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이운명은 이 황당한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려서부터 애들 괴롭히고 산 세월이 꽤 됐지만 그래봐야 그도 고등학생이었고 도민준이라는 녀석에 대한 소문은 심상치가 않았다.
‘박치가 한방에 당했다던데.’
애들 앞에선 큰소리쳤지만 묘하게 긴장되니 미칠 지경이었다.
“운명아, 걔 지금 신도림이라는데? 가서 확 재껴버리자!”
“그래! 지금 출발하면 10분이면 가!”
“우리 애들이 다 당하고 있다잖아!”
그게 문제다. 소위 노는 애들이 한 녀석에게 줄줄이 당하고 있었다. 뭔 깡인지는 모르겠는데 도민준이란 놈은 번화가와 학원가를 돌면서 자신을 찾고 있었다.
“…기다려봐.”
그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면서도 괜찮을 수 있었던 것은 조심성 때문이었다. 세상에 얼마나 싸움 잘하는 놈이 많던가? 몇 년씩 권투나 씨름 한 녀석들을 일반인이 이기기엔 불가능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아, 오셨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형님! 여깁니다!”
건들거리며 골목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은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이운명의 2년 선배이자 살아있는 전설이었고 신림동 일대의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엄청난 분들이었다.
“뭔데? 갑자기?”
“헤헤, 겸사겸사 형님들 뵙고 술이나 한 잔 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술 마시자고 불렀냐?”
“미쳤어?”
“그럴 리가요! 하하! 제가 예쁜 애들 골라놨습니다. 이건 이달… 납입금입니다.”
두툼한 봉투를 내밀자 두 사람의 표정이 바뀌었다.
“야, 납입금이 뭐냐.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그러게, 우리가 강제로 걷는 것도 아니고 네가 좋아서 주는 거잖아.”
두 사람이 슬쩍 봉투를 품에 넣자 이운명이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럼요! 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나중에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저도 이제 1년 남았잖습니까?”
“흐흐, 지금처럼만 해. 그러면 할 일 많을 거다.”
“참, 잘한단 말이야. 어디냐? 가자.”
“제우스에서 뵙겠습니다! 형님!”
“아, 거기.”
이운명이 눈짓하자 아이들 중 하나가 오토바이를 냉큼 가져왔다.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형님!”
“그려.”
고등학생이지만 이미 이 일대에서 이운명의 패거리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부아아아아아앙!
머플러를 개조한 시끄러운 오토바이들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눈총을 줬지만, 누구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괜히 휘말리기 싫은 것이다.
이운명이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핸드폰을 만졌다.
-그놈, 지금 어디 있다고?
-짬짬 오락실 앞에!
-알았어! 바로 간다! 잡아둬!
요즘 학교에 안 가도 되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래서 봉천동 자취방에서 신도림을 오가며 이운명은 거칠 것 없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훼방꾼이 나타난 것이다.
‘아무리 잘 치는 놈이면 뭐해?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도민준이란 놈이 1학년 대가리로 불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일진들과 싸운 적은 별로 없었지만 알아서 긴단다. 이건 그 녀석이 보통이 아니란 뜻이었다.
‘나는 절대 실수하지 않아.’
이운명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굶는 일이 많았는데 어느 날 깨달았다. 없으면 빼앗으면 된다. 그렇게 해도 세상은 나를 처벌할 수 없었다.
‘딱 기다려라. 오늘 죽여줄 테니까.’
애들 싸움으로 끝나면 기어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 ‘조폭’을 만나면 어떤 애라도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은 이겨도 지는 거다.
‘그동안 내가 갖다 바친 돈이 이럴 때 쓰라고 그런 거라고.’
저 앞에 가는 오토바이를 보며 이운명은 씨익 웃었다.
-끼이이이이이익!
오토바이들이 멈췄다.
“야, 뭐해? 저기 아니잖아.”
“아, 형님! 잠깐만요! 우리 애들이 맞고 있답니다.”
“어? 누가 맞는다고?”
“진우랑 몇몇 애들이 당했다는데요.”
“하? 이 동네에서 너네를 누가 건드리는데?”
“바로 저기라니까 가보면 알 것 같습니다.”
“미쳤네. 알았어. 가자.”
이운명의 오토바이가 오락실 앞에 섰다.
‘…저 녀석이 도민준?’
오락실 앞에 떡하니 앉아있는 민준을 발견한 이운명이 아이들과 함께 그쪽으로 걸어갔다.
“야. 니가 도민준이냐?”
민준이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왔네요. 선배.”
“하…. 미친 새끼네. 이거.”
10명이 넘는 사람을 보고도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이건 정신이 나갔거나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증거였다.
“따라와라.”
지나는 사람이 많았기에 이운명이 말했다. 도망치지 못하게 아이들이 민준을 둘러쌌다.
이때 이운명은 민준의 눈을 보았다.
‘…웃어?’
.
.
.
“오빠.”
“응?”
“민준인요?”
“몰라? 일 보고 온다는데?”
“무슨 일이요?”
“모른다니까. 걱정되면 전화해보든가.”
“움….”
마트에서 장을 본 두 사람이 재능마켓으로 가고 있었다. 어르신과 드워프들을 위해서 최근엔 계속해서 식료품을 나르고 있었는데 여기선 평범한 것도 저쪽으로 넘어가면 매우 귀한 것이 되니 이번엔 뭐로 놀라게 할까? 재미도 있었다.
“오빠.”
“응?”
“여자친구 아직도 없죠?”
“있는데?”
“거짓말!”
“있다니까?”
“누구요?”
“채린!”
“…스토커예요?”
“아니거든! 내가 지금은 이 저주 때문에 그런데 다 벗어나면 당당하게 고백할 거라고!”
“고백도 폭력인 거 알아요?”
“…누, 누가 그딴 소릴 해? 사나이 순정인데!”
“아휴. 오빠는 가만 보면 여자를 너무 모른다니까요.”
“너보단 잘 알거든?”
“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왜 시비야?”
“그게 아니라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 드워프들이요. 그냥 할아버지랑 같이 계속 살게 맺어주는 게 어떨까 해서요.”
“왜?”
“서로 외롭잖아요!”
“그런가?”
“이렇게 무심하다니까!”
“뭐…살다 보면 알아서 자연스럽게 되지 않겠냐? 굳이 나설 필욘 없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 못 보셨어요? 아, 그리고 제가 들었는데 드워프는 엄청나게 오래 살아서 할아버지 나이도 별 게 아니래요.”
“근데 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야 그렇게 생겼으니까…. 아무튼! 보면 그분도 숙맥이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피해 다닌다고요. 그걸 아줌마가 오해해서 빨리 독립하려고 하는 거고요!”
“그랬나?”
“그렇다니까요?”
거창하게 사랑의 전도사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요즘 묘하게 흐르는 기류 때문에 도화지는 불편했다. 그건 아마도 서로 이성을 대하는 게 어려워서일 것이다.
“괜히 더 어색해지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잘해야죠.”
“음…. 어떻게?”
“그걸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가 말한 거예요.”
“여행이라도 보내줄까?”
“몬스터한테 죽으라고요?”
“…그러면 술 사갈까? 남녀 관계에서 술이면 다 되지 않나?”
“으으으음…. 저는 잘 모르겠지만 와인 정도면 좋을 것 같은데.”
“야, 와인은 취하지도 않아. 소주를 사 가야지!”
끼이이이익!
“기다려봐. 금방 사 올게.”
급히 차를 멈추고 편의점으로 향하는 김우태를 보며 도화지가 웃었다. 처음엔 오크나 다를 게 없는 오빠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착한 사람도 없었다. 외모만 보면 무섭지만, 그 속은 너무도 순했다.
김우태를 기다리다가 도화지가 핸드폰을 들었다.
‘근데 얘는 진짜 뭐 하는 거야?’
민준에게 전활 걸었다.
“야! 도민준! 오늘 안 올 거야?”
-이따가 가요.
“어딘데?”
-학원 근처요.
“아…. 공부했어?”
-아니에요. 곧 끝나요.
오늘 소집일이었다고 하더니 친구들하고 같이 있는 건가?
“알았어! 먼저 가 있을게!”
-네!
목소릴 들으니까 인심이 됐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었다. 특히 퀸을 만난 이후로 계속 걱정이 는 도화지였다.
잠시 후 김우태가 차에 탔다.
“허억, 뭘 그렇게 많이 샀어요?”
“뭘 좋아할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샀어. 막걸리도 있다! 하하하!”
“잘했네요.”
도화지가 칭찬하자 김우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넌 안 줘.”
“마실 생각도 없었거든요?”
“그러냐.”
능글맞게 웃으며 김우태가 다시 차를 몰았다.
“아, 민준이 곧 온대요.”
“그래? 어디라는데?”
“학원 근처라던가?”
“하여간 열심히 산다니까.”
두 사람은 그렇게 민준에 대한 걱정을 지워버렸다.
.
.
.
“으으으으….”
“아, 아파….”
“크흐흐흑! 이 자식….”
골목, 아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안 끝났다. 덩치 큰 두 녀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저 이운명인지 뭔지 하는 놈도 멀쩡했다.
내가 손에 깍지를 끼고 관절을 풀며 말했다.
“대단하네요. 다 쓰러질 때까지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선배가 대장 아니었어요?”
“뭐 이런 자식이….”
이운명은 나를 노려보다가 뒤로 슬쩍 물러났다. 다른 두 덩치의 나이는 고등학생이라고 보기엔 더 많아 보였는데 놈들은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 운동 좀 했냐?”
덩치 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씨름이라도 한 걸까? 대단한 거구였다.
“좀 친다고 아주 세상 무서운 줄 몰라요.”
목을 우득, 우드득! 꺾으며 다가오는 덩치를 보면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날파리도 아니고 이렇게 큰 똥파리까지 꼬이다니.
덩치가 자세를 낮췄다.
‘안정적인데?’
저렇게 상체를 숙이면 이쪽에서 타격하기 어렵다. 급소는 모두 감추고 들어오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인들에게나 그렇다는 거다.
나?
퍼억-!
“허어어어억-!”
그냥 걷어차면 된다. 그러면 더 커다란 덩치가 데굴데굴 뒤로 나뒹군다.
“이, 이럴 수가….”
가드를 하고 무게 중심을 낮췄는데도 한 방에 날아간 동료를 보면서 다른 덩치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 와중에 덩치가 이운명과 부딪혔다.
“뭐 하세요? 형…!”
“이 시펄놈아, 저런 자식이 있다곤 말 안 했잖아!”
“저도 몰랐다고요!”
아니지, 너는 알았잖아. 내가 그렇게 찾으러 다녔는데.
“선배.”
내가 걸어가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아직 안 끝났잖아요.”
“나, 나한테 왜 이러는데?”
“애들 돈 뺏은 거 다 어디 있어요?”
“썼어! 하나도 없다고!”
“그러면 앞으로 벌어서 갚아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뭘 어쩔 건데! 죽이기라도 할 거냐?”
“차라리 그게 좋을지도 모를걸요?”
내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이운명이 소름 끼쳤는지 덜덜 떨었다. 이 많은 수가 무기까지 들고 달려들었는데 나는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당연하다. 나는 목숨 걸고 싸우는 놈이다. 이런 애들 싸움에 져서 되겠나?
“…씨, 씨바….”
덩치가 계속 물러났다.
“형! 어떻게 좀 해봐요!”
“준범이가 한 방에 작살났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하라고!”
“그래도 형은 건달이잖아요!”
“아니야! 인마! 누가 건달이래! 난 그냥 심부름 정도만 한다고! 너, 다시는 나 부르지 마라! 알겠냐!”
덩치가 후다닥 골목을 나가버렸다. 동료 덩치도 챙기지 않는 비열한 녀석이었다.
“….”
“….”
이운명과 내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내가 밝게 웃었다.
“도망치면 아주아주 재미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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