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오! 이게 얼마만인가?”
“어르신!”
나는 반가운 마음에 드워프를 향해 달려갔다. 그도 눈시울을 붉히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몇 년은 못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함께한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종족을 떠나서 그는 내게 삼촌 같은 느낌이었다.
그를 찾고 깨달았다.
‘모든 미션 장소가 다 이어져 있어.’
화산폭발로 변해버린 이곳처럼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지된 장소도 있지만, 정글에서 용암지역으로, 사막에서 다른 곳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그의 말에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짧게 설명해주었다. 과거 드워프의 군락지가 있었던 곳이 폭발로 인해 이렇게 변해버렸다는 이야기에 그가 깜짝 놀랐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오래전에 떠돌긴 했었지만,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드워프는 곰곰이 무언가를 떠올려보다가 말했다.
“불의 심장이라…. 어쩌면 그런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있다고요? 본 적 있으세요?”
“길이 멀다네. 오늘은 쉬고 내일 가보겠나?”
이미 어둠이 내려앉고 있어서 쉴 때가 됐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어르신.”
“왜 그러나?”
“혹시 몰라서 항상 이거 하난 가지고 다녔었는데 마침내 이런 날이 오네요.”
가방에서 꺼낸 것은 짜장라면 한 봉지와 오동통한 면발로 유명한 라면이었다.
“…허엇? 그게 뭔가?”
“드셔보면 알 겁니다.”
여기서 몇 달은 있었기에 식기나 각종 도구가 어디에 있는진 빠삭했다.
물이 끓길 기다리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어르신. 앞으로 제가 여기에 자주 오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그럼! 나는 얼마든지 환영이라네!”
수호자의 돌이 있으니 재능마켓에서 단박에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낼 수 있었다.
여기엔 귀한 물고기도 있고 천년지네 같은 걸 녹여버릴 수 있는 용담도 들끓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 어떤 장인보다 솜씨 좋은 드워프가 있었다.
‘공간도 넓지. 이곳을 잘 활용하면 보급에 대한 걸 완전히 해결할 수 있어.’
단순하게 라면만 몇 박스 옮겨도 마음이 한결 넉넉해질 거다. 이제까진 생존 가방 하나 외엔 추가보급을 전혀 받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면 지금부턴 현대식 자원을 무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거다.
‘여기에서 가져갈 건 가져가고 저쪽에서 옮길 건 넉넉히 쌓아두면….’
이 세계 최초의 교역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을 때 물이 다 끓었다.
“히야! 기가 막히는구먼! 이런 오묘한 맛이!”
드워프는 참으로 순수해서 좋다. 평생 물고기 한 마리만 먹고 살았으니 그의 미각이 퇴화해버린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먹는 재미로 살아간다면 여생은 행복하지 않을까?
‘돈 많이 벌어야겠네.’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드워프를 보면서 나는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까 이렇게 마음 편하게 쉬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어르신.”
“응?”
“혹시 뱀파이어에 대해서 아세요?”
“세 절대자에 관해선 들어본 적 있지. 워낙 오래전 일이라 아직도 그들이 존재하는진 모르겠지만.”
“로드, 퀸, 뱀파이어 왕이요?”
“맞네. 피의 군주라고도 부르는데 그는 우리처럼 단순히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얘길 들었어.”
문득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다.
“혹시 조상 중에서 카일이라는 이름을 쓰신 분이 계세요?”
“허엇? 그걸 어찌 아나? 내 할아버지라네!”
“…아….”
아까 하던 이야기에서 카일의 부분을 더 상세하게 추가해 들려주었더니 드워프는 크게 한탄했다.
“그런 일이…! 고작 한 사람의 욕망 때문에 이곳 전체가 이리되었다니!”
그게 사람이 아니고 아직도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큰 문제였지만 내가 만났던 카일이 이 드워프의 가족이었다는 게 재미있었다.
‘죽지 않고 대가 이어졌구나.’
그러면 그 소녀는 어떻게 되었지?
“인간? 모르겠어. 그런 얘긴 듣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들었는데 잊었을지도 모르겠지. 나는 여기에서 아주 오래도록 혼자 살았으니까. 불어오는 바람은 조금씩 내 의식도 갉아먹는다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나는 몰라.”
가물가물한 기억에서 뭔가 떠올리는 게 고통스러운 듯 말하는 그와 함께 나는 밤을 보냈다.
아침이 밝자마자 수호자의 돌을 써보았다.
후우우우웅.
바람이 모여들었다.
【수호자의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제 수호자는 균열을 통해 재능마켓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수호자의 동료 또한 이동할 수 있으나 재능마켓에서 지정한 적대적 관계는 진입할 수 없습니다.】
“오… 이것이 자네가 말했던 그것인가?”
“네, 앞으로 자주 올게요.”
“그러면 나야 고맙지! 허허허!”
흡사 내 전용 대장간을 구축한 기분이었다. 아직 수호자의 돌이 남았으니 다음번엔 난쟁이 마을에 설치해서 빈 병과 달 꽃을 주기적으로 확보하면 좋을 것 같다.
“가세!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아마 반나절이면 도착할 거네!”
“네!”
그와 함께 길을 나섰다. 온통 새까만 바위 지역이었고 곳곳에 용암이 부글대고 있었지만, 이것도 어느새 적응이 되었는지 낯설진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지하로 이동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그가 품에서 주먹만 한 오팔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호오, 이건 뭐죠?”
“가공한 오팔이라네. 어떤 보석들은 가공을 통해서 이런 마법력을 갖출 수도 있지.”
“저도 만들 수 있어요?”
“이건 불의 힘이 들어가야 해서 아마 어려울 거야. 하지만 오팔을 넉넉히 가져다주면 얼마든지 만들어주겠네.”
“오! 감사합니다!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거예요?”
“당연하지!”
와, 이거 내다 팔면 돈 좀 되겠는데?
지하로 진입하는데 가공 오팔 덕분에 시야가 어둡지 않았다. 태양처럼 밝진 않아도 워낙 어두운 곳이어서 형광등 불빛 정도면 충분했다.
“한참 가야 해. 머리 조심하고.”
“네.”
“흔적을 보면 오래전에 이 길로 용암이 흘렀을 거야. 자네 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폭발 당시 생겼던 구멍 같기도 하고.”
일대의 지형을 바꿔버렸을 정도의 큰 화산이 폭발했으니 이런 동굴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몇백 년 전에 한 번 와보긴 했는데….”
그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변한 건 하나도 없구먼.”
나는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기온이 올라가는 걸 느꼈다. 이 지역 전체가 고온이긴 한데 어떤 뜨거운 것의 중심부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용암상어에 대해 말한 적 있었나?”
“용암상어요? 아니요. 없었습니다.”
“곧 보게 될 거야. 나도 처음엔 그걸 잡아보려고 이 길을 몇 번 더 왔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지.”
“용암어 같은 건가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놈이야. 백 번 듣는 것보다는 한 번이라도 보는 게 빠를 거야.”
용암상어? 궁금증이 치밀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갔다.
그러자 우리 앞에 거대한 붉은 호수가 나타났다.
저 위로 하늘이 보였고 뭉게뭉게 연기가 그쪽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호숫물이 새빨간 용암이 아니었다면 시원하게 다이빙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정도로 넓고 깊었다.
“여기라네.”
“심장… 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보이진 않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내가 느낄 수 있거든. 저 아래 어딘가에 아주 강력한 불길이 있다는 걸 알아.”
“아….”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드워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용암어의 대가리만 자른 부위였다.
“아주 잠깐일 거니까 자세히 봐야 하네.”
“네.”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다가 힘껏 용암어 대가리를 던졌다. 그게 수면으로 떨어지자 무언가 커다란 것이 파팟! 튀어 오르며 용암어 머리를 삼켰다.
“봤나?”
“…엄청나게 빠른데요?”
“그렇지. 저놈이 주둥이만 내밀어서 얼마나 큰지 확인할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자네의 몇 배는 되는 크기를 가졌어. 저놈을 잡아서 맛보면 참으로 좋으련만 어찌나 약삭빠른지 쉽게 걸려들질 않아.”
【돌발 미션이 출현했습니다.】
“혹시 자네가 저놈을 잡을 방법이 있다면 나를 도와주겠나? 용암에도 녹지 않을 튼튼한 그물이 있다면 어찌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필요한 도구를 사용해서 드워프를 도울 수 있습니다.】
【용암상어를 사냥하기 위한 특수한 아이템은 재능마켓에 가끔 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게 있다면 찾아볼게요.”
“고맙네. 어쨌든 여기가 그 불의 심장이 있는 곳은 확실하다네. 나는 감지할 수 있거든.”
그렇다고 해도 저 용암 속으로 들어가 심장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돌아가지. 더 늦으면 해가 질 거야.”
용암상어와 불의 심장.
조만간 이곳에 다시 오게 될 거란 강한 예감을 받으며 우린 왔던 길을 거슬렀다.
.
.
.
“와아….”
이게 얼마 만이냐.
나는 재능마켓에 돌아오자마자 범이와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습관적으로 생존 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서 한쪽에 놓아두고 내 전용 붙박이장의 문을 열었다.
벌컥!
이번 미션이 얼마나 길고 험난했는지는 수없이 반짝이는 돌들이 증명해주었다.
【누적 포인트 108,300p】
포인트도 어마어마했다.
‘하긴 뱀파이어를 몇 마리나 사냥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공주를 지키는 미션까지 이어졌고 드워프까지 만났다.
나는 반짝거리는 돌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맑은 피.】
【불의 기운.】
【빈 병.】
【오래된 왕국의 숨결.】
드링크에 사용될 재료들이 수북하게 쌓였고 아이템이 등급별로 나왔다.
【오래된 왕국의 손목 보호대(레어).】
【뱀파이어의 송곳니(유니크).】
【드워프의 가죽끈.】
드워프의 가죽끈은 도끼나 망치 같은 것의 손잡이에 감으면 반탄력을 중화할 수 있다고 했다. 뱀파이어의 송곳니는 매력 아이템이었는데 커스텀으로 속여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오래된 왕국의 손목 보호대는 힘+1의 효과가 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장비하면서 저쪽으로 걸어갔다. 재능마켓 유리벽 안쪽을 보면서 빈 병으로 드링크를 만드는 한편 눈으론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없네.’
혹시 용암상어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이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얼만질 모르니까 당분간은 포인트를 모아둬야겠는데?’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
터엉.
재능마켓 문이 닫히자마자 단톡방에 글을 썼다.
-용암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내일부터 그쪽으로 물건을 옮길 거니까 문 앞에 택배 쌓여있어도 놀라지 마세요.
답이 즉각 나왔다.
-민준이 너! 혼자 어딜 다녀온 거야?
-별일 없었어요.
지나고 보면 참 별거 아니었다. 화산이 터지고 뱀파이어에게 왕국이 멸망하는 걸 봤지만….
‘차차 설명해줘야지.’
도화지나 김우태에겐 일상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안 다쳤어?
-전혀요.
-그러면 다행이고! 나는 이따가 9시쯤 갈 생각이야.
김우태가 지금 봤는지 대화에 참여했다.
-나도 오늘은 늦을 것 같다. 짐에 문제가 생겨서.
-무슨 문제요?
-별거 아니야. 몇 달이나 다녀놓고 갑자기 환불 해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왜요?
-내가 싫대.
아아…. 이곳은 여전했다.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839-322-6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대한 편집권은 저자와의 계약에 의해 ㈜알에스미디어에 있으므로 무단 복제, 수정, 배포 행위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