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아앗? 아무것도 안 보여!”
“조심해요! 누나!”
갑자기 벌어진 일에 내가 황급히 말했는데 저편에선 기척이 없었다.
“헛! 도망갔다!”
“도망갔다고?”
붉은 안개 뒤론 아무도 없었다.
“허억…?”
김우태도 놀라서 달려왔는데 뱀파이어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애애애애애애앵!
깨진 유리 벽 밖으로 사이렌이 울려댔다.
“우리도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김우태의 말에 도화지가 버럭 외쳤다.
“아오! 어디로 도망친 거지?”
더 싸웠다고 해도 이길 수 있었을까? 확신하진 못하겠지만 지금은 피해야 했다.
“일단 나가요.”
대로변으로 뛰어내릴 순 없었으니 건물 뒤로 돌아가서 사람들의 눈을 피했는데 우리도 정비가 필요했기에 택시를 탔다.
강남역 재능마켓으로 향하는 길.
“피의 주인이라니. 깜짝 놀랐다. 그치?”
아직도 뛰는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절대자를 딱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 전력을 다 사용할 수 없어서 도심에선 싸울 수 없을 것 같아요.”
내 말에 김우태가 대답했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놈이 도망친 것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몸을 뺀 것 같고.”
운전석에서 기사 아저씨가 우릴 힐끔거렸지만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가방 안에서 꿈틀거리는 범이의 머릴 쓰다듬어주면서 내가 말했다.
“피의 주인이 서울 한복판에 있었다니 몰랐으면 곧 큰일이 벌어졌을 것 같아요.”
“아까 그 태창 바이오란 회사, 관련이 있겠지?”
“아마도요.”
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야?”
그걸 나침반 뚜껑을 열고 넣었다.
“머리카락이요.”
“오…! 언제 챙긴 거야?”
“아까요.”
바늘이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한곳을 향하며 멈췄는데 놈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누나, 냄새나요?”
“아니.”
“기척을 감출 수 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그래도 이게 있으니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택시가 재능마켓 건물에 도착하자 우린 서둘러 5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안 열려!”
【미션을 수행하지 않아, 재능마켓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헙…?!”
들려오는 메시지에 모두가 굳어버렸다.
“이런….”
“못 들어간다고?”
그간 너무 당연하게 사용하던 재능마켓이었다. 그런데 미션을 달성할 때까지 잠겨버린 것이다.
“와, 이제 어쩌지?”
김우태의 말에 나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어떻게든 재능마켓 없이 해봐야죠.”
복도에서 서성거리면 사람들 눈에 띌 수 있었으니 우린 건물 밖으로 나가서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둘러앉아 말했다.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나침반의 바늘이 미동하지 않았다.
“왜 도망친 걸까?”
“그건 모르겠지만 우릴 쉽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몰라요. 시끄러워지는 걸 염려했을지도 모르고요.”
저쪽에서 그걸 부담으로 느낀다면 우리는 그걸 이용해야만 했다.
“일단 오늘은 상황을 지켜보죠. 다시 간다고 뾰족한 방법이 생길 것 같진 않으니까요.”
놈을 확실히 궁지에 몰아넣으려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으면서도 넓은 곳이 필요했다.
‘가이만이라도 날뛸 수 있었다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놈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해도 가이는 우리 전부를 합친 것보다 강했다. 문제는 그게 본체일 때 그렇다는 거다.
도화지의 가방 속에서 병아리가 머릴 쏘옥 내밀었다.
“아, 돌아왔다.”
도화지가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EMP로 기능이 마비되었던 핸드폰이 멀쩡해졌으니 지금쯤 태창 바이오도 전기가 들어왔을 거다.
“오늘 우리가 흩어지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김우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동의했다.
“미션이 끝날 때까진 모여있죠.”
“할머니가 걱정하실 건데.”
“시험공부 한다고 해.”
“해본 적이 없는데요?”
“…앞으로 한다고 해.”
나도 김우태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당분간 집엔 안 가는 게 좋겠어요. 괜히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요.”
“얘들아.”
김우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왜요?”
“콘서트 가자.”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예원이와의 약속이 있으니 가긴 가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마음 편히 즐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오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도화지! 너, 사람이 그러면 못 써! 누구에게나 소중한 게 있는 거라고!”
그가 이렇게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걸 채린이 알까? 모르는 게 더 나을지도….
“후….”
도화지가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앉아 있는 것보단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 어차피 방법도 없잖아! 머릴 식히다 보면 좋은 생각이 나지 않겠냐?”
얘기가 왜 이렇게 흐르는진 모르겠으나 재능마켓에도 들어갈 수 없었고 예원이와의 약속도 마음에 걸렸다.
“잠깐만요…. 표가 두 장밖에 없어요. 안되면 깔끔하게 포기하는 거예요.”
“나 혼자라도….”
“오빠!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아으….”
내가 예원이에게 톡을 보내놓고 말했다.
“그 피의 주인이라는 괴물은 제 화살도 다 쳐냈어요. 누나 공격은 닿지도 못했고요.”
범이가 순간순간 위협적으로 움직였지만, 치명타는 없었다. 우리 공격력으론 놈을 잡을 한방이 없었다.
“네 화살이 맞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치?”
“그게 어려워요. 빠른 것도 있는데 마치 제가 어디로 쏠지 예상하는 기분이었어요.”
핸드폰을 보던 도화지가 외쳤다.
“아, 기사 떴다! 여의도 정전!”
속보엔 여의도 일부 지역에 정전이 일어났다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
.
.
“광역수사대라니까요?”
“영장은요?”
“이미 현장 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영장은요? 없으면 나가세요.”
전기가 들어왔다.
토요일인데도 순식간에 모여든 직원과 경비원들이 로비를 가득 채웠다.
“이러시면 법적으로 대응할 겁니다. 수사를 하시려거든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세요.”
강경한 어조에 광수대 대원들은 조금씩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윤일권이 뒤쪽에서 말했다.
“싸운 흔적이 있었어. 그것도 아주 무식하게 말이야.”
“저도 봤습니다.”
광수대는 대표이사실을 보았다. 곧 경비원들이 들이닥쳐서 증거를 수집하진 못했지만, 모두가 톡톡히 보았다. 외벽 유리는 깨졌고 벽은 만신창이였으며 곳곳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 벽을 그렇게 부술 순 없어. 그 로봇의 짓인가?’
그렇다면 히트맨은 왜 왔을까? 의문 투성이었는데 로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 서현덕 팀장이 말했다.
“저 사람, 태창 바이오 대푭니다.”
“대표가 없었는데 대표이사실이 그렇게 되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표정을 보면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윤일권이 고갤 끄덕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광수대 윤일권입니다. 대표님 되시지요?”
“광수대가 무슨 일입니까?”
“폭발음이 들린다는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목격자도 많았고요.”
“…무슨 폭발 말입니까?”
“저희도 자세한 조사를 못해서 뭐라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건물 곳곳이 손상되었고 이 건물을 중심으로 일대에 정전이 있었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없는 것 같군요. 그럼, 수고하세요.”
대표는 서둘러 자릴 벗어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의 안색은 무척 좋지 않았는데 최상층으로 올라간 그가 복도를 성큼성큼 걷다가 한 곳에 섰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태창 바이오의 대표인데 이렇게 공손하다는 게 타인이 보면 매우 의아할 것이었다.
잠깐 기다렸던 그가 문을 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집처럼 개조한 최상층은 펜트하우스로 꾸며져 있었고 한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한강을 배경 삼아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늦었습니다.”
소파의 남자가 고갤 돌렸다. 그의 손엔 와인 잔이 들려 있었는데 피처럼 붉은 포도주가 가득했다.
“무슨 일입니까?”
“습격이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알고 있었어. 가지를 빼앗으려고 왔다더군.”
“엘프의 가지 말입니까?”
“그래.”
“허…. 감히 누가….”
“둘 중 하나겠지. 용도를 모르면 쓸 수도 없는 물건인데.”
그가 옆에 둔 나뭇가지를 손에 들었다. 하얀색이 특이하지만, 그것 외엔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엘프족의 보물이자 무한한 힘이 담긴 물건이었다.
“그들도 넘어왔다는 겁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죄송합니다. 제가 파악했어야 하는 일인데….”
소파의 남자는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꽤 쓸만한 부하들을 두었더군. 무리하면 다 잡아 죽일 수 있었겠지만….”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야만 했다. 만일 그들이 나타나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아직 힘이 부족하다.”
“노력하겠습니다.”
“놈들이 가지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아는 이상 더 빨라야 해.”
“알겠습니다.”
“쯧….”
혀를 찬 그가 가지를 보면서 말했다.
“진정한 힘을 깨울 수 있으면 떨거지들을 죄다 죽여버릴 수 있을 것인데.”
“불의 심장이 없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쉽단 거야. 그때 실수하지 않았으면 이미 내 손에 들어왔을 물건인데.”
“이곳에선 그런 힘 없이도 주인님께서 세상을 지배하실 수 있습니다.”
“알아. 그런데 그놈들이 와 있다면 곤란해. 죽여야 한다. 그놈들도 힘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을 거니까.”
하층의 절대자 셋의 힘의 균형은 오래도록 유지됐었다. 둘 중 하나가 왔는지 아니면 둘 다 왔는진 모르겠지만 무조건 제거해야 했다.
“데려왔나?”
“네, 올릴까요?”
“그래, 지금.”
“알겠습니다.”
대표가 어디론가 전활 하자 잠시 후 건장한 사내들이 10명의 여자를 데려왔다. 사내들이 문을 막아섰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불려온 여자들은 태창 바이오의 직원들이었는데 왜 토요일에 펜트하우스에 왔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가봐.”
그의 말에 대표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돌아섰는데 그걸 본 여직원들의 표정은 더 알쏭달쏭해졌다. 이제까지 대표님 위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가?
“싱싱하군.”
소파에서 일어나며 미소 짓는 그의 송곳니가 섬뜩하게 자라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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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결국 오고야 말았네. 환장한다, 진짜.”
도화지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우태는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채린은 몇 시지?”
“순서를 보면 7시쯤 나오겠는데요.”
“그래, 채린만 보고 이동하자.”
예원이가 표를 한 장 더 보내줘서 도화지도 같이 들어올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우주 최강 현민!
-사랑해요! 현민!
이미 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응원하고 있었는데 4만 명은 될 것 같았다.
우린 빈자리로 찾아 들어가서 앉았다.
‘잠깐은 괜찮겠지.’
김우태가 저렇게 원하는데 두어 시간만 있다가 가자.
‘난입 미션이 이렇게 진행되는구나.’
혼자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함성이 들려오고 있지만, 생각에 잠겨있으면 시끄럽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재능마켓도 이용할 수 없고, 가지란 걸 찾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거야.’
수시로 나침반을 보고 있었는데 변화가 없었다.
‘괜찮겠지?’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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