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조금 늦을 거라고 했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예원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긴 걸까?’
연예인이니까 내가 모르는 많은 일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회사에서 나와 만나는 걸 알고 반대했을 수도 있었다. 오만가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전화만 7번째. 여전히 예원이는 받지 않았다. 이미 재능마켓에 들어간 김우태나 도화지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여기에서 더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오늘은 돌아가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거 봐!
-뭔데?
-이 근처에서 난리가 났다는데? 사방에서 불이 나서 도로가 다 엄청나게 막히고 있대!
-그래?
사람들이 뉴스 기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강남 일대에서 난 불은 주로 주차장에서 시작됐는데 퇴근 시간에 출동한 소방차들 때문에 평소보다 심한 정체가 되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워낙 다사다난한 강남이니까 어깨 한번 으쓱하고 넘어가도 될 일이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때,
-들려요?
강나은이 연락을 취해왔다. 나는 급히 무전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죠?”
-막 신고가 접수됐는데 아무래도 이거, 정상이 아니에요.
“네?”
-택시를 타고 가던 여성이 실종됐는데 그녀를 데려간 신원미상의 용의자들이 거쳐 간 모든 곳에 불이 났어요! 지금 CCTV 확인하고 있는데 이놈들, 아주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에요. 범행 차량을 다 태워버렸고 다른 차로 갈아타고 이동하는데 택시에 탔던 여성의 매니저가 택시기사의 신고로 서초서에 전화했었고요. 그래서 그 여성의 신원을 확인했어요!
“누구입니까?”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아이돌인데….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원이라고?’
순간적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무전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택시 기사의 말로는 범죄에 동원된 차량이 2대였다고 해요. 동선을 파악하고 있는데 범죄에 사용된 차들은 전부 불이 난 것으로 보이고요. 대체 왜 그 아이돌을 데려갔는지 아직은 모르지만, 금전 관계나 스토커에 초점을 맞춰…. 근데요, 제가 연락드린 이유가 택시 블랙박스 후방영상을 확인했더니 조우진 형사 옆에 있던 그 여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나는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납치?’
로드의 여자가 관계됐다고? 어떻게? 나와 예원이의 관계를 알고 데려간 걸까?
‘어디로?’
커피숍을 박차고 나가며 고민했다. 예원이가 전화기를 빼앗겼을 수 있다. 놈들이 데려갔다면 지금도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경찰이 추적한다지만 놈들은 상식 밖에서 움직이는 놈들이었다.
‘죽이지 않고 데려갔다면 다른 목적이 있을 거야. 아마도 인질로 쓰려는 거겠지. 그렇다면 아직은.’
살아 있을 거다.
“젠장!”
방법이 없었다.
‘설명은 나중에, 지금은 예원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해.’
교차로에 서서 무전기를 들고 예원이를 떠올리며 집중했다.
“내 목소리 들리니?”
보통 사람이 이 메시지를 들으면 기절초풍할 것이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줘. 누군가와 같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말해. 들키지 않게.”
의식이 없는 상태일 수도 있었다. 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대체 나와 예원이의 사이를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렇다면 어머니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어머니 가게로 가야 하나? 얼마 전에 집 앞에 나타났던 악마가 떠올랐다. 위협이 내 주변에 미치고 있는 거다.
“나 민준이야. 뭐라도 보이는 게 있다면 표지판 같은 거라도 말해줘.”
간절함이 닿길 바랐다. 내 정체가 발각되어 나중에 어색해지고 다신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만 예원이가 죽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낫다.
“예원아….”
응답이 없자 점차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이때였다.
-나를 왜 여기로 데려온 거죠? 강남역이잖아요?
‘예원이다!’
-왜 한마디도 안 해요? 무섭단 말이에요.
그런데… 강남역이라고?
-어? 여기는 5번 출구인데….
미친? 강남역 5번 출구?
-아앗! 우우우웁!
입이라도 틀어막힌 듯 답답한 신음과 함께 예원이의 목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이게 우연? 아니잖아!’
놈들이 예원이를 납치해서 강남역 5번 출구 쪽으로 데려간 이유?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하필이면 거기를? 그건 확률상 불가능하다.
‘놈들이 재능마켓까지 알고 있는 거야!’
목적과 의도는 모르겠지만 놈들은 지금 브라칸 빌딩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예원이를 데리고!
“이런 개자식들이!”
퇴근 시간에 다른 수단을 이용하는 것보단 그냥 냅다 뛰는 게 더 빠르다. 그나마 거리가 멀진 않다. 신논현에서 강남역까진 아직 전철이 개통하지 않았지만 한 정거장 예정이다. 유동 인구가 많지만, 직선거리로 뛰면 내 속도로 10분!
“예원아. 예원아!”
달려가면서 계속 외쳐도 더는 예원이의 답신이 오지 않았다.
‘거의 다 왔어.’
저 앞에 브라칸 빌딩이 보였다.
“후우….”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멈춰서 몸을 숨긴 채 심호흡했다. 놈들이 저 오피스텔로 예원이를 데려갔다면 내가 올 것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나 하고 다른 빌딩도 보았지만 내 촉이 말하고 있다. 놈들이 브라칸 빌딩으로 향했을 거라고.
‘아직 특별한 점은 없어.’
퇴근 시간 강남역이다. 인파는 어마어마하게 거리로 쏟아지고 있었고 불 켜진 오피스텔 창문들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
지하철역으로 가다가 누군가와 부딪혔을 때 느꼈던 어떤 위화감. 그때는 내 감각이 예민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놈들이 내 주변을 염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침착하자….’
애써 차분해지려고 할 때 미션이 나타났다.
『의식을 막아라!
재능마켓에 위기가 찾아왔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적대자들이 재능마켓의 마력을 이용하여 이 땅에서 해선 안 될 의식을 거행하려 하고 있다. 의식이 완료되면 시간을 관장하는 재능마켓의 모든 기능이 정지한다. 수호자는 반드시 의식을 막아야 한다.』
‘의식…. 황제가 하려던 그런 거 말인가?’
『빌딩 곳곳에 적대자가 설치한 제물이 있다. 그것을 찾아 파괴하고 적대자를 제거하라. 의식이 점차 진행될수록 재능마켓의 이용이 제한된다.』
나는 오피스텔로 천천히 걸어갔다. 미션이 나온 마당에 더 기다릴 이윤 없었다.
『위기 상황임으로 재능마켓 위장술과 보호기능이 작동한다.』
대로변에 위치했기에 오피스텔에 드나드는 사람은 매우 많았다. 1~3층엔 수많은 상점이 있었고 1층엔 편의점까지 있어서 퇴근 무렵 생필품을 사러 들른 인파가 줄까지 서서 계산을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여기서 싸워야 한다고?’
경찰이 도움이 될까?
‘민간인 피해는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자칫 이쪽 사정을 모르는 경찰까지 나서면 강나은 혼자 막긴 역부족일 것이었다.
‘우선 진입하자.’
침이 절로 넘어갈 정도로 바짝 긴장했다.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안방과도 같은 곳인데 오늘은 매우 낯설었다.
‘일단 5층으로….’
이때였다.
-민준아! 어디야?
“누나?”
무전이 왔다.
“저, 5층으로 올라가고 있어요!”
-알았어! 기다릴게! 빨리 와! 뭔가 이상해!
계단에서 나오자마자 재능마켓으로 뛰었는데 김우태와 도화지가 나를 보더니 외쳤다.
“갑자기 튕겨 나왔어!”
“위기 어쩌고 하는데 뭐지?”
나는 그들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뭐? 네 친구가?”
“납치당했다고?”
두 사람도 깜짝 놀랐다.
“이 건물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여기까지 오면서는 예원이를 통해서 저를 유인하려고 하나 했었는데 의식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다른 목적도 있는 것 같아요.”
“어이가 없네. 하필이면 왜 여긴데?”
“아마 재능마켓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놈들이 어떤 의식을 치르려면 결국 마법을 사용해야 하잖아요. 저쪽 세상에선 마법력을 쉽게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여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아…! 재능마켓이 있는 이곳이 놈들의 의식에 유용하다?”
“우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예원이 또한 의식에 필요했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어요. 그 하프엘프처럼요.”
“그럼 여기 어딘가에….”
“놈들이 있을 거예요.”
문 닫힌 수많은 오피스텔이 우리 앞에 쭉 뻗어 있었다.
.
.
.
입이 막힌 채 강제로 들려 이곳까지 끌려온 예원이는 울상을 지었다.
‘이게 다 뭐야….’
거대한 홀. 벽을 다 뜯어내 버렸고 50평쯤 되는 공간엔 무수하게 많은 촛불이 켜 있었다. 그 중심에 앉은 예원이는 사내들 사이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침을 꼴깍 넘겼는데 사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벌컥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추적은?”
그녀의 질문에 사내 하나가 대답했다.
“없었을 거다.”
“건물 CCTV는?”
“작동하지 않도록 조치해뒀다.”
“좋아. 이제 주인님을 기다리면 의식을 시작할 수 있어.”
“너의 주인이지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사내의 말에 여자가 싱긋 웃었다.
“왜 이래? 지금 우린 한편이잖아. 내 명령을 따르라고 듣지 않았어?”
“….”
사내들은 불만 가득한 눈동자였지만 딱히 대꾸하진 않았다. 오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지이이이잉.
여자의 핸드폰이 울었다.
“네, 마이로드.”
-모든 제물이 제 자리에 도착했나?
“그렇습니다.”
-좋아. 하지만 아직 녀석에게 연락이 오질 않았다. 퀸이 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야. 대기한다.
“알겠습니다.”
-만약 경찰이 오면 알아서 처신하도록 해. 일단 의식만 마치면 공권력 따위는 쉽게 조종할 수 있으니까.
“여자는 어떻게 하죠?”
-깨워두되 잘 감시하도록 해.
“네, 마이로드.”
여자가 통화하는 걸 들은 예원이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이상한 사람들이 뭔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질 모르겠다.
‘몰래카메라 같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아까 민준이 목소리가 들린 것도 황당했다. 잠깐이지만 대화가 되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것들은 다 뭐고….’
오컬트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침침한 분위기의 소품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저 촛불들 불붙이는 것만 해도 몇 시간은 걸렸겠다. 이런 자잘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이곳까지 오면서 차를 몇 대나 불태워버렸으며 지금도 저들의 표정을 보면 장난하는 것 같지 않았다.
‘강남역 근처인 것 같은데….’
이런 번화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민준아….’
아까처럼 다시 그의 목소릴 들을 수 있을까?
예원이는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저….”
예원의 목소리에 모두가 이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급하거든요…. 화장실….”
사실 그렇진 않았지만 뭔가 말하고 싶었다. 혹시 민준이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따라와.”
여자가 돌아서더니 저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예원이도 일어났다.
“들어가.”
화장실 문 앞에서 여자가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에….”
예원이는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문 좀….”
“안돼.”
여자가 가차 없이 말하자 서러웠지만 반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안에서 울렸다.
-예원아!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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