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우진아!”
팀장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피곤하게 됐어.’
조우진 형사의 몸을 하고 있으니 가족이나 지인의 접촉이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은! 네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찾아왔지! 설마 여기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어떻게 된 거야?”
팀장이 가까이 와서 슬쩍 물었다.
“설마 잠입 수사라도 하는 거냐?”
옆에서 하녀가 나서려다가 로드의 눈치에 막혔다.
“수사는요. 그저 이제 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경찰 일, 신물이 나서요.”
“너…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 이러는 거야?”
“압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곳이죠.”
“우진아… 그게 아니잖아. 인마. 왜 이래? 형이랑 술 한잔 하자.”
“술 끊었습니다.”
조우진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 속은 세상을 집어삼킬 야욕을 가진 로드였다. 이 사실을 모르는 팀장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우진아. 형이랑 얘기 좀 해. 너 이러면 안 돼.”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 앞으론 마주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로드가 몸을 돌려 하녀와 사라지자 팀장이 버럭버럭 외쳤다.
“우진아! 우진아!”
하지만 로드는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팀장 옆에서 강나은 경위가 말했다.
“종교에 심취한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지금 저 사람에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거예요.”
“여긴 종교도 뭣도 아니지 않습니까?”
벽에 붙은 간판을 보았다.
「신세계 안식원」
오면서 알아보니까 사이비도 이런 사이비가 없었다. 병을 고쳐준다고도 하고 다이어트, 귀신을 쫓아준다고까지 광고하며 신도를 모아서는 전 재산을 기부하도록 종용하는 단체였고 이렇게 안식원에 가족을 빼앗긴 사람들이 연일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의 충격이 컸던 것 같아요.”
“경찰 일 하다 보면 다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그렇다고 이런 곳에 빠집니까?”
“사람의 정신은 굉장히 예민해요. 고통을 받아들이는 강도도 사람마다 다르죠. 누군가는 송곳도 버티지만 또 누군가는 바늘로 찌르기만 해도 참지 못할 거에요. 그럴 때 이런 곳이 손을 내밀면 빠질 수밖에 없죠.”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쉬겠다며 휴직을 하면 그러려니 했겠다. 하지만 여기에 발을 잘못들이면 쉽게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미치겠네. 우진이가 어쩌다가 저렇게….”
팀장이 말을 잇지 못하자 강나은 경위가 말했다.
“아마도 그 아파트 부녀회에 이곳 신도가 있었던 것 같아요. 기댈 곳 없는 우진 씨가 자연스럽게 포교 됐을 거고요. 최근 우진씨 집에 부녀회 사람들이 드나들었다고 했잖아요.”
프로파일러답게 분석부터 시작한 그녀였지만 팀장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이미 저렇게 빠져버렸으니 어떻게 설득한단 말인가?
“오늘은 돌아가요. 반응을 보니까 더 접근하면 괴롭힌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방어본능이 먼저 작동해서 더 경계할 거예요.”
“후우….”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팀장을 보다가 강나은 경위가 말했다.
“근데요, 팀장님. 아까 우진씨 옆에 있던 여자, 이상하지 않았어요?”
“누구요? 아, 저는 우진이 챙기느라 잘 못 봤습니다. 미인이었다 정도?”
“이상했어요. 종교에 심취하면 눈빛이 가라앉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뭐였습니까?”
“우진씨에게 향하는 시선과 몸집이 보통을 넘었어요. 그렇게 공손할 필요가 있을까요?”
“애써 끌어들인 신도를 홀리려고 뭔 짓을 못 하겠습니까?”
“그 정도면 좋겠지만….”
여자의 감이랄까? 그 여자는 우진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 같았다. 그건 잠깐이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하아, 주기적으로 설득하셔야 할 거예요. 우진씨는 절대 돌아오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이 안식원의 주인이 그였다는 것을.
.
.
.
여자의 이름은 우이아릴.
그녀의 어머니는 엘프였고 제국 수도에서 5일 거리에 있었다. 말을 타면 더 빨랐겠지만, 그녀 역시 쉬지 않고 속보로 걸어서 보통 사람이면 여기까지 며칠 더 소요했을 것이었다.
‘이런 숲이 있었다니.’
정글을 경험한 나로선 다신 그런 숲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여기도 만만치 않았다. 시선 저 끝까지 울창한 숲이 이어져 있었고 눈으로 가늠한 크기만 서울 정도 될 것 같았다. 뒤가 보이지 않으니 더 클 수도 있다.
그녀가 숲의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그림자들이 모였다.
하얀 피부.
뾰족한 귀.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특징을 모두 가진 엘프가 나타났다.
“우이아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면서?”
“이 숲에 네가 있을 자린 없어. 돌아가.”
“너는 숲의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거야. 우린 그걸 두고 볼 수 없어.”
엘프들은 적대적이었다. 엘프는 친절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들 사이에 과거의 어떤 감정이 묵어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를 뵙고 싶어요. 저는 갈 곳이 없어요….”
그녀의 말에도 엘프들은 차가웠다.
“언제든 네가 나가고 싶으면 가고 돌아오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네가 떠날 때 우리가 경고했을 텐데? 나가는 건 네 자유였지만 돌아오는 건 우리의 법령에 따른다고.”
우이아릴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흑마법사에게 죽을뻔했는데 가족도 문전박대하니 서러워진 것이다.
그런데….
“아앗?”
“뭐지?”
“저들은 누구야?”
저쪽에서 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네가 데려왔니?”
“인간들이다!”
“숲으로 오고 있어!”
우이아릴은 억울한 듯 외쳤다.
“아니에요! 제가 데려오지 않았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걱정이 스쳤다. 자신을 잡으러 황제가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엘프가 있군! 여봐라! 가서 엘프에게 전하라! 폐하의 명으로 엘프를 청하노라고!
중갑을 입은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 엘프들은 놀라서 잔뜩 긴장했다. 제국이 최근 얼마나 세력을 키웠는지 알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죠?”
엘프의 말에 기사가 말했다.
“폐하께서 마법에 조예가 깊은 엘프를 청하셨다. 당장 데려오라.”
“그 사람이 오라면 저희가 가야하나요?”
“무엄하다! 그 사람이라니? 죽고 싶은가?”
기사가 검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말 한 마리가 다가왔다.
황제의 오른팔이자 그간의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운 벨트 후작이었다.
“17년 전, 폐하께서는 이 숲을 보전해주는 대가로 너희에게 언제든 요청할 수 있는 약속을 받으셨다. 그걸 어기려는 건가?”
“….”
“당장에라도 전부 태워버릴 수 있다. 바람을 잘 타면 단 한그루도 남기지 않고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지.”
벨트 후작이 재미있다는 듯 말하자 엘프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다리세요. 저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어두워지기 전까지 엘프를 데려와야 할 거야. 너희가 오지 않으면 약속을 깬 것으로 간주하고 우린 돌아가겠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왔을 때는 전쟁을 준비해야 하겠지.”
엘프가 아무리 마법에 능하고 숲을 잘 이용한다고 해도 제국에 대항할 순 없었다.
젊은 남자 엘프가 우이아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해가 지기 전 까지다!
벨트 후작의 목소리가 숲에 메아리쳤고 엘프들은 서둘러 이동했다. 숲이 워낙 커서 마을까지 가려면 한참이었다.
“걔는 왜 데려와?”
“그럼 그냥 두고 와? 저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흥! 지금까지도 인간들과 잘 살았지 않나? 새삼스럽게 걱정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따라가는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길 잡으려고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엘프를 왜 데려가려는 거지?’
목적을 알 수 없었지만, 엘프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1시간을 달려 도착한 마을.
“뭐? 황제가?”
“마법에 능통한 엘프를 보내라고?”
“해가 지기 전까지? 그러면 얼마 안 남았잖아!”
“어쩌지?”
평소엔 차분한 엘프들이었지만 지금은 난리였다. 심지어 우이아릴이 온 문제는 신경도 안 썼다.
마을의 장로가 속속 모여들었다.
“싸워야 합니다!”
이미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그랬다간 우린 다 죽을 거야. 제국의 힘을 몰라서 그래?”
“하지만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잡아가서 죽인다는 것도 아닌데 일단은 상황을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때 한 여인이 저쪽에서 걸어왔다.
“어머니….”
크게 부르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마을의 장로 중 하나이기도 하기에 회의부터 참여해야 했다.
“마법에 능통해야 한다고 하니 아무나 보냈다가는 다시 올 겁니다.”
그녀의 말에 다른 장로가 말했다.
“그러면 결국 우리 중 하나가 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오?”
장로는 인품도 보지만 숲을 보호할 가장 강한 마법능력을 지닌 자가 맡는다.
“만약 보낸다고 하면 혼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수행할 아이들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야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돌아와서 우리에게 전해줄 거 아닙니까?”
회의는 치열했고 길어졌다. 싸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고 일단 제국으로 가서 왜 엘프가 필요한지 들어보잔 의견도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곧 해가 질 거에요. 그들이 돌아가면 다음엔 어떤 모습으로 올지 우리 모두 예상할 수 있지 않나요?”
“차라리 숲을 버리고 도망치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한 방법이지만… 제국의 마수를 피할 수 있을까요? 저들은 이미 대륙을 다 삼키고 있어요. 적이 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할지도 몰라요. 이미 이종족을 어떻게 부리고 있는지 소문 들었잖아요!”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 장로가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말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헛, 왜 장로님께서?
-안 됩니다!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장로님만은 안 됩니다!
엘프들이 경악하는 걸 보면 꽤 신임을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침 우이아릴이 돌아왔습니다. 저 아이는 오래도록 제국에서 생활해왔으니 내 동반자로 가면 좋을 것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우이아릴에게 갔다. 대부분은 적대적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우이아릴의 얼굴이 붉어졌다.
장로가 말했다.
“제가 우이아릴과 가서 왜 황제가 우리 힘을 빌리려는지 파악하고 여러분께 전달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우이아릴에게 물었다.
“너는 혹시 이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니?”
“…황제가 악몽의 바다를 건너려고 한다는 거 말곤 잘 몰라요. 바다 건너 대륙도 정복하려고 곧 출정식을 열어요.”
-허어! 그자의 욕심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악몽의 바다라니! 황제는 그 바다의 전설을 듣지 못한 건가?
-어쩌면 그 바다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일 수도 있겠어.
-맞아! 우리는 인어에게 부탁할 수 있잖아!
-이 숲을 계속 지킬 수 있다면 그 정도는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
장로가 빙긋 웃었다.
“제가 알아보고 올게요. 별일 없을 겁니다.”
그러더니 나를 봤다.
‘어?’
그 눈동자는 분명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내가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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