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엘프들의 걱정과 우려를 받으며 장로가 움직였다. 다른 장로들도 마지못해 그녀를 보내주었는데 황제의 의도를 모르기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엘프들은 힘이 없었다. 황제에 반하다가 죄다 노예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숲이 불타는 것은 막아야 했다.
“어머니….”
“당분간 조용히 가자꾸나.”
“네….”
기사들이 기다리는 곳까지 두 사람이 숲을 나왔다.
“왔군.”
벨트 후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엘프들을 보더니 말을 내어주었다.
“아침까지 달린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려는 듯 벨트 후작이 서둘렀다. 장로와 우이아릴은 한 마리 말에 올랐는데 뒤에 앉았다.
-가자! 이랴!
말들이 질주했다. 나도 범이를 타고 이들을 따랐는데 장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이 워낙 거칠게 질주하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목소리는 멀리 퍼지지 않았다.
“그간 아프진 않았니?”
“네….”
장로가 뒤에 있었기에 우이아릴은 마치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언제나 포근하게 이렇게 안아주었던 기억이 있다.
“공부는 많이 했고?”
“아직 멀었어요.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거든요.”
“학문은 끝이 없단다. 우리의 짧은 인생에 세상의 거대한 이치를 담는 건 불가능해.”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원 없이 공부한 것 같아 다행이구나. 무언가에 막혔다는 건 앞으로도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이니까.”
장로는 현명하지만, 어머니는 위대하다. 그간 쌓인 말들이 많았지만 서둘지 않았고 모녀는 서로를 이해했다.
“어머니.”
“응?”
“황제가 대륙 전부를 집어삼키려고 해요.”
“인간의 욕심은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단다. 그 점이 매력적이지만. 혹시 인간과 사랑을 해보았니?”
“아니요!”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좋지 않아. 네 나이 때는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해보면서 웃고 울어봐야 좋아.”
“지금은 공부만 생각해도 시간이 모자란걸요.”
“아무리 바빠도 사랑할 시간은 언제나 있는 법이란다.”
우이아릴이 많은 공부를 했다지만 어머니 앞에선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시 생활은 적응됐니?”
“그럭저럭요.”
“다행이구나. 그런데 왜 돌아왔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언젠간 해야 할 것이다.
“…흑마법사가 저를 죽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흑마법사가 너를 왜?”
“모르겠어요. 제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그가 죽어 있었어요.”
다시 이렇게 황제에게 갈 줄은 몰랐지만, 어머니와 함께라서 그런가? 든든했다.
“흑마법사라…. 보통 일은 아니구나. 네가 아름다워서 그랬을지도 모르고 다른 목적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
설마 그녀의 피를 노렸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장로였다.
두두두두두!
질주하던 말이 천천히 멈췄다.
“잠깐 휴식!”
사람이 쉬려는 게 아니었다. 지친 말들을 숨 고르려는 거다.
벨트 후작이 장로에게 말했다.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서 쉬도록!”
아름다운 엘프들을 보고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는 기사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장로와 우이아릴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걸어올 때는 한참 걸렸는데 말을 타고 돌아오니 순식간에 도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이아릴.”
“네, 어머니.”
“흑마법사가 너를 노렸다고 했지?”
“네.”
“그건 아마도.”
장로가 나를 보았다.
“네 친구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네? 친구요?”
그게 무슨 말이냐며 깜짝 놀라는 우이아릴에게 장로가 나를 보고 웃었다.
“영혼이 너를 따라다닌다는 걸 몰랐니?”
“허억… 뭐라고요? 지금도요?”
“그래, 항상 네 곁에 있었다. 저렇게 젊고 잘생긴 남자가 왜 네 곁에 머물까? 짚이는 게 있니?”
“전혀요.”
“네가 하던 공부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 그는 어떻게 생겼어요?”
“사람같이.”
“우음.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장로는 나를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마법적 능력 때문일 수도 있고 흑마법사들과 같은 무언가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나는 그녀와 접선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볼 뿐 소통까진 못하는 것 같았다.
“키는 커요?”
“응, 그런데 나도 정확하게 보이는 건 아니란다. 수면 아래의 물고기처럼 흐릿해.”
“아….”
“그래도 그가 선한 사람이란 걸 느낄 순 있어. 언제부터였는진 모르겠지만 너를 아끼는 것 같구나. 단 한 순간도 네게서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으스스해요.”
우이아릴이 주변을 보며 손으로 팔을 감싸자 장로가 빙긋 웃었다.
“다시 말을 달리려는 모양이구나. 우리도 준비하자꾸나.”
그러더니 장로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영혼이 왜 너를 따르는지는 도시에 도착해보면 알 수 있겠지.”
.
.
.
김우태와 도화지는 성을 구석구석 뒤졌다. 몇 개의 비밀통로를 발견했고 값비싼 보물들이 모여있는 창고도 발견했다. 그러나 가장 장요한 흑마법사 사냥은 시도도 못 하고 있었다.
“저놈들은 잠도 안 자냐.”
흑마법사들은 지하에서 먹고 자고 다 했다. 밖으로 나오면 하나씩 처리해볼 생각이라도 할 텐데 출정식이 가까워져서인지 연구에 더욱 몰입했다.
“저렇게 공부하면 서울대도 가겠어요.”
“쟤들 머리는 이미 그 이상일걸? 내가 마법이란 건 잘 모르지만 보통 머리로 할 수 있는 게 아닐 거야.”
그게 설령 흑마법이라고 해도.
“아후, 어쩌죠? 사람들이 계속 죽고 있어요. 이제 여자와 아이들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대로면 당장 오늘부터 시작될지도 몰라요.”
죄인들이라고 해도, 죽을죄를 지었더라도 절차를 통해 사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피를 뽑혀 죽는 건 억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그 마수가 아이들에게까지 뻗치려 하고 있었다.
이때 저쪽에서 흑마법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얘길 했다.
“도르문드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혼자서 실험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야.”
“그런 간악한 자가! 우리 모두의 성과를 혼자 독차지하려고 했다는 건가?”
“그렇겠지. 평소에도 이기적이고 편협한 자였으니까. 실험에 쓸 남자 셋도 잡아두었다고 하는데 어쩐 일인지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죽어 있었다고 해.”
“누굴까?”
“알 길이 없지. 중요한 건 그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냐는 거야. 확신이 없었다면 일을 도모하지 않았을 거 아닌가?”
“설마 우리보다 먼저 무언가를 알아낸 건가?”
연구는 공유한다. 이 마법을 완성하려면 모두가 머리를 모아야 했는데 도르문드가 자신의 거처에서 혼자 사람들을 잡아두었다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황제가 눈치채고 제거했을 수도 있겠지. 이번 일로 황제가 우릴 모두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일지도 모르고.”
“도르문드처럼 수작을 부리려는 놈이 어디 한둘이겠나? 내가 황제라도 그럴 걸세.”
이 마법에 동원되는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이렇게 돈을 썼는데 흑마법사 하나가 배신해버리기라도 하면 말짱 헛것이 된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깨어난 용병 셋이 이런 말을 했다더군.”
“무슨?”
“하프를 잡아 왔었다고. 연금술사인데 그녀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그자가 하프를 잡아왔다고?”
“혹시 그것이 열쇠가 아닐까? 인간과 엘프의 사이에서 태어난 반쪽짜리 피.”
“음, 참신하군. 하지만 표본을 구하기가 어렵잖아. 하프는 무척이나 귀해. 도시를 다 뒤져도 몇 없을 건데. 찾는다고 해도 데려올 명분이 없고.”
“그래서 도르문드가 엘프를 납치했을 거야. 왜 죽었는진 알 수 없지만 하프와 연관이 있겠지.”
“하프라….”
“일단 황제에게 보고하는 게 어떻겠나? 남들이 선수 치기 전에.”
“그럴까? 뒤는 황제가 알아서 하겠지.”
“내가 자정쯤에 다녀오겠네.”
“내 이름도 확실히 언급해줘야 해.”
“그러지.”
숨어서 이야기를 듣던 김우태와 도화지는 서로를 보며 속삭였다.
“그 엘프를 말하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저놈이 황제에게 가지 못하게 해야 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드는데?”
“자정에 간다고 했으니까 기다려봐요.”
도르문드라는 흑마법사가 죽었지만, 흑마법사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하나가 없다고 해서 연구가 지연되는 것도 아니었고 흑마법사는 많았다.
“민준이 냄새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이쪽으로 오나 봐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이 속도라면 내일 밤쯤?”
“잘됐네. 일단 아까 그놈부터 우리가 해결하자. 어떻게든 이놈들을 막아야 돼.”
저번처럼 무작정 싸우면 어렵겠지만 확실하게 기습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놈이 지팡이를 들기 전에 해결을 봐야 해. 마법을 쓰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져.”
“넵! 정신이 번쩍 들게 때려줄게요!”
망치를 들고 무시무시한 얘길 하던 도화지였는데 기사 두 명이 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출정식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다지?”
“이번 전쟁만 끝나면 대륙은 통일될 거야.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폐하께서 하시는 거지.”
“행사는 그렇다고 해도 악몽의 바다가 해결되지 않았지 않나?”
“그래서 엘프를 데리러 갔다고 하더군. 벨트 후작님이 돌아오시면 방도가 생기겠지.”
“과연, 엘프라면 악몽의 바다를 건널 수도 있겠어. 그들의 마법은 언제나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으니까.”
기사들도 악몽의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차라리 검을 들고 몬스터와 싸우라면 하겠는데 바다에 빠져 죽는 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기사들 특성상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어서 일단 물에 들어가면 헤엄은 꿈도 못 꿨다.
“배들이 북부에 모였다고 해. 최근까지도 실감 나지 않았었는데 다시 전쟁이 시작되려 하는군.”
기사들이 지나갔다.
이미 김우태와 도화지는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었다. 더 은밀한 것들까지도 들었는데 어떤 백작의 엉덩이에 주먹만 한 점이 있다는 것까지 들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 빼고 중요한 점보라고 한다면 악몽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제국 전체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 별개로 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황제가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온다! 저쪽으로 가자!”
자정이 되자 흑마법사가 움직였다. 김우태와 도화지는 열린 방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복도를 지나가면 뒤에서 덮칠 생각이었다.
“….”
“….”
조마조마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흑마법사가 스윽 지나가자 도화지가 휙! 뛰어나갔다.
빠악!
이어지는 타격음이 공격이 성공했다는 걸 알려주었고 도화지는 흑마법사를 질질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잘했어!”
“메시지가 안 뜨는 걸 보면 죽진 않은 것 같아요.”
“일단 지팡이부터 처리하고.”
방의 구석으로 흑마법사를 끌고 간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에게 가는 건 막았는데 이다음이 문제네. 이놈이 깨어나면 다른 흑마법사들도 경계심을 키울 거야.”
“어디 가둬놓죠? 비밀통로 많잖아요. 꽁꽁 묶어두면 들키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럴까?”
“물어볼 것도 있으니까.”
흑마법사를 생포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두 사람이 흥분했는데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읍…! 망자! 이봐! 자네 괜찮나? 이보게!”
이크!
김우태가 옆으로 몸을 피했다.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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