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오빠, 힘내요….
송곳니를 그에게 줄 걸 그랬나?
‘그거 하나 얻는다고 크게 바뀔 것 같진 않은데.’
나는 쓰게 웃으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강남역.
여전히 언제나 인파가 많았다. 이 사람들은 지금 세상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 모른다. 만약 이 한복판에서 내가 겪었던 화산폭발이라도 일어난다면 사람이 얼마나 죽게 될까? 자연적으론 절대 일어날 리 없겠지만 그걸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섬뜩했다.
해외여행 경험이라곤 강제로 오키나와에 갔던 기억밖에 없었지만 몇 년을 유학 다녀온 기분으로 집에 가는 길. 녹초가 되어 지하철에서 내리는데 톡이 왔다.
-민준아. 바빠?
-아니.
예원이었다. 내가 겪는 일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면 예원이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이러니 그 드워프의 기억이 온전치 못한 것도 이해가 간다. 홀로 그 긴 시간을 견딘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토요일, 시간 괜찮지?
아, 콘서트가 있다고 했었지.
-응.
-『방청권』
녀석이 설레고 있다는 게 글자에서도 느껴졌다.
-좋은 자리 맡으려면 일찍 와야 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까 예쁘게 봐줘!
남들은 내가 예원이같이 예쁜 아이돌 친구를 뒀다면 부러워 죽겠지만 그간 저쪽 세상에서 겪은 일들이 워낙 엄청난 것들이다 보니 콘서트가 흥분되거나 하진 않았다.
집에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었다. 본래 누우면 곧장 잘 만큼 피곤했는데 몇 가지 정리할 일이 더 있었다.
‘앞으로 돈이 많이 들겠는데.’
용암지역에 물건을 옮길 수 있게 된 것은 대박이었지만 그 물건을 사려면 돈이 든다. 요즘같이 살인적인 미션을 수행하면서 소소한 알바를 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돈벌이가 필요했다.
문제는 내가 고등학생이란 것이다.
‘합법적으로 돈을 벌 방법이 필요한데.’
오팔 같은 걸 팔았다간 당장 추적당할 수도 있었다.
‘중고로 내놓으면 되려나?’
그것도 여러 방법 중 하나겠지만 위험한 건 무조건 피해야 했다.
‘이건 김우태랑 상의해봐야겠네.’
김우태는 성인이니 가게도 차릴 수 있고 각종 거래도 제한 없이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이날 나는 다양한 꿈을 꾸었는데 그 끝엔 언제나 화산이 폭발했고 그만큼 그 일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그간 나는 재능마켓으로 물건을 쌓았다. 그걸 용암지역으로 옮기며 오팔을 땄고 틈틈이 물고기도 낚았다. 우리가 돈을 벌 방법을 김우태가 생각해본다고 했었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은 드링크를 이용하거나 저쪽 세상 물건을 현대에서 파는 것이었다. 돈 될 만한 게 뭐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골동품이나 보석 개념으로 접근하면 상당히 많은 것들이 쓸모 있을지도 몰랐다.
‘몇억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우리에게 쓸 돈은 생필품을 살 정도였다.
금요일.
오랜만에 우리 모두가 재능마켓에 모였다.
그간 김우태와 도화지도 꾸준히 미션과 필라테스를 하며 스텟을 쌓았는데 뱀파이어에 관한 얘길 내게 전해 들었기에 안심할 순 없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로드, 퀸, 피의 군주? 그런 놈까지 셋이 이쪽에 와 있거나 올 예정이라는 거잖아?”
김우태가 말했다.
“우리가 잡아 죽여야 할 놈들이.”
도화지가 말을 받았다.
“미션이 과거로 이어지는 것도 어쩌면 우리에게 그들의 약점 같은 걸 알려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몰라.”
나도 여기까진 생각했었다.
내가 말했다.
“미션의 회차를 반복할수록 새로운 지역이 열리고 있어요. 누나나 형의 미션에 제가 참여하면 또 어떤 곳이 열릴지 모르고요.”
나는 나침반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걸 본 도화지가 물었다.
“없어?”
혹시나 해서 뱀파이어를 떠올리며 나침반을 돌려보는데 잡히지 않았다. 한 번쯤은 실제로 만나야 할 것 같다.
“네, 머리카락 같은 게 있으면 더 추적하기 쉬울 것 같긴 한데….”
놈들이 어디 숨어있는질 모르니 아직은 의미가 없었다. 그간 도화지도 특별한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잠잠해도 언제 한꺼번에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우리라도 계속 미션을 깨놔야 해.”
김우태의 말에 내가 물었다.
“그건 어떻게 됐어요?”
돈벌이에 관한 질문이었다.
“당분간 내가 짐에 출근하지 않고 직원 새로 뽑기로 했다.”
“….”
“….”
김우태가 걱정 말라는 듯 하하! 웃었다.
“대신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거든?”
“뭔데요?”
“우리 짐의 매출도 올릴 겸 운동하는 회원들 만족도도 높일 겸, 단백질 쉐이크를 팔아볼까 하는데.”
“근육 키울 때 먹는 그거요?”
“맞아!”
“그걸 어떻게….”
물으려다가 머릿속으로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아…?”
“눈치챘어? 하하하!”
기존의 단백질 쉐이크는 워낙 종류도 다양하고 보편화 되어서 그리 비싸지 않았다. 주로 회원들이 직접 큰 물통을 들고 다니면서 섭취하는데 기호에 따라 바나나 같은 것을 함께 갈아서 마신다.
“커피처럼 잔으로 팔아볼까 해. 우리 생수 타서. 네가 희석해서 쓸 수 있는 드링크 같은 거 지원해주면 더 좋고. 남는 것들 있잖냐. 만들 때마다 자주 나오는 것들.”
“워….”
“어차피 우리 짐에 오는 사람들은 다 부자거든. 하루 몇천 원 정돈 신경도 안 써. 근데 마시기만 해도 힘이 넘쳐나고 피로가 싹 풀려봐. 소문 금방 나겠지?”
5천 원 잡고 하루 10잔이면 5만 원, 100잔이면 50만 원이다. 컵이나 이런저런 재료비가 들어간다고 해도 60% 이상은 남을 거고 예로부터 자고로 물장사가 가장 많이 남는다는 말도 있지 않나?
“지금도 음료는 팔고 있는데 아예 프리미엄 전략을 써보려고. 마침 생수도 있고!”
어머니가 식당에서 비슷한 방법으로 수익을 내고 계시지만 그 돈은 내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거라면 김우태가 완벽히 합법적으로 돈을 재능마켓에 끌어올 수 있었다.
“이건 어때요?”
드링크를 만들다 보면 귀한 게 있고 흔한 게 있을 수밖에 없는데 ‘레어’등급에도 들지 못하는 평범한 것이라 할지라도 현실에선 말도 안 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체력 드링크: 정신적, 육체적 지구력을 24시간 높여준다.】
“제일 만들기 쉬워요. 빈 병만 있으면 포인트도 별로 안 들어가고.”
내가 드링크를 내밀자 김우태가 오오! 눈을 크게 떴다.
“딱 좋다! 적당히 희석해서 팔면 대박 날 거야!”
빈 병도 흔한 건 아니었지만 난쟁이들과의 길을 뚫는다면 어렵지 않게 수급할 수 있었다.
“하루에 몇 잔이나 팔릴 것 같은데요?”
“우리 회원이 1,300명이야. 매일 오는 사람도 400명이 넘고. 한 잔씩만 마셔주면….”
도화지가 입을 떡 벌렸다.
“그렇게 사람이 많아요?”
“당연하지! 안 그러면 어떻게 월세 내고 살겠냐?”
“와…. 오라버니, 진짜 부자였네요?”
“갑자기 왜 눈을 그렇게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러냐. 사람 무섭게.”
김우태가 헛기침했다.
“어차피 다 아버지 거라서 나랑 상관도 없고. 근데 쉐이크는 다르지. 이것만 잘 팔아도 돈 걱정은 안 할걸?”
확실히 그렇다. 하루 100잔이면 월매출 1,500만 원이나 되는 거다.
“관장님 허락은 받으셨어요?”
“아니, 아버지는 강남 짐엔 안 와. 체육관에만 계시니까.”
“그래도 말씀은 드려야….”
“잘 되면 되는 거야. 본래 가족끼리는 허락보단 용서가 빠른 거다. 하하!”
혹시라도 망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접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망할 일은 없겠지만.’
어머니 가게에서 확인해봤을 때 이건 무조건 되는 아이템이었다. 그냥 생수만 섞는 것도 아니고 체력에 좋은 드링크도 조금 넣는다면 운동하는 이들에겐 기적의 물약이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야?”
도화지가 물었다.
“지금부터 의논해봐야죠.”
“결정되면 말해줘. 몸 좀 풀고 있을게.”
도화지가 필라테스 기구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제 완전히 숙련된 운동선수처럼 레깅스 차림의 그녀는 능숙하게 기구들을 사용했다.
나는 그런 도화지를 힐끔 보다가 김우태에게 목소릴 낮춰 말했다.
“내일, 아시죠?”
“흐흐…. 그걸 어찌 잊겠냐.”
도화지에게 말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녀는 아이돌이나 그런 쪽엔 관심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미션 하다가 죽어도 귀신으로 갈 거다.”
김우태의 집착도 도화지에게 보여주기 껄끄럽다.
“그건 좀….”
“넌 내 순정을 몰라. 이날을 위해 노래도 다 외웠다고!”
“아, 네….”
설마 내일 같이 떼창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크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일단 오늘 갈 곳부터 정하죠.”
지난 며칠간 도화지와 김우태가 나란히 체류 시간을 거의 다 소모했기에 어디든 우리가 조절하면 갈 수 있었다.
김우태의 행선지는 정글.
도화지의 다음 장소는 토룡 지역이다.
정글은 최근에도 다녀왔기에 빠삭하다는 장점이 있었고 이미 우리에겐,
캬웅!
우끼끼끼!
저쪽에서 범이와 놀고 있는 원숭이가 있었다. 지금은 작고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실체는 어마무시한 녀석이었다.
‘빠르게 정글을 한 번 더 도느냐, 아니면 다음으로 나아가느냐인데.’
물론 정글이라고 해도 내가 합류하면 또 어떤 숨은 지역이 개방될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최근에 간 여섯 번째 지역은 우리가 첫 번째 미션으로 갔던 오래된 고성의 옛 시절이었다.
종합해보면 우리는 다섯 지역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었고 길만 알면 지역 간 이동도 가능했기에 여러 변수가 있을 것이었다.
“토룡 사냥이 더 쉬울 것 같아요. 그건 그냥 큰 지렁이만 잡으면 되니까.”
정글은 기본적으로 피라미드까지 가고 뭐하고 하려면 이동시간이 길다. 어차피 둘 다 수행해야 한다면 첫 번째는 빠르게 치고 나오는 게 좋다.
“네 생각대로 해.”
“네, 그럼 준비하죠.”
오랜만에 병아리를 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녀석은 잘 지내고 있겠지?
“화지야! 가자!”
“네!”
군인들이 군장 챙기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 전문가가 다 됐다.
【안전 구역에 입장하셨습니다.】
무기와 아이템, 가방을 단단히 갖추고 우린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왔다. 며칠 전에도 미션을 했지만, 그때는 범이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화지와 김우태, 원숭이까지 있었다.
“여기가 그 홍수 지역이지? 비 엄청나게 온다는.”
“네, 미션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까 제가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예전엔 참 힘들었는데 이젠 화살 몇 개면 지렁이 사냥은 일도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보급품 상자엔 별것이 없었고 우린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무엇보다 원숭이의 존재가 엄청나게 든든했다.
솨아아아아아아.
비 냄새가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흙에서 나는 냄새겠지만 여전히 하늘에서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메시지는….’
뜨지 않고 있다. 이건 도화지의 미션이다.
“누나?”
“응?”
“미션은요?”
“없는데?”
밖으로 완전히 나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에서 나갔을 때 귀가 간지러웠다.
【미션이 갱신됩니다.】
【미션의 난이도가 오릅니다.】
재능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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