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콰앙!
까만 구체가 바닥에서 터졌다. 몸에 조금만 닿아도 살점이 녹아버릴 것 같은 강한 불길이었다.
“오빠! 피해요!”
도화지가 옆으로 돌아서며 흑마법사를 향해 뛰었지만 애석하게도 흑마법사는 도화지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망자 따위가! 죽어라!”
구체가 아니라 작은 비늘처럼 무수하게 많은 것들이 도화지를 향해 날아갔다.
“꺄아-!”
탁월한 방어력 덕분에 피부에 박히진 않았지만, 타격은 받은 것인지 도화지가 끄응, 신음하며 일어나질 못했다.
“화지야!”
흑마법사와는 상성이 너무도 좋지 않았다. 공격을 해도 놈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고 도망치기도 공간이 협소했다. 마법사라는 존재가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처음 경험해보았는데 흑마법사는 쓰러진 도화지를 향해 더 강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흑마법사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다.
워어어어어어어!
도화지는 언제나 가이의 친구였다. 늘 포근하게 안아주었고 언제나 따듯한 말로 쓰다듬었었다. 지금까진 도화지의 방어력이 워낙 탁월해서 위험한 상황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도화지가 널브러지자 가이의 눈이 뒤집혔다.
쿼어어어어어어!
가기의 몸이 흑마법사 앞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은빛의 손이 흑마법사를 덥석 쥐었다.
“뭐, 뭐야? 으아아아아아악!”
가이의 손에 잡힌 흑마법사가 그대로 피떡으로 변해버렸다.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가이!”
하지만 가이 역시 김우태와 마찬가지로 물리력을 쓸 순 없었다. 도료에 담갔던 손만 흑마법사에게 영향을 줄 뿐 무럭무럭 자라던 몸은 복도를 꽉 채워버렸다.
슈슈슈슈슈슉.
커지던 가이의 몸이 다시 작아졌다.
“…하악, 하악! 가이야! 괜찮니?”
도화지도 가이부터 걱정했다. 가이가 도화지 쪽으로 열심히 뛰어왔다.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 놀랐잖아!”
성장을 멈추지 못했다면 그대로 몸이 으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쪽의 물리력은 견고해서 아무리 가이라고 해도 그 법칙을 깰 순 없었다.
“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
김우태도 철렁했던 가슴을 손으로 쓸며 복도를 보았다. 그 소란이 있었지만, 인적은 없었다. 하지만 떡처럼 변한 흑마법사가 덩그러니 있었으니 빨리 자릴 피해야 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 알았지?”
도화지가 가이를 안아 들었다. 그녀에게 가이는 이제 애완동물 정도가 아니라 늘 함께하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후, 골이 아픈 곳이야. 평소라면 다 때려 부숴버릴 텐데 그게 안 되니까 미치겠네.”
김우태가 기절한 흑마법사를 옮기며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며 도화지가 물었다.
“저거, 치워야하겠죠?”
“시간 없어. 흔적을 다 지우지도 못할 거고. 그냥 가자. 흑마법사가 아닌 이상 우릴 볼 수도 없을 거야.”
가이의 손에 도료를 발라두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위험했지만 목표는 성공했으니 어서 이동해야 했다.
“오빠, 그런데 우리가 이런다고 미래가 바뀔까요?”
“모르겠어.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가 있지 않겠냐?”
“재능마켓은 뭘까요? 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너, 저 우주 끝에 뭐가 있는지 알아?”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호호호! 그러네요!”
“가자. 경비가 순찰을 돌 거야. 최대한 멀리 가야 해.”
비밀통로까지 흑마법사를 옮겨야 했다.
.
.
.
서울 도심을 잇는 지하터널 옆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애초에 공사할 때는 이런 곳이 없었고 터널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진 관리인도 잘 찾지 않는 위치였다.
“절대 용서 안 해.”
퀸이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공간은 약 100평 정도였는데 알들이 빼곡하게 있었다.
“그, 놈들…. 반드시 찾아서 죽여 버릴 거야.”
하나는 흡혈귀다. 그놈이 피를 빨아갔다. 피 조금 빠졌다고 큰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화가 나는 건 인형이 건 저주였다. 퀸은 알을 낳아야 한다. 그런데 생체리듬이 완전히 깨져버렸고 한동안 저주가 풀리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강한 저주면 그녀의 권능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도시를 다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 찾아낼 거야.’
그녀의 원한은 점점 더 깊어졌다. 이제 막 낳은 알들이 부화하려면 한 달은 걸릴 것이다. 본래라면 이미 전에 낳은 아이들이 깨어나서 활개를 치고 있어야 했는데 다 죽었다.
그녀가 막 낳은 알 하나를 두 손으로 들었다. 처음엔 이렇게 말캉말캉해도 순식간에 자라면서 길긴 보호벽을 형성할 것이다.
‘이제 다 필요 없어. 몸 사리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아.’
이 세계에 적응하려고 노출을 꺼렸는데 몇 번을 연거푸 당하니까 분노만 남았다. 하층에선 그 누구도 그녀를 거스를 수 없었는데 여기선 자존감이 심하게 하락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후면 말끔히 씻겨 내려갈 것이다.
‘이 아이들만 깨어나면….’
그녀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다시는 그 누구도 나를 멈추지 못할 거니까.”
.
.
.
“기다려라.”
성에 도착했다. 벨트 후작이 먼저 성문을 통과했다. 경기병 하나가 급히 다가왔다.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아직 침소에 계십니다.”
“아직도?”
“몸이 좋지 않으시다 하여 아침도 거르셨습니다.”
“허어? 지난 20여 년 동안 전장에서조차 한 번도 기력을 잃지 않으셨던 분이신데?”
“의사와 마법사들이 침소로 다녀갔지만, 차도가 없으십니다.”
“알겠다.”
벨트 후작이 뒤를 보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숙소에 가서 대기해.”
“네!”
엘프들이 도망치지 못 하게 하고, 라는 말은 생략해도 부하들은 알아들었다.
“이랴!”
벨트 후작이 먼저 떠나자 남겨진 엘프는 군영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황제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출정식을 코앞에 두고 황제가 몸져누웠다면 제국 전체에 비상이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엘프를 지켜야 했다.
“들어가.”
“이 마구간에 말인가요?”
“그럼? 감옥에 넣어줄까?”
“….”
두 엘프는 마구간으로 걸어 들어갔고 이내 문이 닫혔다. 이종족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극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취급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니?”
“아니에요. 저는 연금술사 탑에서 지냈는데 이런 대우를 받진 않았었어요.”
“너는 학자니까 특별히 예우한 것 같구나. 다른 엘프들은….”
말과 동급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미안해요. 어머니….”
“그런 말 마라. 여기 좀 앉겠니?”
벽에 등을 기대어 앉은 장로는 딸을 보며 웃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생겨서 우리에겐 시간이 주어진 것 같아. 너는 혹시 그에 관해 들은 게 있니?”
“아뇨. 그가 이렇게 소문이 날 정도로 아픈 것은 처음이에요. 강철의 칼이라 불리는 사람이었잖아요.”
인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와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남자다. 그가 평소에 자기관리를 안 했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게 되겠지. 그보다….”
장로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유령은 어떤 상황에서도 너를 따르는구나.”
“…이젠 솔직히 무서워요. 이유가 뭘까요?”
“네가 연구하던 학문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장로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 흑마법사와의 일 때문에 네 곁에 있는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는 건 네게 원하는 게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 집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니?”
“아니요!”
“그러면 남은 건 네게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할지도 모르겠어. 경고하려고 하거나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전하려고 말이야.”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이런 식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장로의 눈빛엔 현기가 깃들어 있었다.
“내가 계속 지켜본 바론 저 유령은 너를 해하려 하기보다는 네 안전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단다. 자세히 볼 순 없어도 사랑이나 애증은 아니란 정도는 알겠고. 내 생각에는….”
그녀가 나를 빤히 보았다.
“네가 어떤 일에 연루되었고 그 일에 네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은데 그 흑마법사가 진실을 알고 있겠지.”
“그는 죽었잖아요.”
“하지만 다른 흑마법사는 많지 않니? 죽은 자가 시도하려던 걸 산 자들이 계속 이어가려고 할 수도 있어. 그게 황제의 건강 이상과 관련이 없으면 다행인데….”
한낮인데도 황제가 일어나지 못한다는 건 극도로 심각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엘프의 피가 몸에 좋다더라, 헛소문만 돌아도 도시의 모든 엘프의 목이 잘려 나갈 수도 있었다.
“어머니, 저기 저 구멍을 이용하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지 마. 그러면 우리 숲의 엘프들을 다 잡아들일 수도 있어.”
“아…. 하지만 그냥 이렇게 계속 기다리기만 해야 하나요?”
“저들이 어떻게 할지 기다리는 게 상책일 수도 있단다. 우리는 저들의 속내를 모르니까. 괜히 마음대로 행동하다가는 우리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있어.”
황제의 기분에 따라 도시의 분위기가 바뀌기도 하는데 하물며 그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최대한 어떤 분란도 만들지 말아야 했다.
나는 여기까지 지켜보다가 그녀가 말했던 구멍으로 걸어갔다. 당분간 두 엘프는 이곳에 갇혀있을 것 같으니 성에 가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기 전에.’
나침반을 꺼냈다. 본래는 피의 주인을 향하고 있지만, 이 세계에선 쓸모도 없을뿐더러 지금은 엘프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새로운 대상을 지정하시겠습니까?』
‘그래.’
『대상이 지정되었습니다.』
구멍을 나와 성을 바라보았다. 인근에서 황제의 성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기에 어디에서든 잘 보였다.
‘내가 가면 도화지가 먼저 올 거야.’
그녀는 냄새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범아, 가자!”
서둘러 성으로 향했다. 도화지는 황제의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대로 병마에 시달려 죽어버리면 모든 전쟁도 끝이 나고 수상한 마법도 멈추겠지만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진 않았다.
‘황제를 위해 흑마법사들이 더 극단적인 시도를 할 수도 있어.’
나는 속도를 더욱 높이며 내성 벽을 넘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쑥덕거리는 게 보였다.
‘저들은?’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황제에게 단체로 몰려가서 청원하던 사람들이었다.
“독은 확실히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음식 때문에 탈이 나신 거요?”
“그것도 아닙니다. 과로도 아니고 육체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의 말이니까 믿어도 될 겁니다.”
“그런데 왜 못 일어나시는 거요?”
“흑마법사의 말로는 저주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그걸 알아내려면 보름은 족히 걸린다고 합니다.”
“보름이면… 출정식을 미뤄야 합니까?”
“그 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신다면 그래야겠지요.”
겉으론 황제를 걱정하는 것 같은 대화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묘하게 밝았다.
공작이 말했다.
“폐하께서 일어나지 못하시니 그 사악한 마법을 준비하는 흑마법사들을 전원 중단시키고 폐하의 회복에만 전념하라고 하는 건 어떻겠소?”
이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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