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몇 번 본 적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드워프들은 경계심을 잔뜩 품고 있었다.
“인간이 이곳엔 어쩐 일이지?”
아아, 빠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뱀파이어?
-그런 괴물이 있다고?
-몇백 마리나 오고 있다고?
드워프들이 놀라자 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했다.
“그들이 너희를 노리고 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미 하나의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 산을 오르는 걸 내가 봤다.”
가장 앞에 있던 드워프가 물었다.
“그 소식을 전하러 왔다는 건가?”
“그렇다. 공주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으음….”
인간과 드워프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저 드워프들이 외부로 나돌 때 거치는 장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뱀파이어라는 몬스터에 관해 자세히 말해봐라. 어떤 특징이 있지?”
“빠르고 강해. 몇 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
“그건 인간들의 기준이겠지. 우리의 도끼엔 버틸 몬스터가 없다.”
드워프들이 자신감을 보이자 나는 활을 꺼냈다. 그리곤 저쪽 나무를 향해 빠르게 쏘았다.
【인내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며칠이나 머금었던 모든 힘이 폭발하며 회전력까지 더해진 화살은 나무를 뚫고 반대편으로 튀어 나갔다.
그걸 보며 드워프들이 놀랐다.
“근거리에서 내 화살을 맨손으로 쳐내는 놈들이다.”
이 말엔 더 격하게 반응했다.
“그 정도인가?”
검술이나 도끼를 다루는 것과 빠른 화살을 막아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드워프 몇 명이 서로 의견을 나눴다.
-그런 놈들이 수백이라면 무시할 수 없겠는데?
-어서 알려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너희의 규모가 얼마나 되나?”
만약 이들의 수가 많지 않다면 공주를 데리고 도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건 밝힐 수 없지만, 그 몬스터가 수백이라면 상대할 수 있다. 물론… 대비가 되어있을 때 얘기겠지만.”
“그러면 이럴 시간이 없을 텐데?”
내 말에 선두의 드워프가 뒤를 돌아보며 눈짓했다. 그러자 몇 명의 드워프가 앞으로 나섰다.
“너희는 즉시 모든 마을에 가서 알려라. 그 몬스터의 목적이 우리가 아니라고 해도 놈들이 접근한다는 건 알고 있어야 하니까.”
다섯 명의 드워프가 즉시 떠나가자 명령을 내렸던 드워프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카일이다. 너는 왕국과 무슨 관계지?”
“난 그저 근처를 지나던 여행자일 뿐이었어. 이런 일에 휘말릴 생각은 없었지만, 왕국이 괴멸되는 걸 봤다. 어쩌다 보니 돕게 되었고.”
그가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인간들은 어디에 있나?”
“저 아래쪽.”
“좋다. 그들도 봐야겠다.”
산을 내려가며 드워프가 말했다.
“인간의 도시엔 몇 번 가본 적 있었다. 그곳엔 적어도 수만 명이 있었을 텐데 수백의 몬스터에 당했다고?”
“그놈들은 그냥 몬스터가 아니야. 일부는 인간을 감염시키기까지 하니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애나 노인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감염되면 괴력을 발휘하고.”
“으으음….”
특히 인간은 공포에 취약하다. 대항할 수 있는 적이라면 똘똘 뭉쳐서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두려움의 근원을 건드리는 괴물들이 나타나면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좀비, 뱀파이어 같은 것들은 특히나 내 가족, 친구 혹은 나까지 감염시킬 수 있기에 더 무서울 것이다.
우리가 접근하자 보초를 서던 사내들도 소란스러워졌다. 대장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자네가 찾았군!”
저들이 나를 찾은 것 같지만 뭐 결과적으론 해냈다.
드워프들은 사람들을 보면서 끄덕거렸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란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당연하다. 침략이든 뭐든 하려고 했다면 저렇게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들을 대거 포함시키지 않았을 거니까.
대장은 드워프들에게 우리가 겪었던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 뱀파이어를 막지 못하면 주변이 온통 놈들로 뒤덮일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그런 끔찍한 몬스터가 어디에서 온 거지?”
드워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말을 하다가 대장에게 손짓했다.
“일단 가까운 마을로 가지. 그곳에서 다시 대책을 세워봐야겠다.”
드워프를 따라 1시간쯤 걸었나?
“와…. 예쁘다.”
“뭔가 풍요로워.”
“관리가 잘 되어 있군.”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서며 한마디씩 했다. 드워프만 보면 이런 섬세함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마을은 정갈하고 깨끗했으며 잔디도 보송보송 잘 자라 있었다.
약 60여 명의 드워프가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여기서 기다려. 동료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일단 드워프 마을에 들어왔다는 안정감 때문인지 사람들의 안색이 확 폈다.
드워프들이 떠나자 대장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어떻게 될 것 같나?”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저들도 뱀파이어를 보게 된다면 무시할 순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 끔찍한 것들은 공공의 적이 될 수밖에 없어.”
“그렇다 해도 드워프가 왕국을 되찾는 걸 도와줄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보셨다시피 우리에게 그리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아요.”
“저들은 본래 그래왔다네. 나서려 하지도 않고 명예나 탐욕도 없지. 그래서 남을 돕지도 않는다고 들었어.”
하지만 거래라면 얘기가 다를 것이다. 내가 만났던 드워프들은 좋은 기억만 있었으니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마을 안쪽에서 드워프들이 나왔다. 모두 손에 무기를 든 걸 보니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아까 그 카일이라는 드워프가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만 마을에 두고 우리가 나갈 순 없으니 동행한다.”
대장이 물었다.
“어디로 가나?”
“놈들을 찾는다. 인근 마을에 전달해두었으니 모두 준비하고 있을 거다.”
대장은 공주를 보면서 잠깐 고민했다. 이왕이면 여자들은 편한 곳에서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걸 눈치챘는지 공주가 단호하게 얼굴을 흔들며 일어났다. 같이 가겠다는 거다.
“알았다. 따르지.”
드워프는 남자나 여자 할 거 없이 커다란 무기를 들고 마을을 나섰는데 예리한 도끼를 보자 든든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의문도 든다.
‘이 숫자로 될까?’
드워프가 싸우는 모습을 본 나로선 이들의 전투력을 인정하긴 하지만 뱀파이어의 수가 많았고 그중에서 백작급을 이길만한 실력자가 있을지 모르는 상태였다.
‘일단은 믿어보는 수밖에.’
다른 마을도 있다고 하니 지금은 의지해야 했다.
산에서 드워프 마을까지, 또 밖으로 나서는 길은 모두를 지치게 했다. 드워프는 짧은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산에서 살아 그런지 체력이 무시무시했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속도를 한 번도 줄이지 않았다. 그걸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아이들은 안고 갔는데 여자들이 뒤처졌다.
‘길이 너무 안 좋아.’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형을 보면 내가 갈 수 있는 곳과 힘든 곳을 파악해서 움직이는데 드워프는 그 범위가 매우 넓은 것 같았다. 앞에 뭐가 있든 그냥 기어오른다. 강한 팔뚝이 있어서 웬만한 장애물은 다 넘었다.
“목적지가 어디지?”
내가 카일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대론 우리가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았다.
“저 봉우리다.”
“그곳에 마을이 있어?”
“아니, 저기라면 인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다.”
그가 손을 뻗어 몇 곳을 가리켰다.
“마을에 적이 나타나면 피우는 봉화가 있는데 그걸 보려면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지. 만약 네 말처럼 그 몬스터가 우릴 노리는 거라면 연기가 피어오를 거다.”
“아….”
“이 산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하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이유도 있고 여길 떠날 수 없는 요소도 있다. 그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산을 버리고 도망칠 바엔 여기서 다 죽는 것을 택할 거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있으니까.”
“그게 뭔데?”
“너희가 신을 모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것이 있다.”
더 물어봐도 알려줄 것 같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아갔다.
대장에게 말했다.
“저기까지만 더 힘내죠.”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꼭 같이 갈 필욘 없을 겁니다. 봉화를 확인한다고 하니 우린 시야에만 있으면 될 겁니다.”
“알겠네.”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참 편하겠는데 각 마을의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이렇게 원시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무전기 같은 거라도 들고 와야겠어.’
아주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그것도 살아서 나갈 수 있을 때의 얘기겠지만.’
지금은 생존만 생각하자.
40분쯤 지나자 카일이 봉우리에 올랐다.
“우린 여기서 기다리죠.”
사람들을 쉬게 한 뒤 나는 범이와 함께 봉우리 쪽으로 뛰었다. 확실히 체력이 괴물처럼 늘었다. 이런 산행도 이젠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빠르게 뛰어서 봉우리에 오르자 카일이 드워프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봉화가 사용되는 건 육십 년 만이지?”
“이미 두 곳의 마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야.”
“그 몬스터가 얼마나 강하기에 봉화가….”
“냉정하게 생각하자. 봉화까지 쓸 정도라면 우리도 긴장해야 한다는 거니까.”
그들의 말을 들으며 저쪽을 봤다. 두 줄기 연기가 북쪽과 서쪽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뱀파이어가 여기까지 왜 온 거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왕국을 점령했으면 거기에 있을 것이지 곧장 드워프를 찾아온 까닭이 뭔가?
말소리가 이어졌다.
“세력을 모아야 해. 우리만으론 놈들을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어디로 가서?”
“한 곳밖에 없지. 다른 마을에서도 봉화를 봤다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렇겠지.”
드워프들은 정리가 끝났는지 분주해졌다. 카일이 내게 걸어와 말했다.
“성지로 간다.”
“성지? 그런 게 있어?”
“모든 철의 근원이자 산의 심장이 잠든 곳이다.”
그게 이들의 신 같은 건가?
문득 든 생각에 물었다.
“뱀파이어가 그걸 노리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
“그건 몬스터 따위가 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오직 우리만 다룰 수 있다.”
자부심이 끓어오르는 표정에 나는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방향을 알려주면 뒤따르지. 너희 속도를 우리가 맞추는 건 불가능해.”
카일이 팔을 들었다.
“저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가 보이나?”
“눈 쌓인 곳?”
“그렇다. 그 너머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있다. 여기선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이때 다른 드워프가 외쳤다.
-봉화가 또!
-허어! 어찌 이런 일이!
동북쪽에서 세 번째 봉화가 피어올랐다. 매우 빠르게 마을이 침략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일이 이를 빠득, 갈았다.
“지금 간다고 해도 도울 수 없다. 우린 성지로 간다.”
드워프들이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자 나는 사람들에게 내려와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대장에게 물었다.
“성지란 걸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모든 종족엔 그런 전설이 있지. 하지만 그냥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네. 누구도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었으니까.”
“왜 그렇습니까?”
“엘프의 하늘 나무, 드워프의 붉은 심장 같은 걸 누가 봤겠나? 그 존재조차도 뭘 뜻하는지 모르는데.”
나는 떠나는 드워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보게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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