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풀썩.
그가 쓰러지자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려갔다.
“으으… 으으으으….”
카일은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걸 본 소녀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카일의 입에 넣었다.
드링크였다.
옆에서 대장이 말했다.
“이자가 이 지경이 되었다니….”
우리가 본 카일은 드워프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 존재감도 대단한 자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으음….”
약효가 들었는지 카일이 눈을 떴다. 자신의 머리를 허벅지에 올려둔 소녀를 보다가 이게 꿈이 아니란 걸 깨달았는지 상체를 일으켜 우리에게 말했다.
“어,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해.”
대장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놈들이 뭘 원하는지 알았어! 우린 막을 수 없을 거야! 아주 강한 녀석이 넷이 있어! 그 괴물들은…. 괴물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횡설수설하다가 카일이 일어나 대장의 손을 잡았다.
“나가야 해. 곧 불이 분노가 이 땅을 덮칠 거야.”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소. 차분히 말해보시오.”
모두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카일이 비틀거리며 뒤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드링크를 마셨지만 반밖에 남지 않아서 완전히 회복하진 못한 것 같았다.
“놈들은 모르고 있어. 불의 심장은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걸 건드리면 불의 분노를 사게 된다고!”
이때였다.
-꺄아아아! 저길 봐!
-뭐야? 징그러워!
-허억…!?
안쪽에서 뱀이나 벌레 같은 것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뱀은 상대적으로 빠르지만 다른 것들은 무척 느려서 꾸물꾸물 바닥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흡….”
대장이 놀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가!”
카일도 외쳤다.
“불이 분노할 거란 걸 미물도 아는 거야! 모두 죽을 거라고! 모두!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
박쥐들은 먹이활동을 하러 간 게 아니었다. 저 뱀들도 벌레도 우린 모르는 어떤 기운을 감지하고 도주하는 것이었다.
“나가요! 빨리!”
나는 공주의 손목을 잡고 안아 들었다.
“꺄아!”
비명을 지르건 말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부르르.
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이건 위험이 다가온다는 증거였고 빨리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곧 엄청난 일에 휘말릴 거란 암시였다.
“헉헉!”
“뛰어!”
모두가 미친 듯이 달려, 왔던 길을 거슬렀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뛰었고 카일이 가장 먼저 밖으로 나갔다.
-여기야! 카일!
동굴 근처엔 아깐 없었던 다른 드워프들이 있었다. 남자 둘과 여자 셋이었다.
“카일!”
여자 드워프의 외침에 카일이 급히 말했다.
“막을 수 없었어. 놈들이 곧 심장으로 내려갈 거야.”
“그, 그런!”
다른 드워프들도 놀랐다.
“심장을 건드려선 안 돼!”
뾰족한 경악에 카일도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놈들은 그걸 모른다고!”
여자 드워프가 주변을 보았다.
“그러면 어쩌지? 이미 마을로 도망치기엔 늦었는데.”
“창고로 가자.”
“거기에서 분노를 피할 수 있을까?”
“몰라,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드워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여자 엘프가 우릴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빨리 가야 해!”
우리도 이미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최선을 다해 일행들을 이끌었다. 드워프들은 산을 내려가서 계곡 쪽으로 접어들었다. 두 개의 봉우리 사이의 계곡은 우리도 지나왔던 길이었는데 이들이 향한 곳은 전혀 짐작도 못 한 곳이었다.
다진 길도 없었다.
낮은 절벽은 훌쩍훌쩍 뛰어내려야만 했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이동했을 때,
우르르르르르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살면서 이렇게 크고 육중한 울림은 처음 느꼈다.
“허억?”
“헛!”
“머리 숙여!”
위에서 돌가루가 우스스, 떨어질 정도로 산맥 전체가 떨어댔다.
카일이 외쳤다.
“결국! 건드려버렸어! 분노가 시작된다!”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인지 몰랐지만 여섯 드워프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우리도 열심히 그 뒤를 따랐는데 문득 뒤를 돌아보았더니 하늘이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었다.
‘설마?’
어떤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렇게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여기야! 여기!”
여자 드워프가 손을 흔들었다. 작은 폭포가 보였다. 드워프들은 폭포 뒤로 들어갔는데 사람 하나 드나들 수 있는 넓이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들어가! 어서!”
다섯 드워프가 안내하고 카일이 맨 뒤에서 기다렸다. 그리곤 우리 모두가 안으로 들어가자 뭔가를 때렸다.
와르르르!
입구가 막혔다.
동굴은 깊었다. 300미터쯤 좁은 길을 구불구불 들어왔다. 그러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는데 사방엔 커다란 보따리에 이것저것 들어있었다.
여자 드워프가 말했다.
“이제 기도하라고. 너희 인간들은 잘하잖아.”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불이 분노할 거야. 그러면 이 주변은 초토화되겠지. 아주 오래전에 한번 불이 분노한 적이 있었어. 그때 산들이 생겨났고 우린 그 이후로 이곳에 터전을 잡았지. 불의 심장은 건드리지만 않으면 괜찮은데 만약 그게 어긋나면….”
화산폭발이었다.
“허얼….”
너무 엄청난 규모에 할 말을 잃었다.
“분노가 시작되면 이 지역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게 될 거야. 게다가 보름간은 죽음의 연기로 가득 차서 숨을 쉴 수도 없어. 여기서…버텨야 돼. 물론 우리가 분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이 드워프들의 공용 창고라는 것이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다가 남는 물건을 둔다고 하는데 곡식도 있고 술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모든 것을 태우는 분노가 열흘 거리까지 뻗어간다고 해. 그렇게 되면 지상엔 그 무엇도 살아남을 수 없겠지.”
여자 드워프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할 거야.”
얘길 듣던 카일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괴로운 듯 말했다.
“차라리 피를 원했다면 줬을 텐데…! 내 목을 노렸다면 흔쾌히 머릴 내밀었을 텐데! 놈들은 처음부터 불의 심장을 원했어!”
여자 드워프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걸 어디에 쓰려고 했던 걸까?”
카일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장은 자연의 일부야. 그 무엇으로도 담을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어. 그놈들이 잘못된 지식으로 무언가 시도하려고 한 것 같지만….”
뱀파이어들도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었다.
훌쩍, 훌쩍.
비관적인 말에 한 꼬마가 울기 시작했다. 소녀는 꼬마에게 다가가 녀석을 품에 안고 말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화살이 폭발하면 이런 곳쯤은 순식간에 터져버리거나 용암에 잠겨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으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암반 전체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더니 귀로 들을 수조차 없는 엄청난 폭발이 났고 격렬한 흔들림 속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아보려던 나는 느닷없이 들려오는 메시지에 움찔했다.
【미션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은 재능마켓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흔들린 불의 분노를 목격했습니다. 경험치가 크게 올랐습니다.】
-꺄아아아아아아!
내가 지켜야 할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꼬마를 껴안고 주저앉는 게 보였다. 대장이 그런 소녀에게 달려가다가 넘어지고 드워프들은 두려움에 얼굴을 땅에 처박았다.
이 모든 것들이 점차 희미하게 변해갔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생생하던 것들이 유령처럼 뿌옇게 번져가면서 차츰 사라졌다.
“….”
나는 옆을 보았다.
범이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재능마켓으로 이동할 수 있는 투명한 막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주변을 보면 공간 자체는 내가 있던 그 드워프의 창고가 맞다. 하지만 곡식도 물건도 없었다.
나는 돌아서서 걸었다. 내가 아까 들어왔던 그길로 끝까지 갔다.
“….”
분명 막아뒀었는데 동굴의 입구는 뻥 뚫려 있었고 바람과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나갔다.
그리고 보았다.
“…아아아….”
부글부글 끓는 용암과 솟구치는 연기. 주변은 온통 새까맣고 구멍 숭숭 난 돌이 가득하고 하늘은 거짓말처럼 파랗다.
나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게 이렇게 이어지나….”
잠깐 고민하던 나는 범이를 불렀다.
“범아!”
녀석의 등에 훌쩍 올라탄 뒤에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계곡도, 두 개의 봉우리도 없어졌다. 이 넓은 용암지역은 그저 아직도 끓고 있었고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있었을 소녀도 그녀를 지키던 대장도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드워프는 하나 있다는 걸 내가 안다.
‘어느 쪽이지?’
문제는 내가 전에 갔던 곳이 어디냐는 거다. 워낙 넓은 곳이었고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아!”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그리곤 그를 떠올렸다.
핑그르르르.
돌던 바늘이 딱 멎었다.
‘찾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은 나침반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양복 차림의 사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오르고 있었다.
점차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무려 80층을 넘게 올라간 사내가 도달한 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고 비싼 호텔의 VVIP룸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가 내리자 소파에 앉아있던 사내가 머리를 돌렸다. 양복을 입은 사내가 급히 뛰어가서 소파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니다. 나도 마침 옛 기억이 떠올라 쉬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럴 수밖에.”
소파의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때의 실수로 아주 긴 시간을 회복하는 것에만 전념해야 했으니까.”
불의 심장이 어떤 것인지 처음부터 알았다면 엘프의 나무를 가지고 직접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모든 계획이 무산됐다. 대지는 화염을 뿜었고 그게 온 세상을 뒤덮었다. 모든 식물이 죽으니 동물도 살아갈 수 없었다. 왕궁까지 날아온 돌의 파편은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
그야말로 불지옥!
아무리 불바다가 되었다지만 그가 직접적인 피해를 본 건 아니었다. 돌덩이 따위는 그냥 피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왕궁을 나서는 그의 앞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귀가 뾰족하고 피부가 하얀 늙은 엘프였다.
“괜찮으십니까?”
사내의 말에 소파의 남자는 심장 언저리를 어루만지던 손을 내렸다. 그러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본능적으로 이런다.
영생을 당연하다 생각해온 그가 최초로 죽음의 문턱까지 간 날이었다.
“갔던 일은?”
“순조롭습니다. 주인님께서 한국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혈족이 모두 깨달았습니다. 곧 각지에서 모여들 겁니다.”
“숫자가 얼마나 되는데?”
“아직은 열이 안 되지만 곧 늘릴 수 있습니다.”
“양이 중요한 게 아니야. 단순한 짐승들만 늘어나면 오히려 우리가 곤란해져.”
“그래서 깨끗한 피를 찾는 중입니다.”
“그래, 여긴 우리가 있던 세상과 달라. 허약한 놈들 뿐이지만 그렇다고 간과해선 안 돼. 이곳 인간들은 엄청난 걸 이뤄냈으니까.”
“그 모든 것도 곧 주인님의 손에 들어갈 것입니다.”
소파의 남자가 흐뭇하게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가 말을 이었다.
“어딘가에 내게서 하늘 나무를 가져간 그 빌어먹을 연금술사가 만들어놓은 뭔가가 있을 거다. 느껴져. 멀지 않아. 여기 있어.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한다.”
“네!”
그것만….
‘이번엔 반드시 손에 넣는다.’
재능마켓
지은이 : HAKA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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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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