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불과 얼마 전까지 인간의 왕이 앉아있던 의자는 이제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
왕좌에 앉은 사내는 40대 초반의 외형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은 훨씬 깊고 오래됐다.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있던 그의 얼굴엔 무료함이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백작이었다.
“지금쯤 난쟁이들의 마을에 도착했을 겁니다.”
“장담하지 마라. 세상엔 수많은 변수가 있는 법이니.”
“죄송합니다.”
백작이 머릴 숙이자 사내는 심드렁하게 웃으며 등을 기댔다.
“도망친 놈들은?”
“일백 이상 찾았습니다.”
“좋아. 너무 이 잡듯 뒤지진 말고 적당히 먹을 만큼만 잡아 와. 씨를 말리면 곤란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 그 무기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러고 보니 백작에게 설명한 적이 없다는 걸 사내가 깨달았다.
“태양을 이기기 위해서다. 우리의 근본은 어둠의 마법이기 때문에 낮엔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태양과 같은 힘을 지닌 무기를 품는다면 낮이든 밤이든 같은 힘을 낼 수 있다.”
“아…. 그걸 난쟁이들이 만들 수 있습니까?”
“그렇다. 그들만 다룰 수 있다.”
사내가 잔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강해질수록 너희도 강해진다. 피의 구속은 절대적이어서 무엇으로도 풀 수 없다. 그러나 완벽한 건 아니다. 내게도 약점은 존재하고 그걸 지워야만 더 큰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사내에겐 다섯 백작이 있고 앞의 남자는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들의 주종관계를 보면 이상한 점이 엿보인다. 백작은 마치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는 아들 같다. 신하라기보다는 가족이었고 다른 백작들보다 더 뛰어나려고 애썼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사내가 품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꺼냈다. 새하얀 나뭇가지는 한눈에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드워프의 심장만 얻으면 나는 완전무결한 존재가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실 것입니다!”
이백의 뱀파이어와 백작 넷이 갔으니 드워프의 심장 따윈 어렵지 않게 가져오리라 생각하는 그였다.
.
.
.
보인다고 가까운 건 아니었다. 우린 카일이 말한 곳까지 무려 이틀을 걸었다. 뱀파이어가 약속했던 사흘이 훌쩍 지났으니 이제 우리도 놈들과 마주치면 위험했다. 심지어 드워프들도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서 우리만 남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야심한 밤.
잠들지 못한 대장이 내게 말했다. 우린 산 중턱에 모여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그간 북쪽으로 피어오르는 봉화를 두 개 더 보았기 때문이다.
“성지라는 곳에 가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눈대중으론 내일 안에 그 성지가 있는 산이 보일 것 같았다. 카일이 얘기했던 두 개의 봉우리 사이에 들어와 있으니 여기만 지나면 된다.
게다가 나는 카일에게 나침반을 지정해두었는데 그가 어디에 있든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우린 다시 묵묵히 걸었다. 뱀파이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진 모르겠지만 놈들의 목적이 우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진즉 우릴 덮쳤을 거다.
‘드워프에게 뭘 원하는 걸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오후가 되었을 때 우리는 드디어 걷힌 안개 너머로 커다란 산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높은지 윗부분이 죄다 눈으로 덮여 있었다.
만년설!
“허… 저걸 올라야 하는 건가?”
대장이 어이없는지 입을 떡 벌렸다. 사내들은 몰라도 여자나 아이에겐 불가능할 높이였다. 게다가 산의 아래쪽을 제외하면 위로 올라갈수록 초목이 아예 없는 바위산이다.
“방향만 맞으면 꼭대기까지 가지 않아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나침반을 보며 말하자 대장이 끄덕거렸다.
“그 물건은 본래 여왕께서 사용하시던 거였네. 머리카락이나 타액 같은 것을 그 부분에 넣으면 훨씬 더 정밀하게 추적할 수 있지.”
“아, 그렇습니까?”
【아이템의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아이템 등급이 레어로 상승합니다.】
‘오, 이렇게도 되나?’
처음 겪어보는 일에 놀란 내게 대장이 말했다.
“왕자나 공주가 어릴 때는 자주 쓰시던 물건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더군. 아마 공주님께 주었던 것이겠지.”
하긴 이게 있으면 애를 잃어버릴 일은 없겠다.
“엘프 연금술사가 만든 보물이라고 하던데 엘프들의 마법은 참으로 신기한 것들이 많아. 그것 외에도 왕국엔 유용한 것들이 더 있었다네.”
그가 헛헛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공주가 꿋꿋하게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일전에 궁에 들렀던 마법사가 이런 말을 했다네. 그 나침반이 일부분 고장 나서 진정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연금술사를 만나면 고칠 수 있다고 했었지만 보통 엘프도 보기 힘든데 연금술사를 어찌 만나겠나? 하지만 자네라면 또 모르겠지. 여행하다 보면 인연이 닿을지도.”
【돌발 미션이 출현했습니다.】
【연금술사를 만나라!】
【연금술사를 찾으면 미션이 자동 갱신됩니다.】
이게 성장형 아이템이라는 걸까? 지금도 좋은데 더 좋아진다니 기대가 크다.
“고맙습니다.”
“내가 더 고맙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말은 안 하지만 다들 자네를 믿고 있다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성큼 걸었다.
이 산이 높나? 한라산이 높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가야 한다는 건 사실이었고 나침반을 따라 방향을 잡으면서 내가 선두에 섰다.
점점 기온이 낮아지고 있었다.
며칠 전보다 고도가 올라갔는지 조금만 걸어도 호흡이 가빠졌다.
‘뱀파이어도 드워프도 안 보여.’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주변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근처에 동물도 전혀 없어서 꼭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움직이는 건 우리와 하늘의 구름뿐이었고 불어오는 바람에 가끔 위쪽 눈이 흩날렸다.
이때였다.
부르르.
바늘이 요동쳤다. 그리곤 뒤로 훅! 돌아갔다.
“…?”
뒤를 돌아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우리 일행뿐이다.
‘혹시?’
아래를 향하는 건가?
내가 멈춰서 고갤 갸웃하자 대장이 다가와 나침반을 보았다.
“지하에 공간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저 뒤쪽으로 카일이 순식간에 이동했을 린 없다. 그렇다는 건 우리 발아래에서 그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딘가에 아래로 통하는 곳이 있을 거네.”
그가 주변을 보며 말하자 나는 잠깐 삽을 떠올렸지만 얼마나 깊이 파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곳에 힘을 낭비할 순 없었다.
“더 가보죠.”
무엇보다 일행의 안전이 중요했다. 무턱대고 지하에 들어갔다가는 전멸할지도 몰랐다.
“흩어져서 찾아보겠네.”
대장의 지시에 사내들이 사방으로 뛰어갔다.
내가 물었다.
“여기가 성지라면 드워프들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들은 우리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네. 지상보다 지하가 편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 이 아래 도시라도 건설했다는 건가?
‘피라미드도 날아다니는 판국에 뭔들….’
나도 아직 선입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들만 아는 통로가 있었을 거야. 그걸 찾으면 우리도 합류할 수 있을 거고.”
30분쯤 더 오르자 한 사내가 돌아오며 외쳤다.
“찾았습니다!”
“오! 어딘가?”
“저쪽입니다!”
사내의 안내를 따라 도착할 곳엔 커다란 동굴이 있었는데 높이가 10미터가 넘었다.
대장이 꿇어앉으며 바닥을 살폈다.
“오래되지 않았어. 많은 이들이 여길 지났네.”
다른 입구가 더 있을 진 모르겠지만 이곳을 이용해 안으로 들어간 흔적이 사방에 보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질문에 그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내가 선봉에 서겠네. 자네는 공주… 님과 후방에서 오게.”
그 말은 여차하면 튀라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커다란 동굴 입구는 악마의 쩍 벌어진 입처럼 음산했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저 깊은 곳에서 스산한 울음소리까지 흘러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소녀가 내 옆으로 더 바짝 붙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무서워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내가 웃으며 저쪽을 보았는데 바람이 안에서부터 밖으로 불고 있었다.
‘안쪽은 따듯한가?’
더운 바람이다. 본래 지하는 더 서늘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윤 모르겠지만 우린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갔다. 동굴이 얼마나 크면 우리 전부가 들어와도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정도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렇게 500미터쯤 들어왔을 때 앞서던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워프입니다!
-죽었습니다!
-이런!
공포 영화를 보면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전조가 있었다. 나는 그게 지금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끔찍하군.”
내가 다가서자 대장이 머리를 흔들며 사체를 보고 있었다. 드워프는 만신창이로 죽어 있었는데 대장이 그의 도끼를 들었다.
“제대로 대항도 못 해본 것 같아.”
싸웠다면 날에 뭐라도 묻어 있어야 했는데 드워프는 등을 보이고 죽어 있었다.
“강인한 드워프가 이렇게 겁에 질려 도망치다 죽었을 정도라면 상황은 두 가지일 거네.”
“아주 많은 수의 적이 나타났거나 아니면 싸울 엄두도 안 나는….”
내 말을 대장이 고갤 끄덕이며 받았다.
“그놈처럼 강한 상대가 나타났겠지.”
그가 말하는 그놈은 백작이었다.
“어린 것 같은데….”
대장이 죽은 드워프의 눈을 감겨주었다.
“후우….”
그가 일어나더니 말했다.
“공주님을 생각하면 다시 돌아나가 상황을 지켜보고 싶지만….”
어린 드워프가 죽어 있는 걸 보면서 우리만 살겠다고 나가기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얇은 나뭇가지도 모일수록 부러뜨리기 힘든 법이니.”
대장이 검을 단단히 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합류하세.”
대장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면서 사내들에게 외쳤다.
-힘내라!
그들이 빨라질수록 뒤쪽 여자들이 힘들 거란 걸 대장이 모를 리 없었다. 알면서 저런다는 건 일부러 거리를 벌린다는 것이다.
‘여자들만이라도 살리려고….’
이미 대장은 많은 각오를 한 모양이다.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는데?’
20분쯤 들어갔을까?
후두두두두둑!
안쪽에서 박쥐들이 날아왔다. 그게 싫었는지 소녀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그냥 박쥐일 뿐이야.”
“알아요. 그런데 박쥐 중에서는 사람의 피를 빠는 것들도 있다고 했어요.”
“적어도 저것들은 아니야. 봐, 도망치잖아.”
그런데 10여마리의 박쥐로 끝이 아니었다.
-숙여!
-허어어억!
-뭐가 이렇게 많아!
-엎드려!
동굴 깊은 곳에서부터 밖으로 향하는 박쥐의 수가 홍수처럼 늘어나더니 공간 전체를 메웠다. 그 수가 족히 수만은 넘어가는 것 같았다.
‘…왜?’
사람들이 들어와서 놀랐나? 아니면 원래 이 시간쯤 밖으로 나가 먹이활동을 하나?
후두두두두두두두둑!
이렇게 많은 박쥐는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몸을 낮추고 녀석들이 지나길 기다렸다.
-꺄아!
-싫어!
위에서 분비물 같은 것들도 떨어지고 있어서 아이들이 기겁했다.
하지만 박쥐는 우릴 공격하진 않았기에 10여 분 정도 기다리자 다시 고요해졌는데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할 때 저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일!
-드워프다!
카일이 비틀거리며 이쪽을 향해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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