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저게 뭐지?’
저 멀리 산 능선에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동물인지 아니면 구름 그림자가 지난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잘못 봤나?’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더 걸리는 게 없었기에 나는 긴장을 풀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뱀파이어라….’
이 괴물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날이 올 줄은 몰랐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놈들에 대한 모든 정보가 필요하다. 사람을 공격해 피를 마시고 날렵하며 힘이 세다. 백작 정도가 되면 매우 강하고 감염도 시키는 듯하다.
‘까다로운 상대야.’
그나마 다행인 건 이날 밤이 별일 없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짹짹.
해가 떠오를 때 모두 떠날 준비를 마쳤다.
대장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오늘은 더 멀리까지 가야 할 거네.”
“그래야겠죠. 방향은 맞습니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저 산맥 어딘가에 그들의 마을이 있다는 얘긴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산이 눈에 보인다고 절대 가까운 게 아니다. 워낙 높은 산이라서 멀리까지 보일 뿐인 거다.
“가시죠.”
“출발!”
어제처럼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산길이라 험준하고 인적이 없어 수풀이 우거져있었지만 사내들은 없는 길도 만들어가며 일행들을 이끌었다.
오후쯤 계곡이 나와 잠시 쉬어가며 목도 축이고 몸도 씻었다. 그리곤 다시 걸었다.
등산이란 게 익숙한 행위지만 실상 산을 오르다 보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특히 피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는데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이 뭉치면서 점차 다리와 몸 곳곳에 알이 배긴다. 어제는 두려움과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서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아픈 줄도 몰랐다면 한숨 자고 일어나서 다시 고행길을 나서니 모두의 표정에 확연한 그늘이 드러났다.
‘좋지 않은데.’
그런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입맛을 다셨다. 처음 하층으로 왔을 때 내 얼굴이 딱 저랬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간 정글에서도 홀로 살아보고 여러 환경을 겪으며 강인해졌다. 이건 전투 능력과는 상관없는 요소다. 아무리 육체적인 능력이 강해도 멘탈이 흔들리면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틀만 버티면 돼. 이틀만.’
또다시 어두워질 무렵 우린 산의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쉬었다가 가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위치가 아니라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더는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특히 여자들이 탈진 직전이었다.
모닥불은 피울 수 없다. 밤의 불빛은 더 멀리까지 비추는 법이다.
사람들이 모여 자릴 잡자 나는 대장에게 가서 말했다.
“드워프들 말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곳이 있습니까? 평소 교류하고 지낸 도시라던지.”
“몇 곳 있긴 하지만….”
그가 여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도 좋은 꼴은 못 볼 거네. 우리 상황을 알면 노예로 부릴지도 모르고.”
“으음….”
자연에서 가장 잔인한 건 어쩌면 인간일지도 모른다. 힘이 대등하면 웃으며 지내도 한쪽이 약해지면 가차 없이 잡아먹을 것이다.
만약 드워프가 받아주지 않을 때 피할 곳을 염두에 두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물었다.
“드워프가 그 괴물들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자네는 드워프를 본 적이 없나?”
“몇 번 있긴 합니다만….”
“그들은 태생부터 전사로 자란다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맹수는 사냥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드워프도 마찬가지지. 단지 성향 자체가 지휘체계를 싫어해서 세력을 불리는 것에 한계가 있을 뿐이라 왕국을 건설할 수 없다지만 작은 집단 간의 싸움에선 월등한 무력을 갖출 거야.”
하긴 내가 본 드워프도 헬스장에서 20년쯤 굴러야 만들 수 있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키가 작다지만 오히려 타점이 낮아서 그들이 휘두르는 무기를 막기에 상당히 까다로울 수 있었다.
“그나마 우리 왕국이 동서를 오가는 길목에 있어서 그들이 가끔 지났고 우리가 핍박하지 않았으니 좋은 기억을 가졌을 거겠지. 어떤 사람들은 엘프나 드워프를 보이기만 하면 잡아서 노예로 부린다는 말도 들었으니까. 적어도 그들보단 낫지 않겠나?”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 뿐일까?
“왕께선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길 원하셨다네. 성군이셨어….”
이젠 왕을 이야기할 때 과거형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그의 핏줄이 남아 있으니 기회는 있다고 생각하는 대장이었다.
밤이 깊었다.
찌르르륵.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교대하기 위해 잠에서 깬 나는 근처의 굵고 높은 나무에 올랐다. 범이가 따라올라,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았다. 녀석이 엎드리자 목덜미를 만져주면서 저쪽을 바라보았다. 한 4시간 후면 해가 뜰 것 같다.
‘이제 하루.’
오늘 밤도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 주면 이 미션도 끝이 보일 것 같았다.
‘이젠 집보다 밖에서 자는 게 더 익숙하네.’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는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렇게 밤하늘을 보고 혹시 모를 맹수를 대비하면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낀다. 이 거대한 자연의 품 안에 오롯이 있다 보면 한편으론 내가 한없이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이 위대함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이런 사색이 늘어간다. 재능마켓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가 왜 가난한지 서글픈지 외로운지 고독한지만 사무치게 생각하다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렇게 혼자 밤을 지새워도 옆이 허전하지 않다. 김우태와 도화지가 있었다면 좀 더 시끄러웠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어느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거였을까.’
자본주의 사회였으니 돈이 인생의 목표이자 최고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사실 먹고 자고 입는 것만 해결하면 그 이상은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었다. 오늘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삶에 빠지면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그제야 하나씩 보이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시선이 저 아래의 한 지점으로 갔다.
‘저 아이겠지.’
피곤했는지 곤히 잠든 소녀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토바이 한 대 끌고 내 입에 풀칠할 만큼만 벌면 되던 삶.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책임감이란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다. 저 소녀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저 소녀는 망해버린 왕국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이 있을 것이다. 그 무게가 얼마나 될까? 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는 거, 그게 세상의 모든 부모가 겪고 있는 묵직한 마음인가?
“…후.”
밤이라서 그런지 감상에 빠진 것 같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가만히 있으면 찌뿌둥할 것 같아서 가볍게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범이는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구름도 없고 달도 밝아.’
시야가 넓고 멀다. 불침번을 서기엔 최적의 밤이었다.
이렇게 얼마나 걸었지?
“…?”
저게 뭐지?
저 멀리 시야 끝,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동물들인가?’
사슴 같은 것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워낙 멀어서 형체를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거리가 상당하기에 위협을 느끼진 않았지만 작은 점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꾸역꾸역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한참을 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범이가 있던 나무로 돌아왔다. 저쪽 하늘이 파랗게 변해오고 있었기에 슬슬 일행을 깨울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다시 아침.
“고생이 많군.”
대장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녀도 함께 와서 머릴 꾸벅 숙였다.
“오늘부터는 더 힘들 겁니다.”
이제 하루 남았다.
“이렇게 산을 보고 있으면 막연해도 우리가 저들 영역에 들어가면 저쪽에서 먼저 반응이 올 수도 있네. 그 경계까지만 가면 될 거야. 다만 산길이 험준할 테니 최대한 안전한 길을 찾아가는 걸 우선으로 두겠네.”
사내들만 있다면 다소 위험한 곳도 거침없이 가겠지만 아이와 여자들이 많았다. 괜히 사고라도 터지면 급격하게 사기가 떨어질 것이었다.
“가자!”
여정이 계속되었다. 이상하게도 오전엔 시간이 잘 안 가는 기분이다. 점심을 넘기면 저녁까진 금방인데 아침엔 몸이 더 무겁다. 아마도 어제의 피로가 더해져서일 거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기에 지금 어떤 문제가 있다면 상황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기댈 수 있는 것이 없다.
머리 위로 해가 쨍하고 등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어갈 때 첫 번째 휴식이 찾아왔다. 열심히 걸었더니 어느새 이렇게 올라왔다.
후우우웅.
등을 식혀주는 바람이 더 강해졌고 정수리가 좀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
내게 다가온 대장을 보며 내가 말했다.
“아직 한참 더 가야겠습니다.”
산맥이 어찌나 크던지 얼핏 여기서 보이는 봉우리만 10개가 넘었고 그 어느 것 하나 우리가 있는 곳보다 낮은 게 없었다.
“이제부터는 조심해야 하네. 몬스터들이 나타날 수도 있어. 우리 인원이라면 놈들도 쉽사리 덤비지 못하겠지만 굶주린 놈들이라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네.”
고블린 같은 것들이야 나오는 족족 내 화살의 먹잇감이 되겠지만 그 수가 많다면 이쪽도 피해가 있을 수 있어서 나는 범이와 함께 더 올라갔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네.’
경기도에서 서울에 막 진입한 것 같았다. 이 산맥이 서울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큰진 모르겠지만 시야가 닿은 곳까지 끝나질 않았다.
‘여기서 드워프를 찾아야 한다라….’
이건 뭐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도 아니고 너무 낙관적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몰라볼 뻔했다. 저 깊은 산 나무들 사이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었다.
‘어제 그?’
줄지어 이동하고 있는 작은 점들은 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어젠 동물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가방을 내려놓고 드링크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대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나는 일어나서 팔을 뻗었다.
“저거, 보이십니까?”
그가 내 손끝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고갤 돌렸다.
“…노안이 와서 저렇게 먼 건 보이지 않는다네. 뭔데 그러나?”
“못해도 수백 이상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제부터 계속 이동하고 있었고요.”
“봄이 오고 있으니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동물이겠지.”
“저도 처음엔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가방을 뒤져 드링크를 하나 꺼냈다.
【매의 눈 드링크(레어): 복용하면 30분간 시력이 월등하게 좋아진다.】
“확인을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뭔가?”
“여행하며 얻은 것 중에 하납니다.”
드링크를 마시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는 다시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손가락을 눈을 비벼보아도 뭐가 있다는 건지 안 보이는 표정이었다.
【시력이 상승합니다.】
하지만 나는 기이이이잉, 눈에 피가 쏠리는 느낌과 함께 저기 있는 것들의 모습이 망원경으로 보는 것처럼 확대되어 보였다.
“…흡….”
그와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나?”
그것들은 무수하게 많은 뱀파이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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