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공작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곧장 흑마법사들에게 갔다. 혹시 모르니 기사들까지 대동했지만 흑마법사들을 보자 두려움이 커졌다. 존재만으로도 참으로 기분이 나빴다.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 하던 일을 멈추고 당장 폐하의 건강을 위해 매진하라!”
공작이 버럭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흑마법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연구를 멈추지 말라는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무엄하다! 이러다가 폐하의 신변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연구가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흑마법사들이 술렁거렸다. 공작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흑마법사가 말했다.
“상의할 시간을 주십시오. 후에 폐하께서 책임을 물으신다면 저희가 다 뒤집어써야 하지 않습니까?”
“그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너희들은 어서 폐하께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라!”
흑마법을 쓸 수 있다지만 제국의 공작은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흑마법사들이 자연스럽게 한곳으로 모였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저분의 말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합니다. 폐하의 건강이 무엇보다도 우선 아닙니까?”
“음…. 생각을 달리 해봐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폐하께서 원인불명으로 깨어나지 못하시는 게 어쩌면 그간 해온 연구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밤눈이 밝아지고 계속 갈증이 나신다 하신 그거요?”
“맞습니다. 이미 징조는 있었는데 설마 그게 이렇게까지 되리라곤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죠.”
“일단 가서 폐하의 상태를 봐야 하지 않겠소? 상의는 그다음에 합시다.”
“전부 우르르 몰려갈 필요가 있을까요? 몇 사람만 가서 보아도 무슨 일인지 알아차릴 것인데.”
“옳소. 나머지는 계속 여기 남아서 연구하고 대표로 몇 사람만 가봅시다.”
“내가 가겠소.”
“나도 가겠소.”
다섯 흑마법사가 나서자 공작이 끄응, 신음했다. 연구를 멈춰버리려고 했는데 저들의 뜻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전부 달려들게 해야겠어.’
내로라하는 의사도 포기했으니 저들도 뾰족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때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공작이 흑마법사를 이끌었다.
공작을 따르는 흑마법사들이 말했다.
“혹시 최근에 실종되던 사람들과 관계가 있는 거 아닐까요?”
“아, 그 망자들 얘깁니까?”
“망자가 폐하께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릅니다.”
대화에 공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망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흑마법사 하나가 말했다.
“우리와 같이 연구하던 흑마법사 넷이 실종됐습니다. 한 명은 자기 집에서 죽었고요. 그런데 최근 들어 성 이곳저곳에서 망자를 봤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 우리도 찾아보았지만,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합니다.”
“그런 해괴한 일이! 망자라니?”
“흑마법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제국이 성장하면서 수많은 피를 봤지 않습니까? 망자가 여기까지 오지 말란 법도 없지요.”
“자네들이 해결할 일 아닌가?”
“할 순 있죠. 근데 보여야 할 거 아닙니까?”
나는 아주 멀리서 뒤따르는 중이다. 흑마법사가 나를 볼 수 있기에 몸을 사려야 했다.
‘김우태와 도화지가 넷을 처리한 모양이군.’
대충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진 알 것 같았다. 그 두 사람도 최선을 다해 연구를 막으려 하는 거다.
“이제부터 조용히….”
공작이 황제의 침소 앞에서 흑마법사들을 단속했다. 이미 문밖 경비병들 얼굴에도 심각한 분위기가 달라붙어 있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황제의 부인들과 자식들도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후계자도 정하지 않았는데 의식을 못 차리니 벌써 파벌이 생기고 있었다.
“폐하….”
황제의 침대 앞에서 공작이 말했다. 하지만 황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작이 흑마법사들을 보았다.
“왜 일어나지 못하시지?”
늙은 흑마법사가 말했다.
“더 자세히 조사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들만으로 되겠나? 인원이 더 필요하면 얼마든지 데려와도 좋아.”
“아닙니다. 저주인지 병인지 다른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엔 사람보다는 몇 가지 도구가 필요합니다. 저희들에게 다 있는 것들이고요.”
흑마법사들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을 할 때엔 최대한 일반인이 없어야 합니다. 자칫해서 근처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악귀가 들러붙을 수 있거든요.”
그 말에 공작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악귀라니! 이렇게 끔찍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얼마나 걸리나?”
“반나절이면 됩니다.”
“알겠네. 우린 밖에 나가 있지.”
공작과 대신들이 서둘러 나가자 흑마법사들이 경비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악귀든 뭐든 경비병은 절대 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젊은 흑마법사가 말했다.
“해봅시다. 어둠 계열이라면 우리가 알아내지 못할 리 없으니.”
“초는 내가 준비하겠소.”
“마법진은 내가 하지.”
“제물은 내가….”
어려운 의식은 아니었기에 흑마법사들은 척척 해냈다. 침대를 중심으로 넓게 원을 그려 마법진을 완성하고 초를 정확한 장소에 배치했다. 진을 그리는 것엔 피를 썼는데 이미 연구 덕분에 피는 넉넉해서 예상보다 더 일찍 의식을 완성했다.
“시작하기에 앞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젊은 흑마법사가 다른 흑마법사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간 폐하께서는 직접 마법을 몸으로 받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여파로 이렇게 되신 것이라면 우리가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전엔 없던 것이니까요.”
“대륙에서 가장 유능한 우리가 다 모였는데 풀지 못할 문제는 없을 겁니다.”
“뭐가 됐든 빨리해봅시다. 나도 무슨 일인지 궁금하니까.”
사람들의 재촉에 젊은 마법사가 말린 닭 볏을 중앙의 초에 태웠다. 그러면서 주문을 외웠다.
“소환의식은 참으로 오랜만이군.”
“흑마법의 기초이기도 하지만 악마를 자주 만나서 좋을 건 또 없으니까.”
“오오! 나옵니다!”
황제의 몸 위로 먹구름 같은 짙은 기운이 맺혔다. 그게 똘똘 뭉치자 그 안에서 붉은 두 눈이 나타났다.
-인간. 내게 줄 것은?
악마의 목소리가 소름 끼쳤는지 경비병이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은 익숙한 듯 대꾸했다.
“인간과 다양한 종족의 피가 이만큼 있다.”
흑마법사가 병을 내밀자 악마가 씨익 웃었다.
-고작 피로 알려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는데?
“누굴 죽여달라거나 그런 건 아니다. 저분의 증세를 알고 싶다.”
-뭐, 그 정도라면야. 거래하지.
피를 담은 병들이 악마에게로 날아갔다. 신선한 피였기에 악마가 흡족한 듯 말했다.
-증세라….
구름에서 길쭉한 혓바닥이 내려왔다. 기체에 가려서 악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혀만 봐도 끔찍했다.
스윽…. 2미터 이상 내려온 혀가 황제의 몸에 닿으려고 할 때 경비병이 흠칫하며 칼을 뽑았지만, 흑마법사가 경비병을 보며 고갤 흔들었다. 자칫 악마를 공격하기라도 했다간 의식 자체가 파괴된다. 그러면 악마는 날뛸 것이고 누군가의 목숨으로 분노를 풀어야 한다.
스윽, 스윽.
악마의 혀가 황제의 몸 구석구석을 훑다가 황제의 이마에 멈췄다.
-이상한데….
악마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건 뭐지? 어떻게 이렇지? 인간의 육신이 맞나? 이럴 수가 없는데?
알쏭달쏭한 말을 하던 악마는 오기가 생겼는지 기체에서 얼굴을 아래로 드러냈다.
‘악마가 얼굴을 보이다니!’
‘진귀한 광경이군.’
‘저 악마도 폐하의 증세를 모르는 건가?’
‘어둠 계열의 증세가 아니었던 걸까?’
병과 저주의 악마는 세상의 모든 증상을 파악할 수 있다. 저 악마가 모른다면 황제는 전혀 다른 종류에 당한 것이다.
-이상해…. 몸은 죽어가는데 어떻게 영혼이 육체에 붙어있지? 아니, 죽은 몸이라고 하기에도…. 대체 이놈, 뭐지?
이때였다.
와락!
-허억…!
악마가 저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 봤다. 하지만 악마를 탓할 수도 없었던 게 흑마법사들도 기절할 정도로 놀라서 펄쩍 뛰었다. 심지어 경비병은 들고 있던 검도 바닥에 떨어뜨렸다.
-놔, 놔라! 인간!
악마가 외쳤지만, 황제는 혀를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고 상체를 들었다. 눈을 떴지만 초점은 없었고 의식도 멀쩡하지 않은 것 같았다.
“폐,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흑마법사들이 외쳤지만 더 끔찍하고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콰악!
황제가 악마의 혀를 이빨로 물어버린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악! 뭐 하는 짓이냐!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폐, 폐하를 지켜라!”
악마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흑마법사들이 악마를 향해 지팡이를 들었다. 여차하면 악마와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했다.
-이, 이 개자식들이! 불순한 의도로 나를 불러냈구나! 내가 그냥 당할 성싶으냐! 다 죽여 버리겠다!
오해였지만 황제가 악마의 혀를 물고 있으니 항변할 수도 없었다.
기체 속에서 악마의 손이 불쑥 내려왔다. 긴 손톱은 황제의 머리를 쉽게 뚫어버릴 것 같았는데 흑마법사들도 이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폐하를 모셔!”
“악마를 돌려보내자!”
“의식을 깨버려!”
흑마법사 하나가 황제의 몸에 보호막을 둘러주었다. 악마는 매우 강하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야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폐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당장 도망치셔야 합니다!”
“폐하!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악마를 놓으세요!”
“폐하!”
흑마법사들이 미친 듯이 외쳤고 이 소란을 들었는지 밖에서 기사들과 공작,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허억! 저게 뭐야?”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어!”
“그런데 폐하께서 깨어나신 건가?”
“폐하께서 악마와 싸우고 계시는 것인가?”
“저 악마가 범인이었구나! 여봐라! 악마를 죽여라!”
공작이 외쳤지만, 기사들은 악마에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흑마법사들이 해결해야 한다.
이 와중에도 황제는 악마의 혀를 물고 쪼옥쪼옥 피를 빨았다. 그의 목구멍을 타고 악마의 피가 계속해서 흘러들었고 악마는 고통스러워하며 황제를 때어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혀를 놓아주질 않았다. 이 기괴한 장면에 사람들은 입만 떡 벌리고 얼어붙었다. 악마를 본 것도 처음인데 황제는 왜 저러고 있는가?
바로 이때,
-카아아아아아악!
악마의 혀가 위로 쏙, 말려 올라갔다. 드디어 황제가 악마의 혀를 놓은 것이다.
“의식을 깨겠습니다! 반탄력에 대비하세요!”
흑마법사 하나가 중앙의 촛불을 걷어찼다. 그러자 악마의 몸을 감추고 있던 기체가 옆어지기 시작했는데 악마가 억울한 듯 그 안에서 외쳤다.
-이 간악한 놈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반드시 복수할 거다! 너희 모두를 잊지 않을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퍼엉!
마법진이 터지며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촛불이 모두 꺼졌고 흑마법사들의 옷이 펄럭거렸다.
-네놈들이 죽어도 그 영혼까지 반드시 찾아내서 씹어먹을 것이다!
원한 맺힌 악마가 사라지며 저주를 퍼부었다.
“큰일 났군. 저 악마를 적으로 돌렸으니…. 이제 편히 잠도 못 자겠어.”
그래도 황제가 깨어났으니 수확은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저쪽을 보는데 흑마법사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폐하….”
“폐하?”
황제가 경비병을 뒤에서 끌어안고 경비병의 목을 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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