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통화를 마친 강나은이 내게 말했다.
“놈들의 동선을 예상해서 어디로 향하는지 계속 추적해볼게요.”
내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웬만하면 충돌을 피해야 할 겁니다. 수많은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
“알겠어요. 우리가 꼬릴 잡으면 당신들이 처리하겠다는 거죠?”
“네. 그편이 서로에게 안전합니다.”
잠깐 입술을 모았던 강나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태창바이오가 정치권 거물과 연이 닿아있다는 걸 확인했어요. 점차 세력을 넓혀가려는 것 같은데 그들의 목적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목적이라….”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지배입니다. 각자 형태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노리는 건 권력의 정점에 서려는 거죠. 그리고 그걸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자들입니다.”
다른 세계였지만 과거엔 인간이 모든 종족을 지배하는 걸 봤다. 시간이 흘러 최근엔 오크가 그 자릴 대체했었다. 아마도 놈들 역시 같은 짓을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을 발아래 두고 군림하는 절대자!
‘우리도 다르지 않긴 하지.’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이 번성했던 적이 있던가? 80억 명이 살아가는 지금도 각종 문제가 곳곳에서 일어난다.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생물은 동물원에 가두고 기술의 발전으로 수명은 점차 길어졌다. 누군가는 100억 명이 되면 인류의 존폐를 결정할 수도 있는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할 거라고도 하는데 그렇다고 한들 나는 내 가족과 친구가 죽는 걸 두고 볼 순 없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또 연락드릴게요!”
나는 커피숍에서 나오며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강나은을 만나는 건 내게도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속을 모르니 함정을 깔아뒀을지도 모르고 자칫 잘못했다간 여러 죄목으로 잡혀서 구속수사를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다. 그녀는 확실한 조력자다.
‘피의 군주와 퀸이 싸우고 있는 거겠지. 놈들도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을 거니까. 그러면 누가 이길까?’
둘이 싸워서 하나가 남는다면 우리로선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적이 하나라도 줄어야 좋다.
혹시모를 미행을 따돌리려고 번화가를 걷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민준아!
도화지였다.
“네, 누나.”
-오늘 몇 시에 와?
“약속이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아요. 저녁에나 갈 수 있을걸요?”
-약속? 흐음, 데이트?
“그런 거 아니에요.”
-호호호! 알겠어! 그러면 나 먼저 가 있을게! 아 참, 근데 요즘 우리 오피스텔 근처에서 구린 냄새가 자주나.
“냄새요?”
-응, 잠깐 나타났다가 곧장 사라져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진 모르겠는데 알곤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네, 조심하세요.”
-응! 너도!
전활 끊고 아까와 다른 커피숍에 들어가 핸드폰을 들었다. 하릴없이 뉴스나 검색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눈은 유리창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없어.’
이렇게 몇 번이나 확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예원이까지 끌어들일 순 없다. 예원이는 내게 비현실과 현실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치열한 삶에서 잠시 쉴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시간 맞춰 나가면 되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핸드폰으로 기사들을 검색했다. 혹시 이 기사 안에 놈들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오빠! 이제 가도 돼요?”
청담동 스튜디오.
“잠깐만! 아직 컨펌 안 나왔어!”
“아후, 오래 걸리네.”
“30분이면 나올 거야. 기다려봐.”
“그러면 옷부터 갈아입을게요!”
화보 촬영이 있었다. 뭘 입어도 반짝반짝 빛이 아는 예원이었기에 오전부터 이어진 촬영은 순조로웠다. 문제는 메인으로 밀 사진 하나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가족들이랑 밥 먹는다며.”
“…네.”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나온 예원이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는 차림이었다.
“확정만 되면 바로 택시 불러줄 테니까 늦진 않을 거야. 아니면 내가 태워줘도 되고.”
“아니에요! 저 혼자 가는 게 편해요.”
차마 민준이와 데이트 한다고 말할 순 없었기에 둘러댄 예원이었다. 이제 막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이돌이 열애설이라도 휘말리면 회사로서도 리스크가 클 것이었다.
예원이가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 조금 늦을 수도 있어!
-천천히 와도 돼.
민준의 연락을 받고 흐뭇하게 절로 웃는 예원이를 보며 매니저가 물었다.
“학교는 어떻게 됐다고?”
“가을부턴 다시 다닐 수 있을 거래요.”
“잘됐네.”
매니저가 웃었다.
“전에 나간 광고가 반응이 좋아서 요즘 다양한 곳에서 연락이 오고 있어. 몇 개 더해야지. 이 바닥이 참 신기해서 노래로 못 떠도 광고 하나로 대박 날 수도 있다니까? 일단 광고료는 생각하지 말고 뭐든 찍자.”
“오빠가 알아서 해주세요. 저는 다 좋아요.”
마침 저쪽에서 감독이 나왔다.
“후! 이제 끝났습니다! 워낙 좋은 사진이 많아서 고르는 데 애를 먹었어요! 내가 20년 넘게 이 일을 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니까?”
매니저가 감독에게 달려갔다.
“왜요?”
감독이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직접 보세요. 뭐가 낫죠?”
“음….”
“분명히 구도나 표정은 이쪽이 좋은데 이 사진도 알 수 없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니까? 예원씨 사진이 대부분 다 이러는데 대체 이 생동감은 뭔지! 사진 작가들한테는 최고의 모델이에요! 어떻게 찍어도 사랑스러우니까!”
매력 아이템 덕분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기에 감독은 허허헛! 웃으며 예원이를 보면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고맙습니다.”
“가수도 좋지만, 모델 쪽으로도 대성할 수 있을 거야! 패션 쪽도 관심을 가져보시라고! 내 눈은 한 번도 틀린 적 없으니까!”
어떻게 찍어도 그림이 되는 모델이 있다는 것은 작가들에겐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돌이니까 예쁜 건 당연하겠지만 예원이에겐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꿀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오빠, 저 이제 가도 되죠?”
하지만 예원이는 온통 민준과의 약속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연락도 잘하지 못하고 사는데 늦긴 싫었던 거다.
‘곧 차 막힐 시간인데.’
예원이가 초조하게 바라보자 매니저가 웃으며 택시를 불렀다.
“걱정 마. 이면도로로 가면 안 막힐 거야.”
예원이는 이제 스타나 다름없었다. 젊은 사람들은 예원이의 얼굴을 다 알고 있었고 회사에서도 이제 듀엣이 아니라 솔로로 활동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얘길 심심찮게 했다. 그럴수록 예원이는 점차 평범함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은 많지만 걔들은 오직 예원이의 화려함과 연예계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지 않는 유일한 한 사람이 바로 민준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택시에 오른 예원이가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러면서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민준이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이런다. 방송국에 드나들며 수많은 꽃미남을 봐왔지만 예원이는 민준이 좋았다. 묘하게 어른스럽고 편한 아우라는 10대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으으…. 20분 정도 늦겠는데?’
예원이가 발을 동동 구르는 걸 택시 기사가 말했다.
“아, 여긴 항상 막힌다니까? 손님, 골목으로 들어갈까요?”
“빠른 길이면 어디든 좋아요!”
“알겠습니다. 빠르게 모실게요.”
택시 기사가 핸들을 꺾었다. 대로로 나갔다가는 오도 가도 못 할 걸 경험으로 안다.
‘민준이한테 사진 찍자고 해볼까?’
요즘 유행하는 네 컷 사진을 생각하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민준인 친구로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괜히 어색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진 정도면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부푼 꿈을 안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택시가 끼이이익! 섰다.
“아, 뭐야? 저 x끼는! 운전을 뭐 저따위로 해?”
택시 기사가 창문을 내렸다.
“이봐! 차 빼! 거기서 정차하면 어떻게 하라고!”
검은색 승합차가 택시 앞을 막았는데 택시 기사가 고래고래 소릴 질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 저 x끼가?”
택시 기사가 참지 못하고 막 운전석 문을 열었을 때였다.
퍼억-!
문이 벌컥 열리더니 택시 기사가 택시 안에서 나뒹굴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그를 걷어찬 것이다.
화악!
뒷좌석 문이 열렸다.
“…?!”
여자가 보였다. 그 여자는 예원이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상체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왜, 왜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뭐라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팔을 잡혔는데 여자는 엄청난 힘으로 예원이를 끌어당겼다.
“꺄아-!”
잡힌 팔도 아프고 무섭기도 해서 소릴 질렀는데 여자가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그 입을 막아버릴 거야.”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
‘나, 납치?’
밖이 이렇게 밝은데? 주변엔 집들도 많고 저쪽 편의점 앞엔 사람도 있는데?
훅! 몸이 딸려가면서 여자가 예원이의 멱살을 잡았다. 숨이 막혀서 소리도 못 지르겠다.
“확보했다. 가자.”
여자가 예원이를 택시에서 끌어내며 말하자 운전석 쪽 남자가 승합차로 가서 문을 열었다.
‘대, 대체 왜 나를?’
물론 그녀도 연예인이다. 하지만 연예계 전체로 봤을 때는 이제 막 시작한 햇병아리일 뿐이었다.
“들어가!”
여자가 예원이를 거칠게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거부할 수도 없었다.
승합차가 출발했다. 여자는 택시 뒤에 정차한 차로 올라탔는데 타자마자 전화기를 들었다.
“마이 로드, 대상 확보했습니다.”
-잘했다. 추적은?
“따돌리고 가겠습니다.”
-알겠다. 차는 불태워. 시선을 돌려야 해.
“네.”
여자가 후진으로 차를 뺄 때 승합차는 이미 골목을 질주하고 있었다. 차 안엔 4명의 사내들이 타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대범한 범죄를 저지르면 자기도 모르게 흥분이라도 할 것 같은데 어떤 표정도 없었다.
‘어떡하지? 나, 어떡해!’
예원이 공황 상태에서 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사내가 손을 불쑥 내밀더니 예원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그러더니 그걸 그냥 손으로 쥐어서 부숴버렸다.
“…아앗!?”
돌려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이었고 사람이 저렇게 맨손으로 핸드폰을 박살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보았기에 멍하니 바라보는데 사내가 운전석을 보며 말했다.
“저 건물이다.”
“알아.”
승합차가 한 빌딩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여기가 어디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승합차가 멈춰 서고 사내들은 예원이를 데리고 다른 차로 옮겨탔다.
“태워.”
차가 떠나기 전 사내 하나가 승합차에 지포 라이터를 던졌다. 이미 기름통이 실려 있었기에 차가 화마에 뒤집히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이 틈에 그들은 도로로 빠져나갔다.
위이이이이이잉!
소방차가 그들이 탄 차를 스쳐 지나가는 걸 보며 사내들은 다음 목적지에서 또 차를 갈아탔다. 추적을 피하려고 하는 것도 있었지만 일부러 불을 질러서 혼란을 가중하려고 했다.
‘꿈일 거야. 그렇지?’
너무 엄청난 일에 예원이는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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