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아래는 두 사람에게 맡기고 다시 수색을 이어갔다. 재능마켓을 제외한 5층의 모든 문이 열렸지만 뭐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슈슉!
막 밖으로 나오던 내게 무언가가 날아왔다.
칼?
집에서 흔히 쓰는 요리용 칼이었는데 그게 주방이 아닌 이런 복도에서 날아올 때는 섬뜩할 수밖에 없다.
스윽.
상체를 뒤로 빼며 칼을 피했다. 칼이란 게 숙련된 솜씨가 없으면 날아가며 빙글빙글 돌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건 내 얼굴을 향해 칼끝이 똑바로 날아왔다.
“….”
저긴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 건물의 중심부 공간에서 칼이 던져졌다.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활을 꺼내며 천천히 걸었다. 또 칼을 던지러 나온다면 내 화살이 더 빠를 것이다.
‘누구냐.’
놈들도 건물이 비상사태에 들어갔다는 걸 알 것이다. 소방차가 잔뜩 왔으니 곧 경찰차도 올 걸 창문만 내다봐도 알겠지.
나는 그쪽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자세는 낮췄다. 그리곤 거의 근접했을 때 앞으로 구르며 활을 들었다.
“…흐음.”
없다. 급히 뛰어가서 창문을 봤지만, 사람이 드나들 만큼의 크기로 열리지 않았다. 파괴된 곳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여기로 간 건가?’
문틈으로 활 끝을 밀어 넣고 손으로 양쪽을 젖혔다.
그그그그극!
내 힘으로 이 정돈 어렵지 않다.
위, 아래로 뻥 뚫린 시커먼 공간이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어딘가에 멈춰 있으니 이 통로는 놈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었다.
“흠…. 재빠른 놈인데?”
칼만 던지고 갔다는 건 내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려고 했을 것이다.
위로 갔을까? 아래로 갔을까?
보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준아! 경찰이 왔어!
“네, 방금 놈들 중 하나를 만난 것 같아요.”
-괜찮지? 다치지 않았지?
“그럼요. 놈이 도망쳤는데 어디로 갔는질 모르겠어요. 더 찾아볼게요.”
의식이 언제 시작되는진 모르겠지만 구경꾼이 많아질수록 놈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경찰이 우리 편이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형사님.”
-네! 저 막 도착했어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 하게 하셔야 해요.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둘러대시면 될 거예요.”
-불은 안 난 거죠?
“네, 그런데 진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오크들이 그렇게 몰살당한 걸 봤었다. 여기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무전을 마치고 다시 객실을 열어보았다. 의식이란 건 도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들이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러면 거기에 예원이도 있을 거다.
“재능마켓….”
익숙한 문 앞에 섰다.
‘혹시….’
열릴까? 마스터 키를 써보았다.
『재능마켓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역시 열리지 않는다. 안에 있던 두 사람도 튕겨 나올 정도였으니 이 사태가 끝날 때까지는 나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돌아섰다. 처음엔 저 재능마켓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태어나서 처음 마련한 내 집처럼 느껴진다.
‘지킨다.’
그렇게 생각하고 막 계단을 통해 6층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어…?”
누군가 계단 옆에 있었다.
“너는?”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839-322-6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대한 편집권은 저자와의 계약에 의해 ㈜알에스미디어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 수정, 배포 행위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