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왕이시어….”
머릴 조아린 오크는 로브를 입고 있었다. 왕의 심기가 어지러우면 자신의 머리가 으깨질 것을 알기에 극도로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말해. 뭐가 문제야?”
커다란 의자에 앉은 오크는 짜증 난다는 듯 고기를 뜯고 있었는데 베어 문 절단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다른 오크에 비해 1.5배나 컸고 온몸에 상처도 가득했다.
“광산 한곳이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뭐한테 공격을 받아? 이제 우리에게 대항할 놈들은 거의 없을 텐데?”
“처음 놈이 공격한 게 열흘 전이었습니다. 그땐 노예로 잡은 놈들을 구출하려는 것인 줄 알고 그거려거니 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또 습격을 하더니 어젠 보낸 일꾼 중에서 절반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워낙 바쁘시기도 하시고 이런 작은 일에 기분 상하실까봐 제가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럼 계속 알아서 처리해.”
“…놈들을 막으려면 군대가 필요합니다.”
“그 정도라고?”
“전부는 아닙니다. 일부만 상주하게 해주신다면 놈들도 놀라서 달아날 것입니다.”
“어떤 광산인데?”
“철광석과 금이 매장된 곳입니다.”
“권한을 주지. 나가봐.”
“감사합니다!”
제사장 오크가 밖으로 나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쿤드라를 만날 때는 죽지 않는 것이 일 순위였다. 오크가 포악한 종족이라지만 쿤드라는 훨씬 더 두려운 존재였고 그것이 이 강대한 왕국을 유지하는 힘이었다.
그는 한참을 걸어 군대가 주둔한 곳으로 갔다.
이미 몇몇 오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소식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오크의 삶은 야생에 가깝지만, 왕국을 이룬 후부턴 인간들처럼 체계가 잡혀갔다. 특히 군대는 평시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출정해서 이길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지면? 실패는 용납하지 않았다.
“광산이 공격당하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적이 얼마나 됩니까?”
“괴수를 부리는 셋입니다.”
“괴수를 부린다라? 그러면 죽일 놈은 셋입니까?”
“그렇죠.”
“하, 고작 세 놈 때문에 군대를 쓴다고요?”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파견한 일꾼 중에서 이미 수천이 죽었습니다.”
“세 놈한테 수천이요?”
오크는 태생부터 강인한 육체를 지녔다. 전사로 성장하면 필요한 기술을 배워서 더 강해지긴 해도 타고난 근력과 체력은 멧돼지도 상회한다.
“놈들이 부리는 괴수가 문젭니다. 엄청나게 크고 빠릅니다.”
“괴수라…. 오랜만에 사냥 좀 해보겠군요.”
세상엔 수많은 괴수가 있었다. 땅속을 헤엄치는 자이언트 웜도 있었고 오우거나 뱀도 있다. 바다엔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괴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오크는 두려움이 없었다. 하나가 가서 안 되면 열이 가고 그래도 안 되면 수천이 달려들어 싸운다. 이건 오크의 호전적인 기질 문제도 있지만, 워낙 번식이 빨라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젊어서 그런지 겁이 없군.’
쿤드라 왕국 오크의 평균 수명은 10년이 채 안 된다. 그래서 10년을 넘기면 제사장 같은 중요한 직책에 오르는데 본랜 50년도 살 수 있지만 늙은 오크는 별로 없었다.
“방심하면 안 됩니다. 이미 수많은 일꾼이 당했어요. 초기엔 마법사도 있었는데 그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마법이라고 해봤자 우리 군대를 이길 순 없습니다.”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엔 그간의 승리 경험이 깔려 있었다. 오크의 번식과 성장은 이족보행하는 동물 중에서 최상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2살이면 전쟁터에 나가고 기본으로 형제가 20명씩은 된다. 전쟁이 없을 때는 몇 년이면 수십 배로 불어나는 인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전쟁을 이어가는 숙명을 지녔다. 그렇지 않으면? 오크들끼리 서로 잡아먹을 거다.
“일천을 빼 드리죠. 하지만 보급은 제사장님이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당연합니다.”
오크는 타 종족과 교류하지 않는다. 거래? 그런 번거로운 일을 왜 하나? 빼앗고 굴복시키면 되는데. 그래서인지 광산엔 금도 묻혀 있었지만 철광석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오크였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만약 일천으로 막지 못한다면 그때는….”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군단장의 말에 제사장은 든든했다.
“그러면 바로 보내주세요. 저도 보급을 보내겠습니다.”
“좋습니다.”
제사장은 다시 궁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다가 지도를 봤다.
“…이 광산을 잃어선 안 돼.”
쿤드라가 개발 중인 광산은 총 일곱 곳이 있었는데 철광석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은 ‘티르온’이었다. 전엔 피의 군주가 쓰던 것이었는데 그가 사라지자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
“하아….”
그가 의자에 앉아 고민했다.
‘대체 그놈들은 뭐지?’
인근 엘프와 드워프는 모두 점령했다. 다른 몬스터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았고 어쩔 수 없는 괴수들은 그냥 무시하면 된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놈들이 튀어나와서 광산 개발을 방해한 것이다. 처음엔 엘프인가? 했는데 생존자들의 얘길 들어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용병인가?’
그간 쿤드라가 할퀴고 간 마을이 수백 개에 달하니 악감정을 품은 놈들이 없을 수가 없다. 그놈들이 용병을 고용해서 우릴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괴수를 부릴 수 있는 용병이 있단 말은 들어보지 못했었다.
‘어쩌면….’
사라진 절대자들이 부리던 부하들일지도 모르겠다. 퀸이나 로드 밑에도 굉장한 놈들이 있었고 놈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오크들은 가축처럼 취급을 받았다. 심심하면 찾아와서 장난처럼 죄다 죽여버리고 가니 살기 위해 흩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오크를 모은 것이 쿤드라였다.
‘지금이 아주 중요해.’
왕국을 건설한 게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았기에 자릴 확실히 잡으려면 차질이 없어야만 했다. 제사장은 오크 중에선 머리가 좋은 편이었는데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일을 대신해줄 노예는 산더미처럼 많았다. 각기 잘하는 게 있는 것처럼 그는 괴롭히는 걸 잘했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한곳으로 걸어갔다.
혼자 고민해봐야 시간 낭비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네 말대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가 구석으로 걸어가자 철창 안에 엘프가 하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날 죽여.”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엘프는 사지가 결박당해있었고 무척이나 초췌한 모습이었다.
“부탁을 들어주면 죽여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아아, 부탁이 하나라고 한 적이 없는데?”
“이런 나쁜 자식!”
엘프가 발광하자 제사장은 채찍을 들었다. 그러자 엘프가 흠칫했다. 그간 얼마나 맞았는지 몸이 반사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우린 올해 안에 영토를 두 배로 늘릴 거야.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식량과 자원이 필요해.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로선 효율적인 계산을 할 수 없어.”
“왜 나한테만 이러는데?”
“네가 가장 똑똑해 보였거든. 하지만 네가 죽는다고 해도 걱정하진 않아. 너를 대체할 엘프는 아주 많거든. 나도 언젠가 네 야들야들한 살점을 맛보는 날을 고대하고 있어.”
“이, 이…!”
오크는 짐승이었다. 호랑이나 늑대처럼 야생에 적응한 생물이다. 그런데 일반 짐승과 다른 점이라면 무리생활을 하고 지능이 높다는 것이다. 엘프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오히려 무식하기에 이렇게 위치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행동하고 부딪혔다.
“네 아들을 데려올까?”
“아니다. 내가 하겠다.”
“잘 생각했어. 네가 살아 있으면 네 아들도 죽이지 않을 거야.”
“…또 뭐가 필요하지?”
“일천의 군대를 보내는데 보급을 얼마나 해야 할까?”
“며칠 주둔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나는 군단장이 만족했으면 해. 그래서 네게 물어보는 거고. 그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거든.”
“그러면 평소에 병사가 먹는 양보다 더 많이 보내. 염소든 양이든 돼지든.”
“그걸로 될까?”
“그러면 또 뭘 바라는 건데?”
“너도 별로 똑똑하진 않은 것 같네. 나는 네게 물어보면 기발한 생각이 나올 줄 알았어.”
채찍이 움직였다.
짜악!
“커흑…!”
난데없이 날아든 채찍에 엘프가 몸을 뒤틀 때 제사장이 말했다.
“명심해. 네가 쓸모가 없다면 그 자리는 네 아들로 대체할 거야.”
제사장은 웃으며 나갔다.
‘어떤 놈들인지 곧 알게 되겠지.’
죽이든 살리든 군대라면 놈들을 데려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틀 후 제사장은 깜짝 놀랐다. 밥을 먹고 있었는데 목구멍에 넘어간 고기가 다시 튀어나올 정도였다.
“전멸했습니다!”
광산에서 일하던 일꾼 오크는 제사장의 앞에 엎드리더니 말했다.
“군대가 모두 죽었습니다!”
“…어떻게?”
“괴수들이 날뛰었는데 군대는 괴수를 상대하지 못했습니다!”
“…너는 어떻게 살아 있지?”
“군대가 싸울 때 일꾼들은 도망쳤거든요.”
“자세히 말해봐. 군대의 창과 활이 통하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큰 원숭이의 가죽은 너무 두꺼워서 화살이 뚫지 못했고 큰 새는 하늘 높이 떠서 화살이 닿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어떤 인간 여자는 무슨 마법을 부리는지 몸뚱이엔 어떤 공격도 통하질 않았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인간이라….”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들이었다. 거의 멸종 직전까지 갔다고 들었다. 나약하고 성장도 더디며 욕심은 많고 폭력적이다.
“내 예상보다 괴수들이 더 강했구나.”
이 일을 왕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군대 일천이 전멸했다면 오천이 가도 비슷할 것 같았다.
“더 자세히 말해봐.”
그는 일꾼에게 그날 벌어진 상황을 모두 전해 듣곤 자신의 방구석으로 뛰어갔다.
“큭큭, 뭔가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지?”
“괴수가 너무 강하다. 어떻게 하지?”
“괴수를 사냥할 수 있는 정예를 파견해야지.”
“정예라, 마법사 말인가?”
“전사와 같이 섞어서 보내면 좋고.”
“그렇군!”
드워프든 엘프든 양으로 밀어붙이면 다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그렇게 안 될 것 같았다.
“왕에게 말할 건가?”
“아니! 내가 알아서 해야 해. 다시 찾아가면 날 죽일 거야.”
엘프가 즐겁다는 듯 큭큭 웃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너는 죽겠군?”
“그럴 일 없어. 군대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과 마법사들을 파견하면 괴수도 어쩔 수 없을 거다. 놈들을 얕잡아봤어. 하지만 그 괴수들이 그렇게 강하다면 놈들을 사냥해서 왕께 바쳤을 때 기뻐하실 거다.”
인간들의 몸통은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씹어먹어 줄 거다.
“괴수의 가죽을 벗겨 진상하고 머리뼈는 성문에 걸어둘 거야!”
흥분해서 외치며 나가는 제사장을 보며 엘프는 미소 지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네 생각대로 될까?’
광산을 누군가 공격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엘프는 깜짝 놀랐다. 괴수 중 하나의 외형이 그가 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엘프들에겐 전설처럼 내려오는 원숭이 한 마리.
‘가이가 맞다면 네놈들은 큰 실수 하는 거야.’
누가 가이를 데려왔는진 모르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광산을 공격한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크크크크…. 마법사라니.’
가이는 마법 면역이다.
“크하하하하!”
그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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