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울렁!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이 들었다. 그러더니 주변이 확! 바뀌었다.
“어엇?”
“혹시 저번처럼 그런 건가?”
주변 풍경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도 그걸 보면서 짐작되는 게 있었는데 몇 번 이런 경험을 해봤었지 않나?
‘과거의 어느 지점인가?’
재능마켓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과거의 일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든 이번 미션 역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쿤드라의 비밀을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와… 멋진데?”
“그러게! 아까랑은 천지차이야!”
홀은 무도회장처럼 화려했다. 김우태와 도화지가 당장 손잡고 춤을 추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
“뭐 하는 거예요?”
설마 진짜 그러고 있을 줄이야.
“아, 왠지 이래야 할 것 같아서. 하하!”
도화지가 김우태의 손을 뿌리쳤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바보 오빠야!”
김우태가 넉살 좋게 웃으며 저쪽을 보았다.
“그런데 왜 사람이 없지?”
“기다려보죠. 유령처럼 뭐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
기다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덜컥!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이 들어왔다.
‘사람?’
인간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하층에선 인간을 보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멀쩡한 저들을 보니까 기분이 묘했다.
‘꽤 발전한 문명인 것 같은데?’
그저 성 하나 중심에 두고 도시가 어설프게 형성된 그런 게 아니라 의복만 봐도 격식과 고급스러움이 보였다.
“공작님.”
남자 넷과 여자 둘이 원을 그리며 서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의 병세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병세라는 말에서 여러 사람의 얼굴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 광증을 막지 못하면 종국엔 우리마저 노예로 만들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타 종족이지만 벌써 죽어 나간 게 몇입니까? 소름 끼쳐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겠습니다.”
“저도 어떻게든 백성들에겐 소문이 퍼지지 않게 막고 있지만 이러다가는 둑이 터져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호기심 있게 듣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우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전에도 이러다가 갑자기 우릴 ‘봤다.’
“오늘은 꼭 말씀을 드려봅시다. 여차하면 제가 사퇴하는 일이 있더라도 강하게 뜻을 보여야겠습니다.”
“좋습니다! 갑시다! 저도 돕겠습니다!”
“저도요!”
왕국의 중역을 담당하는 여섯 사람은 흥분해서 홀을 빠져나갔다.
‘우리도 가자!’
김우태가 손짓하자 나와 도화지도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와, 샹들리에가 저렇게 크고 높았나?’
대단히 번성한 나라였다. 폐하라는 뜻은 보통 왕국이 아닌 제국에 쓰니까. 천장엔 그림이 빼곡하게 그려있었는데 저런 작업은 수십 년씩 걸리지 않나? 그만큼 돈도 들 거고.
‘우리가 전에 갔던 그 왕국은 아니야.’
과거엔 하층에도 이렇게 인간이 번성했던 적이 있었나?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지? 오크가 주인처럼 날뛰지 않나?
‘세계수 때문일 수도 있고…. 복구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어쩌면 그 피라미드가 내려오면서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든 호기심이 생겼다.
그그그그그긍.
커다란 문이 열렸다. 보초를 서선 경비병들이 여섯 사람을 보더니 살짝 긴장했다.
금발의 중년 사내가 물었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시냐?”
“…별실에 계십니다.”
“하아…. 그렇구나. 알겠나. 우리나 나올 때까지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해라.”
“알겠습니다. 후작님.”
후작이 사람들을 보며 긴장한 표정으로 끄덕거렸다. 기세 좋게 왔지만, 막상 폐하를 앞에 두니 가슴이 뛰었다.
나는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그가 든 창과 갑옷도 매우 정교하고 값비싸 보였다.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안 됩니다.”
후작의 말에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고 걸었다.
“….”
“….”
뚜벅뚜벅 걸어서 대전으로 들어갔는데 황제의 의자가 비어있었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오른쪽을 바라보았는데 마침 한 남자가 그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50대의 나이에 9개의 나라를 종속하여 대륙 최초의 제국을 일으킨 남자.
“폐하를 뵈옵니다.”
“폐하!”
황제는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단체로 무슨 일인가? 무서운걸?”
그런데 황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팔을 들자 손엔 쇠사슬의 끝이 잡혀 있었고 뒤쪽으로 사슬이 이어지더니 한 생명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어린 오크였다.
사람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또 저러고 있구나.’
‘이제는 습관처럼….’
‘말려야 해. 이건 아니다.’
전쟁을 할 때는 적을 죽일 수도 있다. 싸움을 하면 당연히 벌어지는 불상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평시에도 포로로 잡은 이종족을 저렇게 다룬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어린 오크는 이미 숱하게 맞았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마나 겁을 먹으면 저렇게 될 수 있는지 보면서도 놀라웠다. 오크는 짐승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포악한 오크가 저리도 온순하다니!
황제가 태연하게 걸어서 의자에 앉았다. 그가 걸을 때마다 오크가 쇠사슬에 목이 묶여 질질 끌려왔다.
황제가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기에 공작까지 오셨소? 출정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분간 얼굴 보기가 힘들 줄 알았는데? 준비는 잘 돼 가오?”
황제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남자이자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였다. 검술과 마법에도 능통했지만, 무엇보다 천부적인 전투 감각이 대단했다. 그가 참전하면 지는 판도 엎어버리니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9개의 왕국을 얻어냈지만 이종족의 마을까지 합치면 이십여 개가 넘었다.
그 과정에서 포로 수만을 잡았는데 그중에서 수천이 죽었다. 저 한 남자의 취미 때문에 말이다.
공작이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황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두려웠지만 할 말은 해야만 했다.
“폐하께서 개인적으로 하시는 일을 멈추어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황제가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사슬을 들었다.
“이거 말인가?”
“그렇습니다.”
“답답하군. 어찌 내 뜻을 이해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단 말이냐.”
황제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편견을 버리면 우린 더 위대해질 수 있다. 오크를 가축으로 길들일 수 있으면 우리가 전쟁에 나갈 필요도 없고 이놈들은 우리보다 성장이 빠르며 새끼도 여럿 낳는다.”
“하지만…!”
“왜? 이놈들이 두 발로 걸어서?”
“오크는 가축이 아닙니다. 몬스터입니다.”
후작도 거들었다. 하지만 황제는 단호했다.
“소, 닭, 돼지, 개와 무엇이 다른데?”
공작이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며 황제의 말을 받았다.
“오크만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드워프와 엘프 역시 그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소, 닭, 돼지, 개와 무엇이 다른데?”
노려보는 눈빛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저 사슬이 오크가 아닌 자신들의 목을 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릅니다.”
공작이 으금니를 깨물며 말하자 황제가 느긋하게 등을 의자에 기댔다.
“뭐가 다르지? 설명해봐.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소, 닭, 돼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인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 우릴 올라서려 할 것입니다.”
“그것에 관해서라면 마법으로 금제할 수 있다. 연구가 거의 끝나가고 있어. 우리 제국의 모든 마법을 동원해서 강력한 아이템을 만들 거다. 그것이 있다면 절대 이놈들은 우릴 공격할 수 없어.”
후작이 놀랐다.
“그런 것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
황제가 큭큭, 웃더니 자신의 앞머릴 들어 보였다. 그의 이마 위쪽으로 희미한 문양이 보였다. 이전엔 없던 것이었다.
“내 안에 직접 넣고 있다. 내가 있으면 절대 이놈들이 거역하지 못하도록 가장 완벽한 통제마법을 구축하고 있지.”
“하지만 폐하께서 안 계시면 아무 의미 없지 않습니까?”
“내가 죽어도 마법은 유지될 것이다. 정신이 아닌 육체에 깃드는 마법이니까. 그리고 착각하지 마라.”
황제가 맹수처럼 으르렁댔다.
“제국은 내 것이다. 내가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무엇보다 너희는 지금 내 일에 반대하고 있는데 마법이 무슨 상관이지?”
불과 20년 만에 제국을 만든 남자. 그걸 곁에서 보았기에 반박할 수 없다.
“십 년, 아니 오 년만 지나도 너희는 내게 고마워할 거다. 우리의 형제가, 가족이,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지 않아도 되면 모든 백성이 내 뜻을 알아줄 것이고.”
분명 취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통제력에 조금이라도 금이 가는 날에는? 오크나 이종족을 길러서 전쟁을 대신하게 하려면 그 세력을 엄청나게 키워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물러가라. 마법이 곧 완성된다. 그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말에 공작은 머리를 저었다.
“안 됩니다.”
“안된다?”
“그렇습니다. 이 일은 너무도 위험합니다. 비단 통제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타종족을 가축으로 부리기 시작하면 그들 역시 우리를 그리할 수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흥! 그것들은 제국을 만들 수 없다. 잘 알지 않느냐?”
“탄압당하면 연합할 순 있을 겁니다.”
“그 전에 우리가 부수면 된다.”
황제가 사슬을 다시 들었다. 어린 오크가 목이 불편한지 신음했다.
“이것들은 가축이다. 짐승이며 동물이다. 팔과 다리가 달렸다고 안타까워하지 마라. 대대로 이놈들은 우리 조상의 피와 살을 날것으로 씹어 삼켰다.”
“복수하려는 것입니까?”
“웃기는구나. 고작 그런 감정 때문에 내가 이런다고 생각하나?”
황제가 일어났다.
“나는 대륙을 통일할 거다.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모든 것을 없앨 것이며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모두 동원할 거다. 이것도 그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전쟁터에선 그렇게 무서웠던 오크였지만 저렇게 보니 가련했다. 하지만 여섯 사람은 황제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 마법까지 자신의 몸에 직접 새기고 있다는데 멈추지 않겠지.
“바다만 건너면 된다. 그곳엔 새로운 세상이 있을 거야. 그만큼 위험도 따르겠지. 그때 이놈들이 우리의 손발이 되어 줄 거다. 돌아가서 출정을 준비하라. 이럴 틈조차 없을 텐데?”
끄응….
앓는 소릴 내며 사람들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
황제는 그들이 나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자 혀를 찼다.
“못난 놈들…. 쯧.”
그러더니 일어나서 다시 오른쪽으로 오크를 끌고 갔다.
‘따라가자!’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눈빛도 이상해!’
우린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황제를 따라갔는데 커튼을 젖히며 들어간 황제를 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귀가 뾰족하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그럴 리가. 그놈들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모를 거다. 내일을 보는 사람은 드무니까.”
황제가 엘프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가 작게 어깨를 떨었다. 완벽한 종속이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엘프는… 인간의 친구입니까?”
“하아…. 또 그 소리인가?”
황제가 쇠사슬을 들며 말했다. 오크가 버둥거리며 들렸다.
“선택하라 했다. 이렇게 될 것인지, 아니면….”
황제가 다른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839-322-6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대한 편집권은 저자와의 계약에 의해 ㈜알에스미디어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 수정, 배포 행위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