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하….”
저놈들 이쪽으로 오고 있었던 건가?
“왜 그러나?”
“뱀파이어입니다. 수가 약 이백 정도고요.”
“그렇게나 많나?”
두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하나는 놈들이 왕국을 떠난 우리를 쫓아왔을 가능성.
“또 하나는 본래 여기로 오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다음 목적지가 드워프였을 수도 있겠죠.”
“그, 그럼 어떻게 하나?”
“놈들이 우리가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면…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너무 오래 망설여서도 곤란하다. 우리에게도 남은 시간은 고작 하루다.
‘이걸 노리고 3일의 유예를 준 건가?’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대장이 혼자 결정할 수 없었다.
“그놈들이 여기까지 왔다고요?”
“우릴 다 잡아먹으려고!”
“흐흐흑! 이렇게 멀리 왔는데 다 부질없었어!”
사람들이 동요하자 대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데 소녀가 조용히 일어나 사람들을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딜 가든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우리는 드워프의 도움을 받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그들이 위험에 빠질 것 같다고 해서 발길을 돌린다면 야비한 처사에요. 어떻게든 우리가 먼저 드워프를 찾아서 이 사실을 알리고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전철을 밟게 해선 안 돼요.”
얼마나 급했으면 대장이 호칭마저 잊었다.
“하지만 공주님! 그러다가 우리마저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게 우리의 운명이겠죠. 하지만 우리는 여기까지 왔어요. 저는 그 이유가 어쩌면 저 괴물들을 세상에 알려 우리와 같은 피해를 다른 이들이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끄응. 뜻은 알겠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그들을 돕는다 한들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겁니다.”
저 괴물들에게 왕국이 파괴되었는데 다시 싸운다고 달라질까? 아직도 그때의 두려움이 남아 있는지 사내들의 입술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왕국은 지키지 못했지만, 세상은 아직 남았으니까….”
워낙 강경해서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한편으론 공주의 말이 맞는다는 것이 여론을 이끌었다.
대의를 위한 것.
회의가 끝나고 다시 떠날 채비를 하자 대장이 나를 불렀다.
“만약… 만약에 말이네. 상황이 급하면 자네가 공주님을 데리고 피해 주겠나?”
이젠 공주란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대장님이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하면 그분께서 나를 평생 원망하실 거네. 그리고 나는 다른 이들을 지켜야 하는 책임도 있어. 자네가 적임자네. 이런 부탁까지 하긴 싫지만…. 가까운 도시에라도 데리고 가 줄 수 없겠나?”
솔직히 하루만 더 버티면 미션은 끝나지만,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그렇게 쉽겐 넘어가지 않으리란 걸 안다.
힐끔.
저 어린 녀석도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고.
‘아무리 이미 벌어진 과거라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여기로 보내지 않았을까?
“알겠습니다.”
【미션이 갱신되었습니다.】
【이제 공주가 안전할 때까지 호위해야 합니다.】
【시간제한이 사라졌습니다.】
【미션의 갱신으로 난이도가 올랐습니다. 매우 특별한 보상이 출현할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겸사겸사 아이템도 챙기면 더 좋다.
‘이미 많이 얻었지만.’
나침반에 스킬북까지, 그러나 나는 더 강해져야 했다.
“가세, 저놈들과 반대쪽으로 가면 당분간은 부딪히지 않을 거네.”
패를 둘로 나눠서 여자와 아이들은 산을 내려가 인간의 도시로 향하고 사내들만 드워프에게 가는 방법도 생각해보았지만, 여자들끼리 다니기엔 도처에 위험이 너무도 많았다.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그놈이 보이지 않았어.’
워낙 많은 수의 뱀파이어였지만 백작은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다른 놈들이 ‘짐승’에 가까운 기세를 풍긴다면 그놈은 사람이 더 가까웠다. 멀어도 사람과 짐승은 확연히 다르다.
‘성에 남아있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일반 뱀파이어는 드워프의 숫자가 많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는 선두가 아니라 소녀의 곁에서 걷고 있었다. 혹시 기습이라도 일어나면 소녀를 데리고 도망칠 요량이었다.
“쉬자고 할까?”
“아니에요. 우린 계속 가야 해요.”
밤이 왔지만 대장이 묵묵히 길을 뚫고 가고 있었다. 어두운 산은 극히 위험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움직이자는 게 소녀의 뜻이었다.
그렇게 자정이 가까워졌다.
이젠 할 만큼 했다, 생각했는지 대장이 멈췄다.
“해 뜰 때까지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그가 소녀에게 말하자 소녀도 이제 돌에 앉았다. 그리곤 끄응, 불편한 목소릴 냈다. 인상까지 구기는 걸 보면 발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그걸 보던 내가 소녀의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벗어봐.”
“부끄럽게 어찌….”
“부끄럽긴.”
몸을 돌리려고 하자 나는 냉큼 신발을 벗겼다. 사내들이야 튼튼한 가죽의 신발을 신었지만, 소녀는 아름다움에만 몰빵한 구두 차림이다.
이걸 신고 며칠을 걸었으니 발이 작살나는 건 당연했다.
“보지 마요. 냄새나요….”
이미 너덜너덜해진 발은 용케도 지금까지 버텼네?란 생각부터 들었다.
일단 가방에서 드링크를 하나 꺼냈다.
【회생 드링크: 내외부 상처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샤워 시설이 생긴 후론 잘 쓰지 않던 드링크였지만 지금의 소녀에겐 큰 도움이 될 거다.
“반만 마셔. 나머지는 가지고 있다가 아플 때 쓰고.”
드링크를 건네주며 가방에서 붕대를 꺼냈다. 내 가방엔 상처에 쓰는 연고도 있었지만, 저 드링크면 새살이 돋아날 거다.
내가 붕대를 꺼내 그녀의 발에 단단히 감싸기 시작하자 반신반의하며 드링크를 홀짝 마셨던 그녀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아픔이 가시며 너덜했던 발이 치료되었기 때문이다.
“당신, 마법사였어요?”
“그랬으면 이 고생을 하겠어?”
풀리지 않게 붕대를 단단히 고정한 뒤 일어섰다.
“앞으론 좀 나을 거다.”
주로 구두와 닿은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그게 터지며 상처가 난 거라서 붕대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에 돌아가면 더 좋은 붕대를 사둬야겠어.’
재능마켓에 그런 게 있었던 기억이 났다. 여태까진 포인트가 별로 없어서 엄두를 못 냈지만 미션이 중급으로 오르면서 뱀파이어 한 마리에 4~6천 포인트씩 주니까 눈높이를 올려야 했다.
“자둬.”
“네, 고마워요. 우리 왕국을 위해 이렇게 힘써주신 거,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 이름도 모르네요.”
“그냥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일 뿐이야. 이름 따위, 중요한 것도 아니고.”
“정착하실 생각은 없나요? 제가 왕국을 되찾으면 우리 왕국의 수호대장으로 임명할 수 있어요.”
“그럴 마음이었다면 이미 어딘 가에 머물렀을 거다.”
“하긴 당신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제안을 받았겠죠.”
배달이나 하던 나였는데 이런 대접이라니. 황송해 죽겠네.
“쉬어.”
가방을 들고 대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범이가 따라나섰다.
“오늘은 쉬게. 우리가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겠네.”
“우리보다는 이 녀석 잠귀가 더 밝아요.”
범이의 머리를 쓸며 말하자 대장이 쓰게 웃었다. 인정한다는 거다. 게다가 놈들이 접근하면 내 눈썹도 반응할 것이니 불침번엔 나만 한 자원이 없었다.
“사람들 곁에 계세요. 다들 내색은 안 해도 불안할 겁니다. 대장님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하고 잠을 잘 거니까.”
“고맙네….”
나는 그를 등지고 더 올라가서 나무를 탔다. 아직 정상까지는 한참이라 시야 확보가 어렵다. 그나마 높은 나무라도 타야 인근을 멀리 볼 수 있었다.
‘여기 괜찮네.’
내가 웃으며 앉자 범이도 나무에 기댔다. 저 큰 덩치로 얇은 나무에서 중심을 잡는 걸 보면 항상 신기하다. 나도 순발력을 더 찍으면 저렇게 되겠지?
가방에서 육포를 꺼냈다. 그걸 범이에게 먹였다. 에너지 드링크로 충분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씹는 맛도 있어야 한다. 잘 따라주지만 범이는 동물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가방에 있던 아이템을 꺼냈다.
【엘프의 고삐(레어): 의지나 생각을 대상에 전할 수 있다. 단, 대상이 따를지 말지는 호감도에 의해 결정된다.】
“흐음.”
이전 미션에서 얻은 아이템이지만 아직 쓸 시간이 없었다.
“…가볍게 달려볼까?”
이렇게 지루하게 앉아 있느니 뭐라도 하는 게 좋지 않나?
갸르르릉.
범이도 울었다. 내 생각을 읽은 걸까?
모르겠지만 훌쩍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범이도 따라 내려왔다. 나는 곧장 범이의 몸에 고삐를 달았다. 오토바이 형태로 커스텀을 쓰지 않았다. 그냥 순수한 표범 형태의 범이의 등에 올라타서 고삐를 잡았다. 고삐라곤 하지만 소처럼 코에 구멍을 뚫고 그런 게 아니라서 범이에게 부담도 없었다.
그런데.
“아….”
생각만 했을 뿐인데 범이가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리곤 위를 향해 천천히 걷는다.
“대단하네… 이거….”
메뚜기론 해봤지만 범이는 메뚜기보다도 훨씬 고등생물이었다. 나와 함께한 시간도 오래됐다. 그래서일까? 내가 손을 쓰는 것처럼, 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범이가 움직였다. 조종한다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한 몸이 된 것 같다.
좀 더 속도를 올려봤다.
휙! 휙휙휙!
순식간에 나무들이 스쳤다. 오토바이나 자동차는 바퀴가 있기에 이런 지형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범이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뛰는 게 가능했다. 이 녀석은 태생이 맹수다. 기척을 줄이고 사냥감에 다가가야 한다.
“하하!”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이런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배달할 때도 오토바이가 내 분신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그건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범아! 저쪽으로도 가 보자!”
말은 했지만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범이는 방향을 틀어 속도를 더 높였다. 나무가 가로막으면 훌쩍 뛰어올라 피했고 길이 없으면 근처의 나무를 탔다.
산에 특화한 완벽한 맹수!
그게 범이었다.
이제까지 녀석의 존재를 너무 모르고 살았단 생각을 했다. 이 녀석도 당당한 우리 파티의 일원이었는데 말이지.
‘미안하다.’
토끼와 뛰어놀던 녀석을 여기까지 데려온 게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외쳤다.
“저기까지 가자!”
높은 곳에 올라 시원한 바람이라도 같이 쐬자고 생각하고 절벽 쪽으로 눈을 돌렸다. 큰 바위를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휙휙! 뛰어가던 범이가 절벽 아래 도착했을 때였다.
“…?”
크르르르르르르.
범이의 몸이 납작 엎드렸다. 이건 내가 지시한 게 아니었다.
“…왜?”
눈썹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그림자에서 번쩍거리는 빛이 하나 있었다. 그리곤 곧 알았다. 시야가 어둠에 적응하며 희미하게 드러내는 형체들.
그 수가 열이 넘었다.
“어? 어어어?”
그리고 인식했을 때 그들의 특징을 한 번에 알아보았다. 몸집은 우람하지만 상대적으로 인간에 비해서 작은 키.
얼굴 가득한 수염.
“드워프!”
재능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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