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으, 으아아아아아악!”
경비병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울부짖으며 황제를 뿌리쳤다. 한 움큼이나 살점이 떨어져 나간 목덜미를 손으로 잡으며 비틀거릴 때 흑마법사들이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구속해!”
“폐하를 안전하게 모셔야 한다!”
흑마법사들의 지팡이가 황제를 향하자 황제는 괴로운 듯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픽, 쓰러졌다. 서둘러 온 기사 하나가 황제의 몸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공작이 들어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누가 설명해보라!”
흑마법사들이 눈알을 굴렸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역적으로 몰릴 것 같았다. 젊은 흑마법사가 나섰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악마의 농간에 당하신 것 같습니다.”
“악마라?”
“아까 보셨지 않습니까? 악마가 폐하의 육신을 지배하려고 시도했었습니다. 폐하께서 사력을 다해 그걸 뿌리치셨고요.”
전혀 달랐지만 어떻게 보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으음…. 그런 일이….”
뒤따라온 사람들도 신음했다. 황제가 악마에게 당하다니! 이런 끔찍한 일이 왜 벌어졌는가?
젊은 흑마법사가 말했다.
“그간 제국을 일으키며 수많은 피를 손에 묻히셨습니다. 악마에겐 아주 좋은 먹잇감이겠죠. 최근 성에 망자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공작이 급히 물었다.
“해결책은 없나?”
“우선 폐하께서 깨어나시길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까요.”
“알았다. 여봐라! 폐하의 침상을 깨끗하게 갈고 주변을 치워라!”
공작이 젊은 흑마법사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긴급회의를 열 것이니 너희들은 다시 악마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곳에서 폐하를 지켜라.”
“알겠습니다.”
공작이 사람들과 떠나자 흑마법사들이 서로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시녀들과 기사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속마음을 얘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서로를 향하며 뜻을 전하고 있었다.
‘오히려 악마가 당한 것 같은데?’
‘악마의 혀를 물다니 대체 어쩌시려고?’
‘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야. 악마의 저주를 피하려면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 해!’
악마뿐 아니라 황제는 경비병의 목까지 물었다. 이성이 완전히 날아갔다는 뜻이었다.
“일단….”
젊은 흑마법사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악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마법진을 만듭시다. 폐하께서 일어나시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치료법을 찾아봐야 합니다.”
하지만 황제는 그 후로도 이틀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이 사이 김우태와 합류했는데 두 사람은 성의 비밀통로를 이용해 이동하고 있었다.
“최초의 뱀파이어, 아마도 황제가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은데.”
김우태의 말에 도화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막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방해했지만, 소용이 없었잖아요.”
나는 그들에게 하프 엘프에 관해서도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볼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어쩌면 그 여자가 열쇠일 수도 있겠어. 아니, 그럴 거란 확신이 들어. 황제가 깨어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 전에 그 여자를 빼돌려야 하지 않을까?”
흑마법사들은 황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이미 악마의 혀까지 깨문 황제인데 그보다 더한 짓이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내가 말했다.
“앞으로 며칠이 승부처에요. 황제는 무조건 출정식을 강행하거나 마법을 완성시키려 할 거니까.”
“그럼 우린 뭘 하지?”
“그 여자를 지켜야죠. 장로가 나를 볼 수 있다면 형이나 누나도 볼 수 있겠죠. 우리가 위험을 알려야 해요.”
“좋아. 마구간에 있다고 했지?”
“네.”
“가자!”
엘프들은 아직도 며칠째 마구간에 있었다. 밥이라곤 하루 한 번 나오는 빵이 전부였고 화장실조차 없었다. 말이나 엘프나 전혀 다를 것 없는 취급에 엘프들은 지칠 법도 하건만 의외로 그녀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장로가 말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웃었다.
“날이 더워지네. 너도 그렇지?”
그녀의 손길이 좋은지 말이 뒷발을 차댔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손님이 왔구나.”
“어디요? 아무도 없는데요? 아! 그 유령이 다시 온 건가요?”
우이아릴은 우리 쪽을 두리번거렸지만 볼 수 없었다.
“이번엔 더 많은데? 귀여운 친구들도 있고.”
“귀여운 친구요?”
“저들이 네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하는 것 같구나.”
벨트 후작은 그녀들을 여기에 처박은 이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가 악마에게 당했다는데 다른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와, 진짜 신기하네? 흑마법사도 아닌데 우리가 보이나 봐!”
도화지가 장로의 앞에 가서 웃었다.
“그놈들처럼 우리와 말하거나 하진 못해요.”
“그래도 이게 어디야? 기다려봐. 내가 해볼게!”
도화지가 장로의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요약하자면 당장 도망치라는 뜻인데 장로는 그런 도화지를 귀엽다는 듯 보다가 푸웃, 웃었다.
“왜요?”
“유령이 춤을 추는 구나.”
“와…. 나도 보고 싶다!”
“너도 언젠가 자연을 더 깊이 이해하면 나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조급해 하지 마. 모든 건 다 때가 있단다.”
“네, 어머니.”
도화지가 황당한 듯 입을 떡 벌렸다.
“춤춘 거 아니거든!”
김우태가 큭큭 웃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엘프들을 피하게 할지 생각하다가 돌아섰다.
덜컹!
문이 열린 것이다.
“잡아 와라!”
“네!”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왜, 왜 이러세요?”
“닥쳐라! 폐하의 명이시다! 순순히 따라와라!”
기사들은 매우 거칠었다.
“민준아! 어떻게!”
“몰라요! 기사들한텐 우리 공격이 통하질 않아요! 일단 따라가요!”
기사들이 엘프를 말에 태우고 곧장 성으로 향했는데 그녀들이 도착한 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맙소사….”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감옥엔 수많은 이종족이 닥치는 대로 끌려와 있었는데 신분,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감옥이 터질 정도로 모여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장로의 말에 벽에 기대있던 드워프가 말했다.
“황제를 살리기 위해서 의식을 한다더군. 우리가 그때 필요한 것 같은데…. 악마의 먹이로 던져주려고 한다는 소문도 있고.”
“말도 안 돼요!”
우이아릴이 뾰족하게 외쳤지만 이미 감옥 안의 이종족들은 체념한 표정들이었다.
“무엇이 진실인진 모르지만, 우리를 여기 처박은 걸 보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거야. 그렇지 않나?”
드워프의 말에 옆의 난쟁이가 말했다.
“나는 인간이 번성할 때부터 이날이 올 걸 알고 있었어. 인간들은 다른 종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아. 무조건 빼앗고 노예로 부리려 하지. 절대 공존하지 않는 놈들이야. 위험이 되는 모든 걸 제거하려 들지. 이제 그게 우리고.”
“우리가 뭘 어쨌다고요! 저는 연금술사예요! 이봐요! 간수님! 저, 연금술사의 탑에 소속된 연구원이에요!”
우이아릴이 외쳐봤지만, 간수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소용없어. 나는 황실 소속이었어. 기사들의 검을 만드는 나까지 잡아 온 걸 보면 어떤 말도 통하질 않겠지.”
드워프의 말에 난쟁이가 물었다.
“황제가 악마에게 잡아먹혔다는 게 진짜일까?”
“그의 손에 온 대륙이 피로 물들었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라.”
저쪽의 여자 드워프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아니, 그는 이미 악마였어. 아주 오래전부터.”
이야기를 듣던 우이아릴이 장로에게 물었다.
“이제 어떡하죠?”
“모르겠구나.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아야 대응을 할 텐데.”
여기까지 듣고 내가 김우태에게 말했다.
“형, 저는 위에 다녀올게요. 뭘 하려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우리가 여기 있을게. 조심해. 위에도 흑마법사들이 있어.”
“네!”
나는 감옥을 빠르게 나갔다. 성이 아무리 커도 이어지는 길들은 몇 개 없기에 제국의 수뇌들이 모인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대회의장.
공작부터 흑마법사들까지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흑마법사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사람들 틈에 숨어들었다.
공작이 말했다.
“이종족을 다 잡아들이라 해서 그렇게 했다. 이제 무얼 할 거지?”
젊은 흑마법사는 요 며칠간 흑마법사의 대표가 되었다.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악마는 매우 강해서 적은 제물로는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놈이 만족할 만큼 주면 폐하의 육신을 노리지 않을 것입니다. 본래 사람을 쓰면 더 좋겠지만….”
“그건 안돼.”
“그래서 이종족으로 대체하는 겁니다. 폐하께서 건강해지는 것이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거짓말이 이상하게 불어났지만, 사람들은 믿었다. 눈으로 직접 악마를 보았으니 흑마법사들이 하는 말을 따를 수밖에.
“좋다. 그 의식은 얼마나 걸리나?”
“이종족 일천을 모으면 3일간 마법진을 만들어서 그 안에 폐하와 함께 머물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악마가 나타나서 폐하의 주변에 있는 제물을 먹어 치웁니다.”
-으으으….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군.
-그래도 그걸로 폐하를 살릴 수 있다면 해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이종족 일천이 대수입니까? 전쟁 한번 해도 수만의 병사가 죽어 나가는 판국인데요.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종족을 제물로 쓰는 것이 찝찝하긴 해도 딱 그 정도였다. 인간이 죽는 것도 아니지 않나?
“죄수들을 다 써버려서 어쩔 수 없이 이종족을 동원했지만 아마 그 정도의 숫자면 악마도 흡족해할 겁니다.”
“좋다. 후작.”
“네, 공작님!”
벨트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오늘까지 얼마나 잡았나?”
“팔백이 조금 못됩니다.”
“빨리 일천을 채워라. 시간이 없다. 출정식을 미루는 것은 폐하께 죽을 죄를 짓는 거다. 어떻게든 그 전에 폐하의 병을 고쳐야 한다.”
“알겠습니다!”
벨트 후작은 본래 기사였는데 공작이 지금까지 그를 돌봐주며 후작까지 끌어올렸다. 그래서인지 후작은 공작의 명이라면 목숨까지 내놓을 모습이었다.
“아….”
“왜 그러나 후작?”
벨트 후작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혹시 하프도 됩니까?”
“…반반 섞인 놈들을 말하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건 저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젊은 흑마법사는 씨익 웃었다.
“인간의 피가 섞이면 더 좋습니다. 악마는 기본적으로 모든 종족 중에서 인간을 가장 좋아하니까요.”
“그건 왜 그런가?”
“가장 탐욕적이고 파괴적이며 호기심이 많고 가능성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악마와 닮았죠.”
“크흠, 그 말은 매우 불쾌하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래서 흑마법 또한 인간이 가장 잘 다루는 것입니다.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알겠다. 이종족은 더 잡아 올 테니 너희는 가서 의식을 준비하라. 준비가 끝나면 내가 직접 폐하를 모시겠다.”
흑마법사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공작이 사람들을 지그시 보았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기분 나쁜 놈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놈들과 함께하지만 언젠가는 다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공작이었다.
‘하프….’
나는 곧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란 걸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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