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더 올지 모르니까 멀리 가자.”
김우태가 서둘러 뛰어갔다. 성이 워낙 커서 그런지 술래잡기엔 제격이었다. 어차피 경비병들이 돌아다녀 봐야 우릴 볼 수 없기에 흑마법사가 움직여야 하는데 그들도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니 비상 상황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평온했으니까.
“숨 좀 돌리자.”
작은 방. 아무도 없다. 청소용품이나 작은 물건들을 저장하는 곳 같았는데 우린 옹기종기 모여서 의논했다.
“흑마법사 때문에 아까 거길 갈 수가 없어.”
김우태의 말에 도화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더 죽어 나가기 전에 해결하고 싶은데.”
“어차피 죽을 놈들이라잖아.”
“죄 없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아이도 있고.”
아이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나도 중립적인 입장이었지만 황제의 연구가 성공하면 아주 좋지 않을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 과정을 알면 후대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놈들 시설이 그곳 하나는 아닐 거야. 더 정보를 모아보자. 그런 규모로 일을 벌이려면 여러 장소에서 뭔가 해야 할 거잖아?”
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큰 장점이 있었다.
“우리가 안 본 곳이 어디였죠?”
“황제의 자식들 방이나 부인들 방?”
“그쪽도 봐야겠죠?”
“아마도?”
두 사람의 얘길 듣다가 내가 먼저 방을 나섰다.
“건너뛰는 곳 없이 다 보죠. 출정식까지는 시간이 있을 것 같으니까요.”
본래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간의 미션을 장기적으로 하면서 정글 같은 곳을 헤맨 경험이 있다 보니까 조급함을 버리는 깨달음을 몇 번이나 넘겼다. 사람이 혼자 외딴곳에서 버티려면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정신력이다. 포기하면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거고 계속 전진하면 코앞의 둔덕 너머 오아시스를 발견할 것이다.
‘반드시 어딘가에 관련자들이 있을 거야.’
황제 혼자 저런 대규모 인원과 시설을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까 본 공작이나 백작? 그런 반대하는 사람들 말고 동조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니 그들을 찾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다가 우린 창문 밖, 어떤 장소를 보았다.
“저건 뭐지?”
우연이라 할 수 있었다.
“탑인 것 같은데?”
“뭐 하는 탑인데요?”
“나도 모르지!”
“어휴!”
묘한 직감이 왔다. 저런 형태의 건물은 보통 어떤 연구시설이나 치안을 담당하는 병력이 있다. 그런데 탑이 주는 이미지는 더 폐쇄적이었다.
“가보면 알겠죠.”
“곧장?”
“네!”
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천천히 오세요. 먼저 둘러볼게요!”
“응! 조심해!”
아무것도 없으면 다 헛걸음할 필욘 없으니 뱀파이어 날개가 있는 내가 빠르게 탑으로 날아갔는데 창문은 모두 닫혀있고 1층의 현관도 잠긴 것 같았다.
‘이러니까 더 수상한데?’
탑은 꽤 컸다. 전용면적이 기둥을 중심으로 50평은 넘을 것 같으니까 위로 계속해서 공간을 만들어 층을 나눴다면 7층 건물 정도 되어 보였다.
‘뭐 하는 곳이었을까?’
외벽을 보면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지만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주변에 많았다. 잡초 없이 말끔한 길만 보아도 그렇다.
이때 뒤에서 두 사람이 걸어왔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입 닫고 있자고. 우리까지 휘말리면 숙청을 당할 거야.”
“하지만 그 흑마법사놈들의 수작을 누군가는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황제까지 그놈들 계략에 넘어갔으니 제국이 위태롭게 변하는 것도 순식간일 거야.”
“나는 차라리 이 제국이 콱 망해버렸으면 한다네.”
“자네가 제국에 원한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우리 연구를 계속하려면 황제의 지원이 절실하지 않은가?”
문으로 다가온 그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걸 문손잡이에 붙이자 덜컹! 안쪽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잠금장치만 봐도 예사롭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과 함께 안으로 잠입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자네 생각은 익히 알고 있으니까 말조심하게. 어떤 귀가 듣고 황제에게 전할지 모르니까. 내가 자네를 아껴서 이러는 거 알지 않나?”
“후…. 내가 그걸 왜 모르겠나. 안타까워서 그렇지, 안타까워서.”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책이 먼저 눈에 띄었고 예상처럼 계단과 함께 천장이 낮게 보였다. 2층 이상이 있다는 뜻이다.
‘도서관인가?’
여기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는데 분위기는 더 차분하고 탁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도서관에 가면 맡을 수 있는 종이의 퀴퀴한 냄새가 아니라 마치 대장간에서나 날법한 쇳내? 그런 게 공기 중에 떠도는 것 같았다.
위로 올라갔다. 피라미드 덕택에 이런 계단은 이골이 났다. 벽을 따라 쭉 올라가는 계단은 꼭대기까지 연결된 것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인기척이 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내일이면 완성할 수 있겠어!
-공작께 보고하겠네.
-아니야! 하루만 더 기다렸다가 하지! 내일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지 않나?
그쪽으로 걸어갔는데 벽이 없는 넓은 공간이 나타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집기가 사방에 있었는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자기만의 일에 몰두 중이었다.
‘마법사 같진 않은데? 설마 들이 그 연금술사들인가?’
합당한 추론이었다.
-그간의 설움을 한꺼번에 보상받겠어!
-자자, 오늘은 이쯤하고 가세.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지 모르겠군!
-한잔하겠나?
-아니야. 그럴 기력도 없네. 푹신한 침대만 있으면 돼.
네 사람이 1층으로 내려가자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아!”
“오오오오오! 여기, 뭔가 있겠는데?”
두 사람도 직감한 것 같았다.
“금 만드는 곳인가?”
“연금술!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도깨비방망이 찾아보자! 이히히히힛!”
두 사람이 신나서 뛰어다닐 때 나는 아직도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종이에 뭔가를 적고 있었는데 매우 심각해 보였다.
「…87일째. 출정식까지 연구의 진척을 보이지 않으면 나는 제거될 것이다. 엘프가 왜 인간보다 오래 사는지 밝혀내는 연구는 내가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시켜서 한 연구이지만 학자로서 호기심도 있었다. 이것을 증명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다양한 연구들이 다 여기서 진행되고 있나 본데.’
빈 책상에도 가보았다.
「…전임자의 기록을 받고 내가 시작한 지 193일째. 물질과 마법의 상대성이론과 여러 이론을 결합해볼 때 마법을 물질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물질에 마법을 깃들게 하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으니….」
본래 농경사회에서 나라가 번성하면 더 많은 지식이 탐구되고 과학과 수학,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꽃을 피운다. 지금의 제국이 그랬다. 수많은 왕국을 점령하면서 최고의 두뇌와 학문을 한 대 모아 서로 교류하게 하면서 이전에 없던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게 바로 연금술이라고 부르는 거고.’
은을 금으로 만드는 마법이 아니라 은이 어떻게 해서 은이 되고 금은 또 어떤 것인지 증명하는 요람.
-민준아!
그런데 도화지의 목소리가 흥분에 가득했다.
-여기 좀 봐! 어서! 빨리!
저쪽에 있던 김우태도 도화지를 향해 뛰어갔다.
“뭔데 그래?”
설명이 필요 없었다.
『연금도료:은(유니크)을 발견했습니다.』
『연금도료:은을 무기에 입혀 언데드나 암흑마법을 다루는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연금도료:은을 사용하여 저주를 끊어낼 수도 있고 레시피를 알면 직접 드링크 형태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와! 대박! 도화지! 너 일냈다!”
“우헤헤! 근데 여기 보물창고에요! 다른 게 더 있을 것 같아요!”
“익단 이것부터 챙기자! 무기에 바르면 된다는데?”
우리는 물질에 간섭할 수 없지만 도료가 든 통은 주변으로 반딧불 같은 반짝임이 났다.
풍덩!
김우태가 주저하지도 않고 인형의 칼을 담갔다.
『저주 인형의 칼에 연금도료가 입혀졌습니다.』
“오! 된다! 돼!”
“나도 할래요!”
도화지가 망치를 담갔다.
“와우! 멋진데!”
망치 머리에 은은한 은빛이 감돌았다. 그런데 도료의 양이 줄지 않았다.
‘물리적인 게 아니라 마법적 성분만 우리 무기에 깃들고 있어.’
두 사람은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무기니까 그렇다 쳐도 나는 일회용 화살을 쓴다. 여기엔 어떻게 바르지?
몇 가지 시도는 해보았다.
『활에 연금도료가 입혀졌습니다.』
『강철 화살에 연금도료가 입혀졌습니다.』
『활통에 연금도료가 입혀졌습니다.』
“이런….”
“왜? 잘 안되니?”
“활이나 화살, 통에는 되는데 통에서 새로 뽑으면 이렇게 그냥 화살이 나와요.”
“아….”
그래도 혹시 몰라서 화살을 잔뜩 뽑아서 도료를 묻히고 활통에 다시 저장했다. 그런 다음 주변을 뒤졌다.
“레시피를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있으면 제가 직접 말들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래! 우리는 다른 곳도 가볼게! 여긴 보물이 더 없는 것 같아!”
이 모든 지식이 보물이겠지만 그녀의 관심은 이렇게 우리가 확실히 써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레시피….’
기록일 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연구일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귀한 것을 대충 흘리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라서 꼼꼼하게 둘러보는데 범이가 코를 킁킁댔다. 우리가 이렇게 날뛰어도 학자들은 조용히 몰입하고 있었는데 범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간 곳엔 한 여자가 책상에 앉아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올리고 있었다. 범이가 그녀의 다리에 가서 머리를 비볐다. 당연히 범이의 머리는 그냥 통과해버렸고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다.
‘범이가?’
이런 건 처음 본다. 저 녀석이 처음 본 상대에게 호감을 보이다니? 토끼 같은 사냥감을 재미로 따라다니는 것과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누구지?’
정수리만 보여서 얼굴도 확인할 수 없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런 다음 그녀가 보는 책을 뒤로 가서 읽어보았다.
「고대 유적은 불가사의하며 우리가 증명할 수 없는 몇 가지 키워드를 품고 있는데 이것이 인간이나 이종족 이전에 무엇이 이 땅에 번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지난 10년간 동물과 이종족에 대해 연구했지만, 유리와 그토록 유사한 그들이 왜 우리와 다른가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했다. 완전히 다르다면 ‘하프’가 태어날 수 없는데 엘프와 인간, 드워프와 인간 사이에선 아이가 태어났다. 이것은 본래 한 뿌리였다는 것이 아닐까?」
사르륵.
다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로 넘기다가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고요한 공간. 사람이 있지만 없는 것같이 적막했다. 몇 사람을 둘러본 그녀가 다시 책에 시선을 두었다.
‘예쁘네.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어떤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이 어디였는지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을…(중략)…이 연구의 끝에 모든 것의 출발이 증명된다면 모든 분쟁과 전쟁을 없애고 화합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올 때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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