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외부 통제구역.
펜스 안으로 도화지가 살금살금 들어갔다.
‘이쪽으로 왔는데.’
용도를 알 수 없는 큰 기계들과 설비 틈으로 도화지는 망치를 쥐고 걸었는데 그녀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 혼자 할 수 있을까?’
아까 싸워본 바론 어찌어찌 될 것 같은데 일단 붙어봐야 알 것 같았다.
‘가까워지면 냄새가 나.’
붉은 안개가 냄새를 가려줬지만 밖으로 나온 뱀파이어들은 희미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에어컨 실외기.’
그 너머로 짙은 냄새가 강해지고 있었다.
꿀꺽!
침이 절로 넘어갔다. 그녀도 전보다 무척 강해진 상태다. 그간 민준이와 여러 미션을 돌며 아이템을 얻은 덕도 있었지만, 꾸준히 필라테스도 하고 망치질 연습도 개을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경험이 중요했는데 전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괴물을 근처에 두고도 싸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성장이었다.
‘저 뒤야.’
골목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큰 설비들 틈이 있었을 뿐이었다.
바스락.
움직임이 느껴졌다.
도화지는 훅! 앞으로 뛰어가면서 망치를 치켜들었다.
“…!?”
저 앞에 뱀파이어가 있었다. 양복 입은 남자가 그녀의 품에 안겨 축 늘어져 있었는데 뱀파이어는 그런 남자의 목덜미를 물고 치켜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해!”
도화지가 앞으로 걸어갔다. 뱀파이어가 사람을 흡혈하는 광경을 처음 봤기에 충격적이었는데 남자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아직 죽진 않은 것 같았다.
5미터, 3미터… 점차 거리가 줄어들자 뱀파이어는 남자를 질질 끌고 뒤로 물러났는데 아직 충분한 피를 다 마시지 못한 것 같이 집착했다.
“그만하라고 했다.”
도화지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저 남자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죄 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뱀파이어에게 화가 났다. 저 사람이 아니라 그녀의 할머니가 근처에 있었다면 희생자는 바뀌었을 것이다. 누구라도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안전하지 않았다.
쩌업.
뱀파이어의 입술이 남자의 목에서 떨어졌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더는 흡혈을 할 수 없었다. 뱀파이어가 남자를 옆으로 밀쳐내며 일어났다. 스윽 소매로 입술을 닦는 그녀의 턱으로 핏물이 흘렀다.
“너, 가만 안 둬.”
도화지가 조금씩 뱀파이어에게 걸어갔다. 뒤는 막혀있고 공간은 비좁았다. 높이 날아갈 수 없다면 뱀파이어는 자신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도화지였다.
“흐으으으….”
뱀파이어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주변을 보다가 신음했다. 싸울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는지 상체를 웅크리고 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렸다.
긴 손톱과 송곳니가 섬뜩하게 보였는데 도화지는 뱀파이어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방심하지 않고 두 손으로 망치를 단단히 쥐었다.
‘무섭지 않아. 원숭이라고 생각하자.’
피라미드의 원숭이들도 엄청나게 빨랐었다. 생긴 것만 다르지, 괴물이란 건 똑같았다.
‘원숭이야, 원숭이.’
뱀파이어의 등이 벽에 닿았다. 더는 갈 곳이 없었다.
“캬악!”
위협적으로 소릴 내는 뱀파이어를 보면서 도화지는 일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처럼 생겼지만 저건 말도 못 한다. 짐승처럼 울뿐 대화조차 불가능하다.
“죽어!”
용기가 치솟았다. 도화지는 훌쩍 뛰면서 망치를 내리찍었다. 둔기로 할 수 있는 공격이란 건 매우 단순하다. 내리치거나 옆으로 휘두르거나 위로 올려 쳐야 한다. 적을 밀쳐내려면 찌르기처럼 쭉 뻗는 것도 가능하지만 치명적이진 않았다. 이렇게 단순하기에 그녀는 아주 기본적인 동작을 계속해서 훈련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파괴력이 강하고 그녀가 잘하는 건 바로 이 내려치기였다.
솨아아아악!
망치가 허공을 가르며 떨어졌다. 당장에라도 뱀파이어의 머리를 부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그녀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 피를 마셔서 그런 걸까? 아까보다도 훨씬 높은 순발력으로 도화지의 가슴팍에 파고든 뱀파이어가 씨익 웃었다. 이미 뱀파이어의 손톱이 도화지의 심장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껴안듯 바짝 다가온 뱀파이어를 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은 도화지였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심장을 꺼내려는 뱀파이어의 손길이 가슴에 닿았다.
그러나….
“키이?”
동물의 뱃가죽도 뚫어버릴 수 있을 날카로운 손톱은 연약한 도화지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뱀파이어가 본능적으로 도화지의 하얀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하지만,
“읍읍?”
이빨이 박혀들 질 않았다.
“이게! 더럽게!”
도화지는 뱀파이어를 와락 안았다. 망치를 휘두를 각도도 나오지 않았고 놔버리면 도망칠 것 같았다. 그래서 단단히 껴안고 벽으로 달렸다.
“…!?”
도화지에게 안긴 상태로 버둥거리는 뱀파이어의 등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쿠웅!
도화지가 그대로 벽에 들이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진 않았다. 도화지는 계속해서 뱀파이어를 껴안고 사방에 부딪혔다. 뱀파이어는 야금야금 충격이 누적되었지만, 도화지는 멀쩡했다. 이 정도론 그녀의 방어력을 절대 뚫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뱀파이어의 손톱과 이빨 역시 마찬가지였다.
“잡았다. 요것아!”
어느새 뱀파이어가 도화지의 아래에 깔렸다. 조금 전에 바닥에 떨어지면서 뒤통수를 심하게 부딪쳤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르르 떨던 뱀파이어는 보았다.
“…아아 …아아아?”
망치를 치켜든 도화지가 무서운 얼굴로 뱀파이어를 보다가 팔을 내렸다.
후욱-!
손잡이를 짧게 잡았기에 더 빨리 내려오는 망치는 곧장 뱀파이어의 이마에 닿았다.
뿅!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뱀파이어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두개골이 깨지고 뇌가 곤죽이 되었다.
하지만 공격은 더 이어졌다.
뿅뿅뿅!
괴물이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도화지는 알고 있었다. 특히 뱀파이어는 목을 잘라버리거나 심장을 부숴야 한다고 민준이가 알려줬었다. 이러한 것들은 망치로 할 수 없었는데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으깨버리는 거였다.
뱀파이어가 죽었는지 어떻게 확인하느냐고?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그건 재능마켓이 알려주니 걱정이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정신없이 싸우다가 어찌어찌 이기긴 했는데 아직도 경황은 없었다.
‘아직이야.’
뱀파이어가 더 있다. 이렇게 쉴 틈은 없었다.
도화지가 몸을 일으켰다.
뱀파이어는 축 늘어져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뱀파이어에게 끌려온 남자는 깊이 잠든 것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도화지는 남자의 몸을 끌고 넓은 곳으로 나왔다. 구석에 두면 사람들이 찾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그녀의 배려였다.
‘놈들이 빠르니까 일단 구석에 몰아놓고 잡기만 하면 돼.’
이번 싸움으로 큰 깨달음을 얻은 그녀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한편, 김우태의 사정은 좀 더 달랐다.
‘좋아, 거의 다 왔어.’
최근 얻은 아이템에 존재감-2가 붙었는데 이게 은신 효과와 비슷한 성능을 냈다. 처음엔 마이너스가 기분 나빠서 버리려고 했었지만 은밀하게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착용한 양말이었다.
‘생각보다 쓸만하잖아?’
매력도 마이너스로 점철되어서 서러운데 존재감마저 바닥을 뚫고 추락하는 것 같아 우울했지만 잘 싸울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특히 그의 포지션을 생각하면 이건 아주 좋다.
‘빠르긴 해도 별로 강하진 않았으니까.’
객석 맨 위쪽.
뱀파이어가 한 청년을 끌어안고 있었다. 누가 보면 둘이 포옹하는 거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무대를 향할 뿐 뒤를 보지 않았다. 그래서 지척에 뱀파이어가 사람의 피를 빨고 있는데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벽에 바짝 붙은 김우태가 눈치를 보다가 인형을 슬쩍 바닥에 내려놓았다. 더 접근하면 그를 알아본 뱀파이어가 도망쳐버릴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시끄러워지면 곤란했다.
【꼭두각시 저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인형이 사람들 발밑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모기처럼 쭉쭉 피를 빠는 뱀파이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인형이 의식을 잃은 청년의 몸을 기어올랐다.
이때 뱀파이어도 인형과 눈이 딱 마주쳤다.
툭툭.
인형의 손이 뱀파이어의 정수리를 두드렸다.
이 단순한 행위엔 파괴력이 거의 없었지만 뱀파이어는 물고 있던 목덜미를 놓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대상이 공황장애에 걸렸습니다.】
【대상이 섭식장애에 걸렸습니다.】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툭툭툭.
뱀파이어가 청년을 완전히 밀어내기 직전에도 인형의 손은 뱀파이어의 머리를 세 번 더 두드렸다.
【대상의 시력이 저하되었습니다.】
【대상의 청력이 저하되었습니다.】
【대상이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무작위로 터지는 저주였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가벼운 게 없었다.
“…으으으?”
비틀거리는 뱀파이어의 앞에 거대한 남자가 나타났다.
“어이쿠, 언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뱀파이어를 부축하는 것처럼 바짝 밀착하면서 뱀파이어의 입을 손바닥으로 움켜쥐는 김우태였다.
“…억억!”
뱀파이어가 필사적으로 손톱을 세워 김우태의 온몸을 벅벅 긁었다.
“야야, 아파. 하지 마.”
쫙쫙 찢어지는 피부에 핏기가 맺히기도 전에 아물어버리는 김우태의 재생력은 대단했다.
이 와중에 인형이 뱀파이어를 계속 때렸다. 각종 저주가 중첩하자 뱀파이어는 뇌경색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는데 김우태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뱀파이어를 끌고 나갔다.
“술도 못하면서 왜 이렇게 마셔? 정신 좀 차려봐. 자기야!”
“…우욱, 우웁!”
입이 틀어막혀 있으니 고함도 못 질렀다. 김우태는 그렇게 뱀파이어를 으슥한 곳까지 끌고 갔다.
.
.
.
‘이제 두 마리.’
나는 다음 타겟을 찾아 서둘러 뛰었다. 첫 번째 뱀파이어는 여자 화장실에 숨어있었다. 내가 아까 들어갔던 남자 화장실 바로 옆이었는데 밖에서 가만히 기다리자 슬쩍 모습을 드러낸 뱀파이어는 곧장 심장에 화살이 박혔고 나는 죽은 뱀파이어의 몸을 남자 화장실에 넣은 뒤 안에서 문을 잠그고 벽을 넘어 나왔다. 이놈들은 그다지 똑똑하지 않았다. 지능은 있는 것 같은데 그걸 활용하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짐승처럼 숨기도 하고 포악하게 달려들기도 하지만 작전을 짤 정돈 아니었다.
그래서 두 번째 뱀파이어도 찾아냈다. 기계실 안에서 비명이 들렸고 들어가니 아저씨가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놈을 처리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우태와 도화지는 잘하고 있을까?’
문득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더 속도를 높였다.
‘이놈들도 노출을 꺼리고 있어. 무대 쪽으로 가진 않았을 거야.’
종합운동장 특성상 복도는 굉장히 넓고 길었다. 게다가 대기실 같은 방도 많았고 몸을 숨길 곳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히 화장실이 많다. 피가 목적이라면 이놈들이 머물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가만히 기다리면 급한 사람들이 알아서 들어오지 않나?
‘아깐 사람이 없어서 괜찮았는데….’
문제는 여자 화장실이었다.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은 괴물 잡겠다고 내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음….”
확인하지 못한 화장실 근처에서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앳된 여자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래봐야 고등학생 저학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야 할 텐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성이는데 안쪽에서 뾰족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재능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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