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229화 (229/277)

#229화

“와… 이거 진짜 나쁜 자식이네?”

도화지가 말했다. 황제는 우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엘프의 턱을 잡고 잔인하게 웃었다.

“뭐,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야. 본래 우리 역사에서도 흑인을 노예로 부렸잖아.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같은 인간을 그렇게 했었는데 오크나 엘프는 더 쉽겠지.”

김우태의 말도 맞다. 우리 역시 오크를 사냥하며 포인트를 벌기도 했었다. 그런데 황제는 어딘가 뒤틀려 있었고 겉으로 봐도 집착이 느껴졌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 고문을 위한 도구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닦은 흔적이 있지만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많았다. 무엇보다 저 끝 벽 철창 안엔 잡혀 온 이종족이 두려움에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본 장면 같은데.’

생각났다. 광산에서 드워프를 구출할 때가 딱 이런 분위기였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도화지가 소리치자 김우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열 받지 말라고. 과거에 일어난 일인 것 같으니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없고.”

김우태가 황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딱 봐도 쿤드라의 보물인지 뭔지 하던 해골, 이 사람 머리인 것 같은데?”

자신의 머리에 직접 마법을 쓰려는 사내. 그게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까지 전해졌고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다.

“여기에 그 비밀이라는 게 있겠네요. 아직 마법이 완성된 게 아니니까 그 과정을 보면 알겠죠. 뭔가 있을 거예요.”

황제가 엘프를 밀치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엘프가 처연한 표정으로 어린 오크에게 다가갔다.

크르르르르.

오크는 경계했지만 엘프는 어린 오크를 품에 안았다.

“미안해. 나도 이러려던 건 아니었어.”

맹수는 다쳐도 맹수다. 오크는 엘프의 팔을 콱! 깨물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품에서 숨을 내쉬었다.

“들어가자. 그가 오면 또 너를 괴롭힐 거야.”

오크를 데리고 철창으로 걸어가는 엘프를 보면서 김우태가 말했다.

“밖에 가서 여기가 어딘지 조사해보자고.”

마법이 당장 구현될 것 같진 않아서 우린 이 제국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다. 작은 꼬투리가 비밀을 풀 열쇠가 될 수도 있었기에 모든 걸 봐둬야 했다.

“사람 엄청 많네! 명동 저리가라인데?”

성에서 나와 번화가로 진입하자 수많은 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먹거리와 생필품을 거래하고 있고 주변으론 빼곡하게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맛있겠다!”

도화지가 군침을 흘렸지만 우린 음식을 집을 수 없었다. 전엔 저들이 유령이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있다 보니까 우리가 유령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동감은 진짜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 그 얼굴에서 흐르는 땀방울, 힐끗 흘기는 눈동자까지 모든 것을 다 만들어낼 순 없었을 것이다.

“저쪽으로 가보자! 분수가 있나 봐!”

도화지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뛰어갔다.

“야! 천천히 가! 언제 이 사람들이 돌변할지 모른다고!”

갑자기 우릴 공격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언제나 해야 하기에 흩어지면 안 된다.

도화지를 따라잡으며 주위를 보았다. 광장이었다. 크기가 얼마나 큰지 중앙의 분수를 중심으로 수만 명은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많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있거나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팔고 있었다.

“우리도 좀 쉬자.”

분수를 등지고 앉아 김우태가 물을 꺼냈다.

“너부터 마셔.”

물을 흘려주자 아리가 잘도 받아먹었다. 범이도 목이 말랐는지 옆에서 대기했다.

저쪽으로 뛰어갔던 도화지가 다가와서 말했다.

“이 제국 이름은 바할이라는데? 아까 그 황제의 이름도 쿤드라가 아니고. 어떻게 된 걸까?”

“황제 이름이 뭔데요?”

“엄청 길었는데 어쨌든 쿤드라는 아니야.”

“음. 사후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으니까 정보를 더 모아보죠. 어렵진 않을 것 같네요. 여기에만 있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sns나 tv가 없으니 이런 곳에서 정보가 오간다. 대화를 나누다가도 누가 오면 쉬쉬하게 되지만 우린 저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얼마든지 귀 기울일 수 있었다.

“나는 저쪽으로 가볼게. 어두워지기 전까지 최대한 해보자.”

김우태가 일어나서 5시 방향으로 걸어가자 나도 9시 쪽으로 걸어갔다. 이 광장은 소통의 창구였다. 누군가와 만나기로 하면 ‘광장으로 와!’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올 것 같았다. 젊은 남자 둘이서 저쪽의 여성들을 보며 볼을 붉히고 있다. 사랑적령기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광장을 이용하고 중년인들은 광장 주변에서 술을 마셨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경비대에 정식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던데?”

“후…. 나도 들었네. 이 지긋지긋한 용병 생활도 이제 끝나는 건가?”

“살아 있을 때 얘기지. 큭큭. 이번 출정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다고. 몇 년이 걸릴지도 몰라.”

“바다를 건너다가 물고기 밥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 해협은 악몽의 바다로 유명하다고. 숙련된 어부도 미쳐서 바다에 뛰어내린다고 하지 않나?”

“그건 인어 때문이라고 했어.”

“인어가 실존하나?”

“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만, 이유 없는 전설이 있겠나?”

덩치도 우람하고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는 사내들은 용병인 것 같았다.

“이미 넓은 영토를 다 차지했는데 왜 악몽의 바다를 건너려는지 모르겠군.”

“우리야 기회가 왔으니 잡아야지. 높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관있나?”

“자네는 정착하고 싶은 모양이군.”

“언제까지 떠돌이로 살 거야? 자식도 보고 그래야지. 정식 경비대가 되면 여자들이 줄을 선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떠돌이 용병의 삶은 가혹했다. 사내들의 눈에 어렴풋이 희망이 그려졌다. 누군가는 도시에서의 삶을, 누군가는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생을 떠올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 사내가 상체를 숙이며 목소릴 낮췄다.

“그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사내들도 머리를 모았다.

“황제가 이종족을 잡아먹고 있다던데.”

“허어, 말조심하게! 괜한 소리 했다간 붙들려가서 목이 잘린다고!”

“나도 들은 거라 정확하진 않지만, 성에서는 쉬쉬하는 것 같아. 그렇다는 건 사실이라는 게 아니겠나?”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영생을 꿈꾼다고 들었어.”

“영생?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라도 만들겠다는 거야?”

“일전에 제국의 모든 마법사가 소집된 적이 있었잖아? 그게 전쟁 때문이 아니었다는 얘기도 있어.”

“오크나 드워프, 엘프 같은 것들을 잡아먹었다고?”

“그렇다니까?”

“세상에…. 아무리 영생이 좋아도 그건 역겹지 않나?”

“나중엔 우리까지 잡아먹겠네?”

“설마….”

용병들까지 이런 얘길 한다는 건 이미 소문이 광장 전체에 퍼져나간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성에 들어갔던 마법사 중에서 몇 놈은 나도 아는 흑마법사야. 왜, 2년 전에 우리와 같은 조에 편성되었던 놈들 있잔나?”

“아! 그 기분 나쁜 놈들!”

“맞아, 그놈들이라고 했어.”

“보름달 뜬 밤에 닭 피로 목욕하던 놈들이었지?”

“그때 내가 오줌싸러 나갔다가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었나? 자네들한테도 얘기했었잖아.”

“그랬지. 세상에 그런 놈들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으니까.”

“그런 놈들까지 불러들였다는 걸 보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흑마법사라…. 이건 중요한 정보였다. 그놈들이 성 어딘가에 있다면 찾아가 봐야겠다.

“아무튼 우리도 몸 사려가면서 하자고. 경비대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아, 자네들. 시장에서 소가죽 파는 여자 본 적 있나?”

“오! 나도 어제 그 여자 봤어! 남쪽 왕국에서 왔다지?”

좀 더 들었지만, 용병들은 이제 시답잖은 음담패설로 넘어가고 있었다.

저쪽을 바라보자 김우태도 마침 나를 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분수에서 김우태와 합류해서 말했다.

“흑마법사라는 놈들이 성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나는 연금술에 대해 들었어.”

4년 전 동쪽 왕국을 침략해서 점령했는데 그곳에 수준 높은 연금술사들이 있었다고 했다.

“연금술이요?”

“재능마켓도 있는데 뭐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황제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 확실해. 그게 쿤드라의 비밀로 이어질 것 같은 감이 온다. 감이 와.”

“보면 알게 되겠죠. 근데 누나는요?”

“어? 아까 저쪽으로 갔는데?”

도화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다려보면 오지 않을까?”

“그러다가 안 오면요?”

“찾아보자.”

어떤 일이 갑자기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우태도 표정을 굳혔다.

“여기야. 아까 여기에 서 있는 것 까진 봤어.”

“저 골목으로 간 걸까요?”

광장을 중심으로 수많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광장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골목은 한산해서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김우태가 말을 줄이며 걸어갔다. 이제 도화지는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라서 그녀에게 변고라도 생기면 끔찍할 것 같았다.

“이쪽으로 이어지네요. 민가에 들어갔을 것 같진 않고….”

완만한 오르막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길옆으로 선 집들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었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연결된 줄엔 옷이 널려서 바람에 습기를 말리고 있었다.

“귀신이 춤추는 것 같네.”

김우태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골목 안쪽은 스산했다. 분명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일 텐데 악취와 더불어 누가 죽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도화지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좀 더 빨리 가요.”

불길한 생각이 들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범아, 혹시 누나, 냄새나?”

범이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저기! 문이 열려 있어!”

도화지가 꼭 그리 들어갔으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다 수색해봐야 했다.

“넌 직진해! 내가 갔다 올게!”

“네!”

김우태가 문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나는 곧장 앞으로 뛰었다.

‘여기까지 왔다면 그 이유가 있었을 건데?’

광장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무언가를 따라왔을 가능성이 커. 우리에게 알릴 틈도 없었다는 거겠지.’

잡혀 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구도 그녀를 만질 수 없을 테니까.

“…저긴 없었어!”

뒤에서 김우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범이와 아리도 열심히 뛰었다.

‘도화지한테는 가이도 있어. 여차하면 도왔을 거야.’

도화지가 위기에 처하면 가이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 어딘가에서 반드시 소란이 났을 거다.

‘멀리 가진 않았을 텐데.’

뛰는 심장을 억누르면서 골목 끝까지 뛰었다. 그러자 가슴이 탁 트이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광장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른 골목들로 이어지는 교차점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황당한 것을 보게 되었는데,

“누나!”

애타게 찾던 도화지가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우웅?”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돌아보는 그녀를 보면서 내가 흠칫했다. 뒤따라온 김우태도 버럭 외쳤다.

“뭐하는 거야!”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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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839-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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