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후루루룩!
짜장라면을 처음 접해보는 드워프들의 반응은 어쩌면 이리 한결같을까.
“천천히 먹어. 체하면 약도 없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얼마나 맛있을까!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르신을 보면서 나는 내가 겪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크들이라…. 그 간악한 것들이 나무를 죄다 베어서 기후까지 바뀌는 건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영향이 있을 것 같긴 합니다. 동쪽 지역이 쑥대밭이 되고 있어요.”
“오크는 번식이 인간의 몇 배에 달할 정도로 빠르지. 과거에도 오크의 개체 수를 조절하지 못하면 재앙이 찾아온다고 했었어.”
옆에서 김우태가 물었다.
“얼마나 강한데?”
“하나하나는 별거 아닌데 숫자가 장난이 아니에요. 몇천은 가볍게 넘을걸요?”
“으음…. 그 쿤드라엔 더 많겠지?”
“아마도요.”
도화지가 물었다.
“나무를 가져가서 어디에 쓰는 건데?”
“도시를 이루려면 나무와 광물이 필수잖아요. 노예들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다는 걸 보면 세력이 어마어마한 것 같아요.”
김우태가 불편한 표정을 했다.
“언제 날 잡고 싹 잡아 족쳐야겠는데? 때가 어느 때인데 노예야?”
한국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강자존의 세상이었다. 힘이 약하면 잡아먹히고 강하면 법도 무시한다.
“일단은 우리 셋밖에 없으니까 차근차근 작전을 세워봐요.”
오크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끝내자 미션이 완료됐다. 무기도 다 만들었고 도화지는 세공을, 김우태도 보조직업을 갖게 되었다.
돌아갈 시간이 됐다는 것이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우리가 어르신 앞에 섰다.
“저들은 내가 맡을 것이니 염려 말고 가.”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야, 적적하지 않아서 좋지. 갈 곳이 생길 때까지는….”
어르신이 꼬마 드워프를 웃으며 돌아보았다.
“여기가 안전할 거야. 오크들도 용암이 들끓는 여기까진 오지 않을 테니까. 온다고 해도 내가 혼쭐을 내줄 거고!”
“조심하세요.”
“자네들이나 죽지 말고 또 와.”
하긴 지금 이곳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피의 주인과 싸워야 한다. 오크가 얼마나 많은진 모르겠지만 피의 주인 쪽이 더 까다로운 건 사실이었다.
【재능마켓에 입장하셨습니다.】
오피스텔로 돌아오자 긴장이 탁 풀렸다. 하층에 다녀오면 선명한 꿈을 꾼 기분이다. 하지만 넋 놓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빨리빨리 정리하고 까먹기 전에 살 것들도 적어두자!”
다음번에 어르신에게 갈 때는 라면 말고도 통조림이나 각종 먹거리를 잔뜩 가져갈 예정이었다. 식구도 늘었고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전폭적으로 지원할 거다.
“히히! 예쁘다!”
도화지가 오팔 덩어리를 보며 웃었다. 나는 벽장으로 가서 이번 미션으로 얻은 물건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세공이나 제작에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미리 얘기해주세요.”
지금까진 모든 소재를 드링크로 바꿔버렸는데 앞으론 쓰임에 맞게 분류해야 했다. 초기라서 김우태의 무기 제작과 도화지의 보석세공이 어떤 역할을 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만은 분명했다.
이제 나갈 시간이다.
내게 범이가, 김우태에게 아리가, 도화지에게 가이가 호위처럼 붙었다. 인형처럼 안겨있을 때는 귀여울 뿐이지만 이 녀석들이 곁에 있다면 괴물들도 함부로 못할 것이다.
“자주 연락하자!”
“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는데 문득 저런 이들 사이에 괴물이 인간인 척 섞여 있을 거란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이 평화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거야.’
오크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와르르 둑이 터지면 홍수처럼 전쟁이 벌어질 것이었다. 지금은 놈들의 숫자가 워낙 적어서 숨어있다지만 고삐가 풀리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어떻게든 지켜야 돼.’
내가 이런 각오를 다질 때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였다.
“네? 소집이요?”
-응! 목요일이야.
“알겠어요. 갈게요.”
급식을 돕는 어머니라서 그런지 나 보다도 정보가 빨랐다.
‘예원이도 오려나?’
학교에 불이 난 바람에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하고 있었지만, 종종 소식을 전하거나 학생들의 소속감을 위해 임시등교를 한다.
‘진짜 오랜만인 것 같네.’
학교에 일이 생긴 게 그리 오래전 사건이 아닌데도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재능마켓에서 보낸 시간이 많다는 뜻이었다.
나침반을 꺼냈다.
“….”
미동 없는 바늘을 보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에 어깨를 기댔다.
.
.
.
“또 시작인가….”
팀장은 강나은 경위와 함께 방배동의 한 가정집에 들어와 있었다.
“2층은 세입자가 나가서 두 달 전부터 비어있었대요.”
다세대주택이었다.
“CCTV는 당연히 없을 거고.”
“그렇죠. 40년도 넘은 집이에요.”
“안방 창문으로 들어왔다고?”
“외부에서 낸 흔적은 그게 유일해요. 현관문도 잠겨 있었고요.”
거실엔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다른 가족은 없었고?”
“자식들은 다 오래전에 출가해서 부부 외엔 사는 사람이 없었어요.”
“미치겠네….”
사망 추정 시각은 보름쯤 되는 것 같은데 사체의 상태는 수백 년쯤 된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갔으니까….”
인간의 육체는 다량의 수분으로 이뤄져 있지만 생각보다 피가 차지하는 비율은 높지 않다. 하지만 그 피가 모조리 사라지면 시체가 부패할 때 전혀 다른 모습을 띤다.
바로 지금처럼.
“이렇게 우리가 알지 못한 피해자들이 어딘가에 더 있을지도 몰라.”
“대체 이놈들은 피를 뽑아가서 뭘 하려는 거죠?”
“몰라. 우리가 찾아야지.”
프로파일러라고 해도 모든 범죄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한국에서 프로파일링은 이제 갓 20년쯤 됐다. 케이스도 적고 더군다나 이런 사건은 전례가 없었다.
“연쇄살인이잖아요. 저번에 욕실에서 발견한 그 남성 피해자와 똑같으니까요.”
“단정하진 마. 느낌이 좋지 않으니까. 한 놈이면 모르겠는데 왠지 아니란 예감이 들어.”
“혹시 태창하고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강나은 경위의 말에 팀장은 몸을 일으켰다.
“국과수에 증거들 보내고 광수대에 협조 요청해.”
“이미 오고 있을 거예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작은 마당이 있는 구옥이다. 담을 넘긴 쉽지만, 집안에서 없어진 금품은 없었다. TV앞 선반에 둔 피해자의 지갑엔 몇만 원뿐이긴 해도 현금이 그대로 있었는데 강도는 절대 만 원짜리 한 장 그냥 두지 않는다.
‘피가 목적이었다는 건데.’
피해자들은 급성 쇼크로 죽었다. 둔기나 칼에 맞아 죽은 것도 아니고 목이 졸려 질식사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이렇게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범인 혼자 두 사람을 제압하고 피를 다 뽑아간다?
‘희귀한 혈액형도 아니었고.’
미칠 노릇이었다.
뒤따라온 강나은 경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팀장님, 근데요. 피해자들의 목에요.”
“어.”
“구멍 두 개 있잖아요. 상식적으로 따져보면 손목이 편하지 않아요? 왜 굳이 목에서 피를 채취하죠?”
“변태가 하는 일을 일반인이 어떻게 알아. 그놈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숱한 범죄자를 겪으며 팀장이 알아낸 건 태생부터 다른 놈들이 존재한다는 거다. 편의상 괴물이라고 부르지만, 그놈들은 개개인마다 전부 성향이 다르고 다양하게 미쳐있었다.
“혹시요….”
강나은 경위가 머뭇거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쉽게 꺼내질 못하는 것이다.
“흡혈….”
듣자마자 팀장이 피식 웃으며 말을 잘랐다.
“자네, 프로파일러야. 설마 그런 미신에 기대려는 건 아니지? 우린 경찰이야. 증거와 자백에 의해 범인을 찾고 법으로 심판하는 공무원이라고.”
귀신이나 미신에 기대는 건 도무지 해결책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찾는 거다. 경찰이라면 절대 그래선 안 된다고 교육받는다. 범인을 못 찾겠다고 ‘귀신의 소행이었다.’ 정도로 마무리해버리면 억울한 피해자의 원한은 누가 풀어주나?
“죄송해요….”
“그럴 수 있어. 범인은 그걸 노렸을지도 모르고. 오컬트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명단 확보했어?”
“하고 있어요. 워낙 폐쇄적인 집단이라 가짜 정보가 많아서 시간이 걸려요.”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노리고 했거나 아니면 그쪽 취향이 확고한 놈일 수도 있어. 자네까지 걸려들 정도면 이게 언론에 퍼졌을 때 드라큘라가 나타났다면서 믿는 사람이 많아지겠지.”
놈은 그걸 원하거나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팀장은 절대 믿지 않았다. 피를 빼갔다면 그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고 대부분 이런 사건은 돈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혈액형하고 병원기록, 특수한 혈액형의 피가 필요한 환자들 명단도 다 확보해.”
“청부일 수도 있겠죠?”
“우리가 찾아야 돼. 놈들이 원하는 걸 아직 찾지 못했다면 피해자는 더 늘어날 거니까.”
“바로 병원부터 가볼게요.”
“언론은 최대한 막고. 아, 전에 그건 어떻게 됐어? 태창에서 정치인하고 엮여있다면서?”
“그렇지 않아도 이따가 저녁에 정보원을 만나기로 했어요. 그쪽도 목숨 내놓고 말하는 거라….”
“그만큼 거물이란 얘기네.”
“그런 것 같아요.”
“알았어. 미행 조심하고. 누가 따라오면 바로 연락해.”
“팀장님도요.”
강나은이 나가자 마당에 남은 팀장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라큘라?’
그래, 그런 영화를 어릴 적에 봤던 기억이 있다. 그땐 너무도 무서워서 이불 속에서 오돌오돌 떨었다. 하지만 점차 자라면서 그것들이 다 환상이란 걸 깨달았다. 경찰이 되고 나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은 인간의 마음속에 살고 있다는 걸 보았다.
‘차라리 그럼 괴물이라면 더 쉽겠지.’
팀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태창이 관련됐다면 그 기적의 신약이란 것과 어떻게든 이어져 있을 거야.’
이번에 물면 절대 놔주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팀장이 담배를 꺼내는데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 당신은?”
“오랜만입니다.”
일본에서 온 형사다. 홍대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야마구치 형사가 파일을 내밀었다.
“공항에서 바로 오느라 정리가 덜 됐지만 알아보기 편하실 겁니다.”
뭐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파일을 열었는데 팀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간 부검한 피해자들의 몸에서 나온 성분입니다.”
“…마약입니까?”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신종입니다. 쾌락과 환각을 일으키는데 어떤 물질로 구성되었는지조차 밝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공과 뇌의 반응을 보면 확실하죠.”
“으으음….”
파일을 닫은 팀장이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안에선 현장 조사가 한창이었다. 그가 전활 걸었다.
-네, 팀장님.
방금 떠난 강나은이었다.
“피해자 시신, 국과수에 넘어가면 무조건 마약 반응부터 알아봐.”
피가 뽑히는 내내 쾌락에 떨다가 죽었다? 대체 왜? 피해자가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고?
“성분 중에서 태창과 관련된 단 하나라도 찾으면 그게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어.”
그런데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저 뒤쪽 건물 지붕 위, 한 남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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