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잠깐만요. 지금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깽판을 치려고 해도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괜히 나섰다간 우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제물을 가져와라!
-제물, 어디 있어?
흑마법사들이 외치자 저 안쪽에서 몇 명의 흑마법사가 커다란 상자에 담긴 물건들을 가져왔다.
-오오오! 이런 보물을 보게 되다니!
제국의 힘이 대륙을 집어삼켰으니 어렵지 않게 입수한 세 가지 보물이 제단에 놓였다.
“어라? 저거? 그거 아니야?”
도화지가 깜짝 놀라 물었는데 제단의 물건들은 나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세계수의 가지다! 저 까만 건 뭐지? 구슬같이 생겼는데 안에서 빨간 게 돌아다니네?”
우리의 궁금증은 공작이 풀어주었다.
“저것들은 뭔가?”
젊은 흑마법사가 설명했다.
“세계수의 가지, 대지의 핵, 쿤트라의 해골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쿤드라의 해골은 무엇인가? 저런 기분 나쁜 게 왜 필요하지?”
“쿤드라는 최초로 리치 마법을 완성한 흑마법사였습니다. 저 해골이 영혼의 그릇이기도 한데 걱정하시는 것처럼 저것을 폐하께 쓰거나 하진 않습니다. 저주를 상쇄하려고 하는 겁니다. 저 쿤드라의 해골로요.”
“으음, 그런가?”
흑마법에 대해선 문외한이었기에 공작은 더 묻지 않았다.
“리치라면 그 죽지 않는 괴물 마법사인가?”
김우태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그럴 거예요. 이제 쿤드라가 뭔지 알겠네요.”
그게 왜 오크에게 전해졌는진 모르겠지만 인간이 이렇게 번성했을 때 모든 보물을 독식하는 것처럼 훗날 오크도 같은 경로로 재물을 모았을 것이다.
“저 모든 것들을 짬뽕해서 흡혈귀를 만들었다는 거지?”
“이제 시작하려나 봐요.”
나는 긴장하며 말했다.
“만약 판을 깰 수 없을 것 같으면 제가 어떻게든 하프엘프를 데리고 탈출해볼게요.”
“그게 되겠어? 그 여자를 만지지도 못하는데?”
“뭐든 해봐야죠. 형은 기회 봐서 저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만이라도 확보하세요. 그러면 의식이 중단될 거예요.”
“오케이!”
도화지가 옆에서 물었다.
“그럼 나는? 나는 뭐하면 돼?”
“누나는 우태 형 지켜줘야죠. 저놈들이 공격하면 막을 사람은 누나밖에 없어요.”
“알겠어!”
팔십 명이 넘는 흑마법사를 이기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가이나 아리가 있다고 해도 저놈들 마법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혼란을 줄 수 있을 거야. 뭐든 하나만 확보해서 도망치면 의식을 미룰 수 있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흑마법사들이 마법진 주변을 돌아다녔다.
“물러서세요! 이제 곧 의식이 시작합니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고 괜히 가까이 있다가 저주를 받거나 악마가 들러붙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에 공작과 신하들이 멀찌감치 떨어졌다. 황제의 행사이니 보긴 해야 하는데 누구도 저주를 받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흑마법사들이 초에 촛불을 켰다. 흑마법사 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초인데 그것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불쾌한 바람이 불어댔다.
“일천의 악마와 세 가지 제물! 일천의 피가 모였습니다! 지금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절대 소란을 피워선 안 됩니다! 의식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아무에게도 해로움이 없겠지만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악마들이 여러분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나는 이런 말을 듣지 못하고 왔습니다. 일단 나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폐하의 일인데 자릴 지켜야지요.
-소란을 피우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으니 기다립시다.
-흑마법사 말을 믿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어려서부터 흑마법사와는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교육을 받고 살아온 사람들인데 제국의 운명이 저들의 손에 달렸다는 게 기구하다.
“곧 의식이 시작됩니다! 순간적으로 바람이 세게 불 수 있으니까 놀라지 마세요!”
외치는 흑마법사에게 공작이 물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
“모릅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로 거행되는 의식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우리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짧게 끝날 수도 있지만, 며칠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
“성공하기만 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일이 될 겁니다. 시도할 가치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의식을 시작으로 여러분께서도 불멸을 얻게 되실 수도 있고요!”
“불멸이라니?”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건가?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놀랍군!
흑마법사는 놀라는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확실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폐하를 살리기 위해선 그만한 강력한 주문이 필요합니다. 한번 성공하면 두 번째부터는 일도 아니죠.”
“으음….”
공작은 왠지 찝찝하다는 표정이었다. 지금도 감당하기 어려운 황제가 영원히 산다고 하면 제국의 미래가 어찌 될까?
그러나 그도 이미 거행되는 의식을 멈출 순 없었다.
“다들 가만히 계세요! 이제 악마를 소환할 겁니다!”
흑마법의 기본은 악마와의 거래다. 이만큼이나 먹음직한 밥상을 차려놨으니 악마가 모이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흑마법사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주변 흑마법사가 지팡이를 모두 치켜들었다.
“탐욕과 욕망의 이름들이여! 죽음과 저주의 얼굴들이여!”
뭉클, 마법진 위로 뭉게구름이 생겼다. 일전에 황제의 침소에서도 본 것이지만 오늘은 그보다 훨씬 크고 짙었다.
“으으으으.”
“우린 이제 죽는 건가?”
“악마의 먹이가 되고 싶진 않아!”
“살려줘!”
이종족들이 머리 위 구름을 보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들을 구속한 강력한 장치를 벗어날 순 없었다.
-피…. 피로구나….
-누가 나를 불렀느냐.
-진수성찬인데?
-흐으으…. 나의 안식을 방해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악마들이 제각각 말을 하며 구름 속에서 일렁였다. 모습이 정확히 보이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보는 기분을 느꼈다.
젊은 마법사가 외쳤다.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마음껏 드시고 하나의 병과 저주를 가져가시면 됩니다!”
-고작 그거면 되나?
-그따위 일로 우리 모두를 불렀다고?
악마들이 비웃었는데 몇몇 악마가 아래의 침대를 보며 흠칫했다.
-기이하군.
-뭐지? 저 인간은? 아니, 인간이 맞나?
-묘하군.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저주인가? 어떤 저주지?
악마들이 호기심을 보였다는 걸 확인한 흑마법사가 더 크게 외쳤다.
“일천의 피와 생명을 당신들께 바치나이다! 세계수와 대지의 핵, 쿤드라의 해골도 준비했으니 폐하를 괴롭히는 질병이나 저주를 모두 저 쿤드라의 해골에 가둬주시길 바랍니다!”
이론적으론 완벽했다. 황제의 병을 저 해골에 담고 제물로 준비한 일천의 이종족을 악마들에게 준다. 그런 다음 마법을 발동할 것이다. 이미 황제는 몇 달에 걸쳐 자신의 육체에 마법을 받아들였었다. 의식만 차린다면 바로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낄낄! 이놈들이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지?
-상당히 흥미로운 짓을 하려는 거 같은데?
-인간의 황제를 살리려고 이만한 제물을 모았다고?
-우린 그냥 주는 거 받고 재미있게 즐기면 되는 거 아니야?
-맞아! 맞아!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건 인간들 책임이지!
-호호호호! 미련하구나! 너희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진정 모른단 말이냐!
악마들마다 의견이 달랐지만, 흑마법사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황제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자신들은 예전처럼 외딴 변두리 같은 곳에 살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받아야 할 것이다.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으니 의식을 거행합니다! 그대들은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흑마법사가 강하게 외치자 악마들이 떠들었다.
-어떻게 하지? 거절하기엔 밥상이 너무 잘 차려졌는데?
-이 많은 목숨을 또 언제 대가 없이 거둬보겠어?
-할까? 너도 할래?
-입안에 침이 고여서 더는 못 참겠군.
찬성하는 쪽도 있었지만 반대도 있다.
-거래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예상할 수 없어. 그게 우리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나는 그냥 기분이 나빠.
-인간들의 수작에 놀아나는 게 싫은데?
-나는 가겠어.
몇몇 악마가 구름 속에서 사라졌다. 거래는 상호가 원해야 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할 수 없었다.
‘아직도 많아.’
흑마법사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셀 수도 없는 악마가 아직도 구름 속에 있었고 거래할 악마는 얼마든지 있었다.
-좋아! 하자! 어서! 빨리!
찬성하는 악마들이 재촉하자 흑마법사가 말했다.
“약속은 약속! 만약 거래를 이행하지 않을 시 그 책임은 반드시 그대들이 져야 할 거요!”
-저주나 병 옮기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야!
-우리가 밥 먹듯 하는 일인데 뭐!
-어서! 배고파!
악마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황제의 몸에서 뽑아낸 저주나 병을 쿤드라의 해골에 담으면 된다. 그러면 저 많은 일천의 생명을 취할 수 있었다. 얼마나 쉬운 거래인가?
“좋습니다! 거래합시다!”
-와아아아아아!
-히히히! 좋아!
-빨리하자! 빨리!
악마들이 우수수 구름 속에서 튀어나와 황제의 몸을 붙들었다.
“헉… 저게 다 뭐야….”
악마라고 꼭 인간처럼 생긴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체 뭘 닮은 건지도 모르겠는 괴상한 것들도 튀어나왔는데 서로 차지하려고 황제의 몸에 들러붙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황제의 몸은 밖에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악마에 뒤덮였다.
공작이 그 모습을 보며 신음했다.
“으으으…. 폐하께서 악마들에게 유린당하시다니….”
옆에서 후작이 말했다.
“저렇게라도 해서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면 해야 합니다.”
“그렇지. 그래야겠지. 하지만 만약 일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그 후환은 어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은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 나도 믿고 싶네만….”
악마들이 더 내려왔다. 이제 황제의 침대 전체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끔찍한 악마의 모습에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꼭 감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으히이이이익?!
침대 안쪽에서 비명 같은 게 들렸다. 그러더니 그 수가 점차 많아졌다.
-뭐지? 놔, 놓으라고!
-허억! 이건 대체…?
-빠, 빨려 들어간다! 아니! 잡아먹힌다!
-도망쳐! 이 인간이 우릴 잡아먹고 있어!
-뭐라고? 그게 말이 돼?
-비켜! 비키라고!
악마들이 난리가 났다. 황제와 가까운 악마들부터 차례로 황제의 몸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싫어! 싫다고! 아아아아악!
-떨어지지 않아! 누가 내 팔을 잘라줘!
흑마법사들도 당황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왜 악마들이 저러는 거지?”
“병이나 저주를 그저 쿤드라의 해골로 옮기면 되는 간단한 의식이었잖아!”
흑마법사들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일은 그 어떤 기록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공작 옆에서 제사장이 신음했다.
“으음…. 설마….”
절대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자신의 방에 찾아왔던 흑마법사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그가 섬뜩함을 느끼며 그 흑마법사를 찾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저쪽에서 데럭이 활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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