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그 말, 조심해야 할 거네. 경위.”
테러면 국가 차원에서 대응하게 된다. 일개 경찰이 나설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강나은은 확신했다.
“저도 처음엔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몇 번의 사건이 더 일어났을 때는 청부업자가 아닐까도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이건 개인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는 걸 아실 겁니다.”
모두가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범죄자들은 자신의 행적이나 신원이 드러날까 봐 매우 조심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범죄를 저지를 때는 과감해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부터 짜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시민이 피해를 입었고 사망자도 발생했습니다. 이건 개인의 욕망이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 벌인 사건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뭐라고 생각하나?”
서장의 말에 강나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떤 단체들의 알력 싸움입니다. 조직일 수도 있고 기업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배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태창 바이오가 그 중심에 있고요.”
“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무자비한 일을!”
서장이 버럭 화를 내자 강나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치권과도 얽혀있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못 들은 거로 하지. 증거 없이 날뛰었다간 우리 모두 옷을 벗어야 할 거야.”
윤일권도 흠칫했다. 대한민국에서 정치인은 성역과도 같은 존재였다. 증거를 갖고도 깨지는 게 일상인데 괜히 들쑤셨다가는 팀이 해체될 수도 있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고?
‘여태까지 수많은 사건이 그렇게 덮여왔으니까.’
있던 일도 없애버리는 게 정치인들이다. 광수대 자체를 없앤다는 게 아니다. 모두 잘라버리고 새로운 사람들로 구성하면 되는 거다. 그러면 수사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고 시간은 무한대로 잡아먹게 된다. 이렇게 흐지부지된 사례가 그간 얼마나 많았던가?
‘이번 케이스는 어떻게든 지켜야 돼.’
처음부터 태창을 수사해왔던 것도 있었지만 대원이 다섯이나 죽은 이상 이제 윤일권은 이 사건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강나은이 말했다.
“법의 테두리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세력이 이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태창에서 뭘 만들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게 매우 중요한 것이고 그걸 노리는 자가 오늘 같은 일을 감행했다면 비호 없이는 힘들다는 판단입니다. 그리고 CCTV를 확보할 수 없는 것 역시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여러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우린 근처에 있으면서도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과학적으로 우리가 접하지 못했던 어떤 신기술이 쓰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가정하면 신기술을 취급하는 선두주자가.”
“태창 바이오군.”
서장의 말에 강나은이 대답했다.
“산업체 간의 전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제가 처음 목격한 피해자는 매우 납득하기 힘든 사체를 남겼습니다. 일본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여기 있는 윤 대장님께서도 보셨지요?”
그가 끄덕거리자 강나은이 팀장을 보았다.
“팀장님께서도 저와 함께 한강에서 괴이한 생명체들을 보셨고요.”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건 이제껏 없던 새로운 것, 그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한 어떤 실험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환경오염 따위가 아니다. 붉은 안개와 물폭탄은 어떻게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감조차 오지 않았지만, 시체는 늘 증거를 남기는 법이다.
“종교나 마약이 아닙니다. 저는 이 사건들의 배후에 반드시 기업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나은이 그렇게 말하고 옆으로 물러서자 윤일권이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을 걸 보면 태창 바이오 본사에서 건질 수 있는 건 별 게 없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태창 바이오 산하의 조직이나 연구소를 수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장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나?”
서장이 피식 웃었다. 그쪽에서 변호사를 쓰면 조율하는 것만 몇 주가 걸릴 거다. 이 모든 게 증거가 없어서 그렇다. 대한민국 10대 기업에 드는 회사를 무턱대고 수사하겠다고 하면 어느 검사가 허락할까?
“대원 다섯이 죽었습니다.”
“그건 애석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범인이란 얘긴 아니야. CCTV조차 확보하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영장을 받아? 그러니까 증거를 찾으라고!”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하면 히트맨을 찾는 거다. 그게 어려우니까 태창부터 조사하려는 것 아닌가?
다시 회의가 길어지려고 하자 강나은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아마 오늘 밤이 끝날 때까지 저러고 있을 것 같았다.
“나은아!”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강나은은 고갤 돌렸다. 서지수가 경찰에 막혀 이쪽을 보며 팔을 흔들고 있었다.
“…전화 한다니까요.”
“딱히 할 일도 없었는걸!”
강나은이 통제구역 밖으로 나가며 얼굴을 흔들었다. 옛날에 봤을 때도 그랬지만 서지수는 무조건 직진하는 여자였다. 자신과 친하게 지낼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 일엔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그녀가 서지수에게 물었다.
“할 일 없으시면 커피 하실래요?”
“나야! 좋지!”
가까운 편의점으로 걸어가면서 강나은이 말했다.
“언니, 그 정치인 얘기. 어디까지 아시는 거예요?”
“설마 커피 하나로 퉁치려고 하는 건 아니지?”
“언니가 도와주면 저도 언니에게 드릴 게 많아요.”
“잘은 몰라. 아는 선배가 술자리에서 했던 얘길 들은 게 전부거든. 근데 왜? 그게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거야?”
“…그 얘기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그녀는 이 티타임이 수사 방향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길 바랐다.
.
.
.
“어때? 비슷하지?”
우리가 바위산에 내려설 때 김우태가 말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아까의 홀로그램 영상과 비교해보았다.
“하! 기분 묘하네? 전엔 요 녀석 손에 붙들려서 왔었는데. 하하!”
김우태가 가이를 보며 말했다. 나도 가이가 우리 식구가 될 줄은 손톱만큼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도화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피의 주인이라는 놈이 엘프들에게서 가지를 빼앗았고 엘프들은 가지가 없어서 살던 곳을 떠났다는 거네?”
김우태가 엷게 웃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피라미드고.”
지금까지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로드, 퀸, 피의 주인이 조금씩은 서로 얽혀있었는데 명확하진 않아도 어떤 핵심만 알면 다 풀릴 것 같았다. 본래 실타래라는 게 그렇지 않나? 시작과 끝을 알면 풀 수도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저기 뭐가 있어요.”
바위산 아래쪽 깊은 공간이 있었다. 내가 먼저 그쪽으로 뛰어내렸다. 우린 동굴 같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도화지가 탄성을 했다.
“뭐지? 오빠, 전에도 이랬어요?”
“난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었어. 고 녀석한테 잡혀있는 바람에 이걸 자세히 볼 여유도 없었고.”
움푹 들어간 벽면엔 어지럽지만, 규칙적인 도형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아까 유령과 함께 있던 방에서 본 문양과 비슷했다.
“그래도 찾은 것 같은데요? 호호! 가이가 이렇게도 우리에게 도움을 줬네요?”
귀엽다는 듯 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도화지를 보면서 김우태가 투덜댔다.
“네가 안 당해봐서 그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내가 가이를 처음 봤을 때 녀석은 정글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는 녀석의 사정이나 목적도 몰랐지만 이젠 조금 알 것 같았다. 엘프와 함께 살던 추억이 가이를 계속 떠돌게 하는 것이다.
‘마냥 무섭기만 했었는데.’
누구라도 저 녀석의 본모습을 보면 두려움을 느낄 것이었다. 그러나 가이는 엘프를 찾아 수백 년을 그렇게 헤맸다.
‘숲을 돌린다고 엘프들이 돌아올까?’
그건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정글에 맺힌 슬픔을 조금씩 지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지?”
김우태가 말할 때 나는 가지를 들고 큰 벽으로 걸어갔다. 이 문양이 괜히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지가 떴다.
【미션을 갱신합니다.】
얼마나 고대하던 것이었는지 와아! 소리칠 뻔했다. 미션 이란 게 언제나 부담스럽지만 이럴 때는 가이드나 마찬가지여서 이정표가 된다.
【가지를 이용해 숲을 원상 복구하세요.】
【엘프의 오래된 영혼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미션을 완수하면 매우 귀한 아이템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미션 도중 엘프의 가지를 잃어버리면 실패합니다.】
“다들 들려요?”
“응!”
“들었어!”
나는 벽을 꼼꼼하게 바라보다가 외쳤다.
“이건 것 같은데요?”
작은 구멍 하나가 전부였기에 스윽 보면 지나칠 만했다.
“이게 열쇠 구멍일까?”
김우태의 말에 도화지가 나를 봤다.
“그 가지가 열쇠고?”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해볼게요.”
가지를 돌려 잡고 손잡이라고 여겨지던 굵은 부분을 구멍에 조금씩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때 우린 엄청난 빛에 뒷걸음질 쳤는데 벽을 가득 채운 도형들에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으읏!”
“갑자기 뭐얏!”
모두 놀라 외칠 때 가지가 완전히 구멍에 들어갔다.
파스스스스스스!
돌가루가 바위산에서 떨어졌다.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거라면 자연스럽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피해요! 어서!”
드드드드드드드드득!
바위산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떨림은 더욱 강해졌는데 우린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우리가 선 바닥도 금방 꺼져버릴 것처럼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모두 안전한 곳을 찾아 뛸 때 바위산이 위에서부터 모래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나는 뛰다 말고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름답다거나 기이하다거나 그런 광경이 아니었다. 이건… 그래, 기적을 직접 목격하면 이런 기분일까?
“와….”
“뭐야… 이게….”
다들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뭐라고 막! 말하고 싶은데 가슴이 먹먹해져서 그조차 안된다.
스스스스스스.
아파트 10층 높이의 바위산이 모래처럼 무너질 때 윗부분부터 조금씩 드러나는 게 있었다.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진동 때문이 아니었다.
“아아아….”
살아가면서 눈으로 본 가장 감동적인 풍경이 무언인가? 내게 묻는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 그루 나무였다.
새하얀 나무는 잎이 없었지만 위쪽부터 드러나는 그 가지들만으로도 성스러웠고 식물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활력을 느끼게 했다.
“…훌쩍.”
도화지는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바스스스스스.
단단하던 바위는 먼지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고 아까 우리가 밟고 있던 곳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내가 구멍으로 넣었던 작은 가지가 저 나무의 일부가 되어 붙어 있었다.
【세계수가 복원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엘프가 잃었던 힘을 되찾았습니다.】
【숲의 불순물이 사라졌습니다.】
화악!
바위 속에 숨어있던 나무가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우윳빛이 사방으로 뻗으며 정글 전체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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