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이거다. 이걸 막아야 해.’
흑마법사들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작이 말했다.
“크흠! 이제 만일을 위해 논의해야 할 것이 있소. 폐하께서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아서 비상시인 만큼 우리가 안배를 해두어야 할 것 같은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이미 이야기가 오간 게 있었는지 몇몇 사람들이 눈에 띄게 찬성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제국엔 단 하루도 폐하의 공석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마침 황태자가 계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공작은 황제의 첫째 아들을 미는 분위기였다.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나이는 많지만, 그 성정이 아비를 쏙 닮아서 컨트롤이 어렵다. 황제가 끝내지 못한 정복 전쟁을 재개할 가능성도 있다.
‘둘째 아들이 더 다루기 쉬운데.’
‘둘째는 온순하니까 우리 말을 잘 들을 거야.’
‘어린 쪽이 쉽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황제도 익히 아는 문제였는데 당연히 장자에게 물려주는 게 맞으면서도 둘째가 통치를 더 잘할 것 같았다. 어렵게 일으킨 제국인데 아들이 말아먹어서 되겠는가?
“황자들을 모두 모아서 경연을 시켜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거 좋겠습니다. 우리끼리 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모두의 앞에서 가장 유능한 이를 후계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의견이 오갔다. 하지만 공작은 더 나서지 않고 지켜만 봤다. 그가 원하는 건 후계 문제를 꺼낸 것만으로도 달성했다. 황제가 악몽의 바다를 건너겠다고 선언한 뒤로부터 공작은 계속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었다. 이미 땅은 충분한데 왜 쉬질 않는지!
“출정식에 맞춰서 진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습니다.”
“오! 축제가 더 신나겠습니다!”
병사들은 싸우러 가는데 축제라 한다. 이걸 꼬집는 사람도 없다.
‘만에 하나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황자가 어리니 섭정을….’
‘제국을 내 발아래 둘 수도 있어.’
대신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황제의 존재감이 워낙 강했기에 그가 건강할 때는 이런 생각을 꿈도 못 꿨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 간사하다.
공작은 대신들의 분위기를 보다가 생각했다. 이건 매우 불순하면서도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지 않으시는 것이 제국을 위해 더 좋을 수도 있다.’
전쟁은 멈춰야 했다. 차지한 땅을 통치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무엇보다 계속된 학살은 언제고 제국에 저주를 내릴 것 같았다.
‘그 저주를 폐하께서 감당하신 건가.’
그렇다면….
‘폐하께서 영원히 잠드시는 것도 좋을지 몰라.’
공작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때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감옥으로 가면서 내가 보고 들은 걸 정리했다.
‘의식이 완성되면 최초의 뱀파이어가 탄생한다. 그게 황제일 가능성이 99%.’
나머지 1%는 내가 모르는 변수일 것이다.
‘아들이나 혹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 흑마법사가 가로챌 수도 있고.’
다방면으로 생각하면서 대응하되 의식을 막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바꿔도 현재는 그대로일 것이니까.
‘내게 뭘 보여주려는 거냐.’
나는 회의장을 나가면서 재능마켓의 의도를 계속 곱씹어보았다.
‘설마….’
21세기 대한민국에 엄청난 사건이 터지려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거고?
‘설마가 아니지. 이미 퀸과 로드 같은 놈들이 넘어와 있어. 그들 중 누구라도 본래의 힘을 찾으면 세상이 망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면 세계의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 퀸의 폭력성이라면 지구를 초토화할 거다. 뱀파이어는?
‘인간은 가축이 될 거야.’
이 과거의 어떤 지점은 우리에게 경고하는 거다. 하층 역사상 인간이 가장 번성했을지도 모르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억지로 막으려 하지 말고 다 보자.’
감정에 휩쓸리면 안 된다. 이건 만들어진 영화와도 같다. 우리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황제와 흑마법사, 그리고 쿤드라.’
이 단어들의 연결고리는 하프엘프가 될 것이었다.
‘이크!’
막 복도를 돌아 나서는데 흑마법사 하나가 지나갔다. 하마터면 코앞에서 딱 마주칠 뻔했다.
흑마법사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바닥을 내려다보느라 나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풀리지 않아… 뭐가 문제일까? 거의 다 왔는데 왜 막힌 거지? 뭔가 부족해. 근데 그게 뭐지?”
흑마법사도 기본적으론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다. 황제를 위한 의식이든, 마법이든 딱 한 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그게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조심히 뒤따랐다. 저 흑마법사는 뭔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을 것 같았다.
흑마법사가 한참을 걸어 누군가의 방에 들어갔다.
“제사장님, 저 데럭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들어오게.”
데럭이 방문을 열자 안에서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피의 의식을 준비하는데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건 자네들이 전문가일 텐데 왜 내게 왔나?”
제사장은 불쾌하다는 눈길로 흑마법사를 보았지만 내치진 않았다.
“저희만으론 할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제사장님의 마법적 능력은 제국에서 최고이지 않습니까?”
“흠흠, 그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무엇에 관해?”
“피에 속성을 담아야 마법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그게 되질 않아요.”
“속성이란 건 물질이 타고나는 것인데 그게 강제로 한다고 되겠나?”
“세상에 안되는 건 없습니다.”
“안되니까 내게 온 거 아닌가? 열정과 자만은 구분을 해야지. 연금술사도 바다를 땅으로 만들 수 없고 하늘을 산으로 바꿀 수 없네.”
흑마법사는 제사장의 말을 들으며 자기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런 개념이 아닌 거지. 이건…. 달라. 악마, 피, 생명, 원한, 인간, 육체…. 모든 게 다 있어. 조합하는 공식을 위해 빠진 톱니바퀴 하나가 부족할 뿐이야….”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제사장이 눈살을 찌푸리자 흑마법사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처음엔 종속이었습니다. 폐하의 육신에 강력한 마법을 걸어서 모든 이종족이 폐하를 주인으로 섬기는 굴레를 씌우려고 했죠.”
“…나는 찬성하지 않았네.”
“군대를 통제해야 하고 배신을 막기 위해선 매우 좋은 수단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하다 보니까… 고작 거기서 끝나지가 않았습니다.”
“뭘 하려는 건가?”
“피… 피… 피….”
흑마법사가 또 중얼거렸다.
“피는 이어짐, 피는 종속의 원천, 피는 생명수… 피는….”
그러다가 급격하게 눈이 커졌다.
“저주?”
흑마법사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방에서 나가버렸다.
“이봐! 데럭!”
제사장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저주… 라고…? 자네들 대체 뭘 하려는 건가?”
나는 급히 몸을 숨겼다가 흑마법사를 뒤따랐다. 그는 눈이 뒤집혀서 나를 앞에 둬도 못 알아볼 것 같았다.
순식간에 지하 연구실로 간 흑마법사를 보며 김우태와 합류했다.
“저 흑마법사가 뭔가 일을 벌일 것 같아요.”
“뭔데?”
“모르겠어요. 근데 예감이 좋지 않아요.”
도화지가 내게 할말이 있는지 입을 열었다.
“지켜봤는데 뭐가 잘 안되는 것 같더라고. 황제가 오기 전에 의식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뜻대로 안 풀리나 봐.”
“의식에 대해서 알아보셨어요?”
“그거 저놈들이 원래 하려던 거, 그거야. 말은 악마를 쫓으려고 한다지만, 내가 아까 몰래 들었거든? 쟤들 말하는 거.”
“거기서 더 변형된 형태일 거예요. 피와 저주, 종속…. 이런 것들 익숙하지 않아요?”
“흡혈귀!”
“맞아요. 지금 그걸 완성해가는 것 같아요. 불멸엔 대가가 따르니까. 그걸 저주로 바꿔서 마법을 쓰려는 것 같아요.”
뭐든 기존에 없는 걸 창조하는 건 어렵다. 익숙해지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자동차나 스마트폰을 이 시대에서 떠올릴 수나 있을까? 뱀파이어도 그럴 것이다.
“으아, 이놈들이 괴물을 만들었구나.”
김우태가 진저리를 쳤다.
“왜 욕심을 부려서 이러는지! 제국의 주인인 양반이! 자기가 어떤 괴물이 될지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는 괴물. 이미 인간에서 아득히 벗어난 존재가 된다. 그걸 여기 있는 모든 흑마법사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자기들이 가장 첫 번째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데.
“형, 누나. 감정적으로 대해선 안 돼요. 이건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요. 우리는 다 보고 앞으로를 생각해야 해요. 사람들을 구하면 좋겠지만…. 그래봐야 의미가 없을 수도 있어요.”
도화지가 울상을 했다.
“그래도 그냥 지켜보는 건 왠지 열받아.”
“나설 수 있을 때는 나설 거에요. 그렇지만 무리하진 말자는 거예요. 정작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있으니까.”
김우태가 이해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 했어. 우리 세상에 괴물이 있는데 그놈을 막아야지.”
“네. 그걸 위해 우리가 여기 있는 거니까.”
“전에도 이런 적 있었잖아? 그 피라미드.”
“퀸이었죠.”
“로드도! 로드의 성!”
도화지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셋의 과거를 다 본 거예요. 이 정보로 우리가 놈들을 막아야 해요. 우리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아직은 우리가 가진 것들을 어떻게 활용해서 그들을 물리쳐야 할지 모르지만 계속 단서를 수집하다 보면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리 머지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늦으면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니까.
“어? 저놈들, 뭐 하려나 보다.”
우린 벽 뒤에 숨어서 흑마법사들을 훔쳐봤다.
-데럭이 기막힌 발상을 했는데! 다들 모여봐!
-뭔데?
-데럭이?
-오오오오! 설마 방법을 찾았나? 그런 거야?
흑마법사들이 우르르 원을 그리며 섰다. 그러자 데럭이 말했다.
-이 마법은 접근부터 달리해야 해. 무엇이든 대가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걸 너희도 알지?
데럭은 이상한 놈이었지만 머리는 좋았다.
-종속의 역할을 하는 것은 피잖아? 그러면 그걸 증폭하는 건 뭘까?
데럭의 말에 흑마법사들이 의견을 냈다.
-원한?
-증오?
-분노?
데럭이 웃었다.
-맞아. 그런 것들이 일반적이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피를 매개로 종속을 전염시키고 그 피로 생명의 원천을 이어가는 거야. 타인의 피와 생명으로 불멸을 이어가는 거지!
흑마법사들이 크게 놀랐다.
-그게 가능해?
-계획은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건가?
흑마법사들이라 그런지 타인의 생명을 갈취한다는 것엔 전혀 죄의식이 없었다.
“개새끼들이네….”
“오빠, 쉿!”
데럭이 두 팔을 벌리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물론 이것엔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니 대가가 따를 거야. 하지만 우린 그걸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먼저 저주로 선수를 쳐버리는 거지! 다른 부작용이 개입할 수 없게 강력한 것으로!
그게 뭔진 모른다. 하지만 곧 시작되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839-322-6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대한 편집권은 저자와의 계약에 의해 ㈜알에스미디어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 수정, 배포 행위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