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뭐가? 왜들 그래?”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는 그녀의 품에서 가이도 고개를 갸웃했다.
“걱정했잖아요!”
“아, 그랬어? 미안! 이 사람들 따라오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김우태도 헐레벌떡 뛰어와서 말했다.
“이렇게 멀리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했어야지…!”
놀란 가슴 진정시키며 버럭 외치는데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이건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일입니다.”
“당연하지요.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럼 어서….”
로브 차림의 세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김우태가 눈을 깜빡였다.
“뭐지?”
도화지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거봐! 수상하지? 딱 봐도 이상했다니까? 자기들끼리 만나자마자 뭐라고 쑥덕거리더니 도망치는 것처럼 여기까지 왔어.”
세 남자는 주변을 살피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자석에 끌리듯 뒤따랐는데 남자들은 거실에 서더니 카펫을 걷었다.
“와! 비밀공간! 대박!”
도화지가 보물이라도 찾은 듯 외쳤다.
“이놈들은 대체 뭐지?”
김우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봤는데 두 남자가 내려가자 다른 한 남자가 밖에서 카펫을 정리하려고 했다. 우리도 급히 내려갔다.
앞에서 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횃불에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음침했다.
“거사는 언제로 정했습니까?”
“출정 전엔 어떻게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으음, 시일이 별로 남지 않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해봐야지요. 이건 전 대륙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지하는 벽과 천장이 석실로 되어 있었는데 단순히 파낸 게 아니라 마감까지 했다는 건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공간이란 뜻이었다.
계단을 내려간 두 사내가 오른쪽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길은 계속 이어져 있었는데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방엔 네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우리까지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넓은 방이었는데 벽 쪽에 먹거리와 물이 있었고 퀴퀴한 냄새는 꽤 오래 사람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 같았다.
“오! 형제! 오셨습니까?”
“수고가 많습니다.”
“우리가 수고는 무슨요. 형제들이 고생이지요. 앉으세요. 그래, 갔던 일은 잘되었습니까?”
네 명의 남자가 반갑게 맞아주자 두 사람은 웃으며 앉았다. 테이블 하나 없는 삭막한 곳이었지만 사내들의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출정식에 혼란을 틈타 잠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정식이라…. 그래봐야 보름 남았군요.”
“보름 안에 모든 준비가 끝나겠습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밖에서 들어온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술을 가로지르는 상처가 매우 인상적인 사내였다.
“성에서 일하는 사람 몇 명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이 돕는다면 우리가 행사장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뭡니까?”
“혹시 누가 알아차리기라도 했습니까?”
“아닙니다. 도주로 확보가 어렵습니다. 황제를 죽인다고 해도 근위대를 완전히 따돌리기란 불가능해서….”
놀라운 말이었다. 김우태가 깜짝 놀라 말했다.
“황제를 죽인다는데?”
도화지도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될까요?”
“모르겠어. 일단 더 들어보자.”
사내들이 말했다.
“거사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우리는 대륙을 위해 나서는 겁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참수된다고 해도 후손들이 영웅적인 일을 알아줄 겁니다.”
“그렇습니다. 흑마법이 완성되면 그때는 누구도 그자를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겉으론 이종족을 규합해서 전쟁에 쓰려고 한다지만 그의 진정한 목적은 영생에 있어요! 그 괴물이 탄생하기 전에 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까 용병에게서 들었던 흑마법사와 이 사내들이 말하는 것이 관련이 있었다.
“형제들도 거사 전까지 무조건 몸을 사리라고 하고 혹여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자취를 감추라 전하세요.”
“우리야 그날까지 여기 있을 것이니 괜찮지만 외부에서 다니는 형제들이 걱정입니다.”
이들은 황제를 암살할 생각이었다. 한두 시간 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이상 특별한 얘긴 없었다.
“반역인가? 이런 걸 뭐라고 부르지?”
“역모요?”
두 사람의 말에 내가 말했다.
“뭐든 이게 성공할지 아닐진 우린 알 수 없어요. 지금은 그 흑마법사부터 찾아봐야겠는데요?”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사내 하나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를 만나 말했다.
“형제들에게 알리시오. 그날까지 최대한 숨어지내라고.”
“알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사내들이 떠나자 우리도 성으로 걸어갔다. 날이 저물고 있어서 광장도 아까보다는 한산했다.
“그러니까 미친 황제의 만행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암살을 꾀하는 무리가 있고 황제는 이종족 포로를 이용해서 어떤 마법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그 마법이 성공하면 불사의 몸, 그런 걸 얻게 된다는 건가? 내가 잘 정리한 거 맞아?”
김우태의 말에 내가 피식 웃었다.
“아직은 알 수 없어요. 누구 말이 맞는지는. 그 흑마법사를 찾으면 알게 되겠죠.”
“연금술사도!”
그의 말에 도화지가 놀라서 물었다.
“연금술사가 있어요? 그…막…철을 금으로 바꾸고 그런 거요?”
“아마도?”
“오아! 저 연금술사 만나야 해요! 보조직업 연마하려면 꼭이요!”
“흐흐, 나도 어떻게 금을 만드는지 보고 싶거든. 같이 찾아보자. 그것만 배우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고!”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지 않나? 오크 광산에서 뭐만 갖다 팔아도 다 돈일 건데.
아무튼 성이 보였다. 제국답게 웅장하고 멋있었지만 묘하게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가 몇 가지 정보를 얻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흑마법사가 어디에 있는지 찾으면 더 선명해질 것 같았다.
“대놓고 있으려나?”
김우태의 말에 내가 저쪽 창문을 보았다.
“마법사가 백 명이나 모였었다고 하니까 협소한 곳은 아닐 거에요. 불사? 영생? 그런 엄청난 마법을 준비하려면 필요한 것도 많을 거고.”
내 말에 도화지가 성문으로 가서 경비병 얼굴을 빤히 보았다.
“이것도 적응하니까 묘하게 재미있다!”
얼굴을 바짝 대도 경비병이 보질 못하니 우스운가 보다.
‘그러고 보면 이런 비슷한 효과의 드링크도 있었던 것 같은데?’
킁킁!
도화지가 코를 벌름댔다.
“맛있는 냄새!”
“저녁 준비하나 본대?”
굴뚝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우린 성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마법사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커다란 피라미드도 수색하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능숙하게 다녔는데 그러다가 연회장에 발을 디뎠다.
“황제다! 저기!”
도화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황제가 앉아 사람들과 식사 중이었다. 황제의 손에 들린 잔엔 핏빛처럼 빨간 포도주가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말했다.
“악몽의 바다를 건너서 새로운 땅에 진출하면 이제 그곳을 우리의 식민지로 삼아서 대대로 편히 부를 누릴 수 있을 거다. 나는 그걸 위해 내 인생을 걸었다. 우리 백성을 위해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없애고자!”
황제의 말에 신하들이 잔을 들며 흥분했다.
“그리될 것입니다!”
“백성들이 폐하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어야 할 텐데요!”
“에잉! 그 무식한 것들은 큰 뜻도 모르고 숨어서 욕이나 해대고 있으니!”
“무슨 욕을 한다는 거요? 백작?”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흡….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괴소문이 돌고 있어서…. 저도 우연히 들은지라.”
황제가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괴소문이 돌고 있소?”
백작이 곤란한 듯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얽히기 싫다는 듯 시선을 회피했다.
“백작을 탓하자는 게 아니니 시원하게 말해보시구려. 백성의 고충도 알아야 하는 것이 이 자리 아니오?”
“아, 네. 저…. 최근 성에 흑마법사들이 드나드는 것을 두고 흉흉한 말들이 오가는 것이….”
“아, 그거요? 하하! 마법에 흑과 백이 어디 있소? 그거야말로 참으로 무식한 소리군!”
황제가 껄껄 웃었다.
“사람 죽이는 곳에 쓰면 나쁜 칼이고 고기 자를 때 쓰면 좋은 칼이오? 그러면 우린 다 흑마법사 취급을 받아야겠구려? 백작도 전장에서 사람 꽤나 죽이지 않았소?”
황제의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풀어졌다. 괜한 소문으로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세상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걸 쓰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요!”
“맞습니다! 약간의 술은 약이 되고 과하면 독이 되는 것처럼, 뭐든 쓰기 나름이지 않겠습니까?”
“무지한 백성들은 땅만 파먹고 사느라 그렇습니다. 그들이 어찌 하늘의 의중을 알겠습니까.”
이야기를 듣던 김우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 한번 잘하네? 이러니까 저 자리까지 왔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흑마법사’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역사적 이유나 경험을 무시하고 있기도 했다.
‘세상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면 참 좋겠지만….’
살다 보면 절대 악도 있다. 하층의 몬스터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그런 악인들은 존재했다.
황제가 말했다.
“이번 전쟁만 잘 이겨내면 민심도 진정될 거요. 내가 출정식 때도 다시 말하겠지만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했던 대업을 목전에 두고 있소. 대륙이 하나가 될 것이며 우리 제국 발아래 모든 종족이 머리를 조아릴 것이오.”
“그럴 것입니다!”
“제국의 걸음에 빛을!”
“광희를!”
“영광을!”
연회는 서서히 마무리되고 사람들이 조금씩 취해갈 때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소. 천천히들 드시구려.”
황제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었다. 가끔 포도주만 들이켰는데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도화지가 말했다.
“따라가자!”
황제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우리도 급히 뛰었다. 황제는 복도를 성큼성큼 걸으며 초조한 표정으로 속도를 냈다.
“똥 마렵나?”
김우태의 말에 도화지가 깔깔 웃었다.
“뭐에요! 갑자기! 분위기 깨게!”
“그렇잖아.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데?”
김우태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황제의 얼굴에서 좀 더 다른 것을 읽었다. 그건 마치….
‘중독자의 얼굴이야.’
생리현상이 다급해서가 아니었다. 황제의 목덜미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기온이 그리 높지도 않았고 앉아서 술 마시던 사람치곤 이상했다.
“우와…! 뭐야? 방금? 그림을 민 건가?”
골목 끝에서 황제가 우리 키보다 큰 그림을 만졌다. 그러더니 뒤로 공간이 나타났다. 고대의 성엔 이런 비밀공간이 많았다고 하더니 정말이지 감쪽같았다.
“흐흐흐! 또 비밀통로다!”
도화지가 재미있다는 듯 황제의 뒤로 붙었다. 그림이 다시 본래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우리도 서둘렀다.
황제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빛 한점 들지 않았는데도 횃불도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괴기스러웠다.
‘어떻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저렇게 당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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