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대장님!”
들려오는 목소리에 윤일권에 겨우 눈을 떴다.
“으으….”
왈칵 뱉어내는 물이 썼다.
“어떻게 된….”
“하아! 다행입니다! 저는 대장님이 잘못되시는 줄 알고!”
서현덕 팀장이 윤일권의 상체를 부축했다. 서현덕의 목에도 선명한 손자국을 따라 멍이 들어 있었고 바다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푹 젖어있었는데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고해.”
윤일권이 머리를 흔들며 말하자 서현덕 팀장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상수도가 터진 건지 아니면 물탱크가 박살이 났는진 모르겠지만 물 때문에 완전히 망했습니다.”
“사람들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괜히 막았다가 사상자라도 나오면 저희가 다 뒤집어쓰게 생겼습니다.”
“…어이가 없네.”
비틀거리며 윤일권이 일어났다. 주변이 온통 물난리였는데 물탱크가 터졌다고 이리되는 게 말이 되나?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입니다. 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주차장 차들까지 둥둥 떠서 밀려났다고 합니다.”
“CCTV부터 전부 확보하고…다친 사람 없는지 파악해봐.”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조금씩 걸었다. 이번엔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놈은 이미 도주했겠지?”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있나. 대비하지 못한 게 문제였지. 안일했어. 놈을 우리 예상 범주 안에 두었다는 것부터가 오판이었어.”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히트맨은 대체 왜 콘서트장에 왔으며 여기서 무얼 하려고 했던 걸까? 그리고 태창 바이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나?
“지금은 모르겠지만 놈들은 반드시 흔적을 남겼을 거야.”
두 사람이 복도를 따라 걷고 있는데 뒤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뛰어왔다.
“대장님! 괜찮습니까?”
강남에서 온 이들이었다.
“아, 팀장님.”
강나은 경위의 모습도 보였다.
“저는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서현덕 팀장이 저쪽으로 뛰어가자 윤일권이 침을 뱉었다. 피와 흙먼지가 뒤섞여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본 강나은 경위가 물었다.
“불이 났나요? 스프링클러가 터졌다고 하던데요?”
“그 정도겠습니까.”
윤일권이 쓰게 웃자 주변을 둘러보던 강남서 팀장이 말했다.
“이번에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모였겠지요.”
“으음….”
“일단, 태창 바이오에서부터 사건이 있었습니다.”
윤일권이 걸으며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여기에 도착했을 때 깔린 안개와 시체들을 보았다는 대목에서 강나은 경위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는데 크게 한 방 맞아버렸죠.”
윤일권의 말에 강나은 경위가 물었다.
“태창 바이오와 관련이 있다는 거네요?”
“그럴 겁니다.”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데 저쪽으로 뛰어갔던 서현덕이 돌아왔다.
“VIP는 모두 떠난 것 같습니다.”
“아무도 없나?”
“네.”
“그나마 다행이군.”
유명한 가수라도 죽었다면 언론에서 엄청나게 때릴 것이었다. 물론 이 상황만 해도 쉬이 가라앉진 않겠지만….
서현덕이 말했다.
“인근의 모든 경찰이 집결 중이랍니다.”
“오늘 이곳에 있던 사람들 명단 최대한 확보하고 1시간 전부터 근처에 드나들었던 유동 인구 다 파악해봐. 그 안에 놈이 있어.”
힘들겠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런 일 하라고 국가에서 월급 주는 거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의 윤일권이었는데 강나은 경위가 그에게 말했다.
“점점 더 대범해지는 것 같아요. 전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은밀하게 활동했다면 패턴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보통 범죄자들의 행동에 대입해봤을 때 수법이 바뀌었다는 건 두 가지를 뜻해요. 하나는 범죄를 저지르며 점차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죠. 범죄자들은 처음엔 모두 서툴지만, 시간이 지나면 노련해지거든요.”
“놈은 이미 프로였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클 거에요. 그가 궁지에 몰려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거죠. 그런 일을 하는 사람 특성상 노출을 극도로 꺼릴 수밖에 없었을 텐데 여긴 수만 명이 있었어요. 누구라도 그를 봤을지 모르는 거예요.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뭘 했을까요?”
“태창을 따라왔겠죠.”
강나은 경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둘로 좁혀졌어요. 지금까진 실체 없는 유령을 따라다녔었다면 오늘부터는 태창 바이오만 물고 늘어지면 히트맨도 잡을 수 있어요.”
윤일권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이 너무 커졌다. 오늘 일만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벌써 지끈거렸다.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런데 아까, 로봇이라고 하셨어요?”
서현덕 팀장이 나섰다.
“제가 직접 봤습니다.”
“태창 바이오가 그런 것도 만들고 있었다면….”
강나은 경위가 입술을 깨물었다.
“위에서 봐주는 사람이 있지 않나요? 일반적인 기업이 무기를 만들 순 없는 거잖아요.”
그냥 로봇이 아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거대한 공격용 병기였다.
“제가 들은 걸 종합해보면 태창 바이오에서 비밀리에 로봇 형태의 무기를 만들고 있었고 히트맨이 그걸 알아내고 본사를 직접 타격했다, 그 과정에서 이후에 태창 사람들이 여길 왔는데 히트맨이 따라왔다. 맞나요?”
서현덕이 얼굴을 저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속사정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우선 사람이 여럿 죽었습니다. 일단 이것만으로도 세상이 발칵 뒤집힐 텐데 히트맨이니 뭐니 떠들었다가는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옷 벗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건 서현덕의 말이 맞다.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 풀어야 했다. 게다가 벌써 태창을 자극했다가는 놈들이 정보를 완전히 파괴하고 잠적할 수도 있었다.
강나은 경위가 말했다.
“그냥 가정을 해보는 거예요. 그래야 다음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어제까진 히트맨이 어디에서 나타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일부턴 태창과 엮여있을 거란 걸 알았잖아요?”
서현덕은 이번에도 부정적이었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분간은 몸을 사릴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원하는 걸 얻어갔다면 이제 태창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고요. 아, 잠시만요.”
서현덕이 몸을 돌리며 전활 받았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윤일권이 그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뭔데 그래?”
서현덕이 신음하며 말했다.
“태창 본사가… 불타고 있다고 합니다.”
.
.
.
샅샅이 뒤졌지만 특별한 게 보이지 않았다. 얼추 10시간은 돌아다닌 것 같았는데도 찾지 못하자 정신력이 고갈되어버렸다.
“환장하겠네.”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불친절한 재능마켓은 우리가 뭘 찾아야 하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욕 나올 정도로 큰 피라미드는 끝없는 복도로 나를 안내했다. 이게 차라리 풍경이 바뀌면 견디겠는데 계속 비슷비슷한 복도를 걷다가 거기서 거기인 방들을 확인하는 작업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저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야!”
“형.”
“없어?”
“네.”
“와, 돌겠네. 뭐가 이러냐.”
김우태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좀 쉬자.”
의자 따윈 없었으니 대충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신 뒤 내게 건넸다.
“고마워요.”
나도 마시고 범이에게도 줬다.
김우태가 말했다.
“…어땠어?”
“지치죠.”
“아니, 그거 말고. 채린이. 대기실에서 봤다면서.”
“…기억 안 나요.”
“거짓말하지 마! 인생 최고의 순간이 어떻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어!”
“나한텐 아니었거든요?”
“아흐…! 그걸 놓치다니!”
억울함에 피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땅을 치던 김우태가 탁 풀린 목소리로 등을 벽에 기댔다.
“사람들… 괜찮겠지?”
“모르겠어요.”
나도 물폭탄을 쓸 때 걱정했었다. 혹시 물에 휩쓸려 괜한 피해자가 생기는 게 아닌가 했었다. 하지만 피의 주인이 계속 날뛰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놈이 미쳐서 객석으로 가서 날뛰기라도 했다면 한둘론 안 끝났을 것이었다.
“점점 더 어려워지네.”
“그러니까요.”
“그래도 아깐 잘했다. 너 아니었으면 여기까지도 못 왔어.”
“이번에 돌아가면 형이랑 누나한테도 드링크 넉넉하게 나눠줄게요. 저만 쓰니까 위험할 때 대처를 못 하는 것 같아요.”
“너니까 한 거지. 나는 있어도 못 쓸걸.”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하는 순발력과 이해득실을 따져서 실행에 옮기는 결단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도 머리가 좋아지지 않았다면 매 순간 드링크 사용을 망설였을 것이었다.
“아까 그놈…. 다시 오겠지?”
“아마도요.”
“하, 집에 가긴 글렀네.”
붉은 안개인지 뭔지가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그놈이 이렇게 끈질기게 따라붙지 못할 것이었다.
“재능마켓에 가면 찾아보죠. 혹시 알아요? 샤워라도 하면 없어질지.”
“그래야 할 텐데.”
사람 피를 쪽쪽 빨아먹는 괴물이 내 가족을 노린다고 생각하면 불안해서 잠도 못 잘 것이었다.
“근데 그놈, 우릴 다른 절대자들의 하수인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로드나 퀸?”
“네, 어쩌면 이걸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만으론 힘들어도 그놈들끼리 싸우면 훨씬 쉬워질 것 같은데요.”
“걔들끼리 치고 박고 할까?”
“그렇게 유도할 수 있으면요.”
“하아, 나는 머리가 나빠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려니까 눈앞이 핑핑 돌아.”
“지쳐서 그래요. 푹 쉬면 낫겠죠.”
세 사람이 이렇게 큰 피라미드를 단시간에 뒤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더 넉넉하게 여유를 가지고 수색해야 할 것 같았다.
“잠깐이라도 잘까요?”
“그러자. 화지도 알아서 쉬고 있을 거야.”
도화지는 씩씩하니까 혼자 있다고 무서워하거나 하진 않을 거다.
‘진짜 힘들었다.’
눈을 감고 벽에 뒤통수를 기대자 오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품에서 가지를 꺼냈다. 하층에선 재능마켓 벽장을 사용할 수 없으니 잘 보관해야 했다.
【엘프의 가지(신물)】
유니크도 아니고 레전드도 아닌 ‘신물’이란다. 이 하얗고 보잘것없는 나뭇가지가 대체 뭐라고 ‘신’이란 이름이 붙나?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최상의 위치에 신을 언급할 텐데.’
그렇다면 이 엘프의 가지가 현존하는 모든 아이템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에 속한다는 걸까?
‘아니야. 속단하지 말자. 예상이 딱 맞았던 적은 없잖아.’
재능마켓이 뒤통수치는 걸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라서 무엇이든 단정하는 건 바보였다.
나는 가지를 품에 넣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드르르르르렁.
김우태는 벌써 잠들었다. 단순한 건지 아니면 그만큼 몰입을 잘하는 것이진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곤히 잠든 김우태가 부러웠다.
‘억지로라도 자자….’
그래야 다시 힘낼 수 있다. 사람이 잠을 못 자면 예민해지고 짜증만 늘어간다. 그건 동료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팔짱을 끼며 몸을 조금 뒤척였는데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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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839-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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