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추가 타격이 발동했습니다】
【대상이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크윽…?"
화살이 놈의 팔을 뚫고 들어가 명치에 파고들었다. 강력한 회전력에 놈의 몸이 뒤로 밀렸을 때 커다란 그림자가 녀석을 옆에서 덮쳤다.
캬앙!
"범아!"
은색 나노 갑옷으로 무장한 범이가 놈의 어깨를 물고 흔들어댔다.
"이 짐승이…!"
이런데도 놈은 기세가 죽지 않았다. 바닥을 구르면서도 범이의 몸을 발로 걷어찼는데 범이도 지지 않고 싸우다가 어느 순간 훌쩍 뒤로 뛰었다.
크르르르르.
그간 범이도 우리와 다니면서 싸움의 기술이 늘었는데 전엔 먹기 위해 사냥감을 공격했다면 이제는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나는 범이 뒤에서 화살을 겨누며 말했다.
"물러서. 이번 화살은 네 심장을 꿰뚫을 거다."
"넌 뭐지? 이 왕국의 수호신인가?"
놈이 범이를 보며 의아한 듯 고갤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생물인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거든?
"떠나. 쫓지 않겠다."
"쫓는다는 건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말이고."
녀석이 피식 웃으며 팔을 늘어뜨렸다. 어느새 불은 꺼져 있었고 여기저기 박힌 화살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밖에 얼마나 많은 내 하수인들이 있는지 아나?"
"몰라. 그딴 건."
"알 수도 없을 테지."
녀석이 빙긋 웃으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말투를 느긋하게 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곧 그분께서 도착하신다. 나는 그분을 위한 성을 마련할 예정이었다."
"그분?"
"모든 피의 맹약에 정점에 서신 분이다. 그러니 떠나려거든 지금 너희가 가라. 쫓지 않으마."
"하…?"
"당장 너희 모두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겠지만…."
놈이 나와 범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짙게 웃었다.
"시간이 길어지는 건 나도 바라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널 뭘 믿고?"
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
낚아채서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펜던트다. 하지만 색이 달랐다.
【피의 증표를 얻었습니다.】
【미션이 갱신됩니다.】
【백작의 조건을 받아들일 시 한시적 동맹이 체결됩니다. 단,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동맹을 파기할 시 매우 큰 페널티를 감수해야 합니다.】
놈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어때? 딱 사흘 준다. 힘껏 도망쳐보라고!"
【한시적 동맹을 받으시겠습니까? 여부에 따라 미션이 갱신됩니다.】
"흐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탈출하려면 지금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내가 물었다.
"여기서 널 죽여버려도 내겐 손해가 없는데? 설마 저놈들을 믿고 그래?"
놈이 저쪽 중급 뱀파이어를 보면서 코웃음 쳤다.
"저런 하급한 것들은 내 일족에 들이지도 않는다. 오직 그분을 위해 같이하고 있을 뿐."
거짓말 같진 않았다.
"좋아. 놈들을 물려."
놈이 웃으며 뱀파이어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놈들이 우르르 계단으로 뛰어갔다.
【미션이 갱신되었습니다. 이제 사흘간 한시적 동맹으로 뱀파이어의 공격을 받지 않습니다.】
"최대한 멀리 가는 게 좋을 거야."
놈이 웃으며 저쪽으로 걸어가자 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내들이 급히 뛰어왔다.
"자네는 누군가? 우리 왕국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경비대장은 놀랍다는 듯 내게 물었다.
"여행자입니다."
"그런가? 어디서 왔나?"
"엘프들의 땅에서요."
"으음, 그런 신비한 곳이 있다는 얘길 듣긴 했었지. 지극히 폐쇄적이라고 들었네만."
"시간이 없습니다. 놈이 3일의 시간만 허락했습니다. 도망쳐야 해요."
"우리가 여길 떠나 어디로 갈 수 있겠나?"
"길바닥이라도 여기서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가 고민하자 사내들이 외쳤다.
"대장님! 여자와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사흘이면 꽤 멀리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당장 떠나야 합니다!"
대장은 갈등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알겠다. 어서 모두를 데려와라. 당장 떠난다."
사내들이 황급히 저쪽으로 뛰어가자 대장이 내게 물었다.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럴 필욘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도 분위기는 느꼈을 것이다. 백작 같은 놈 하나만 더 내려와도 여긴 끝장이었을 거다.
'놈이 물러난 이유가 있겠지.'
일간 그놈이 다른 뱀파이어를 벌레처럼 바라보던 눈빛이 기억난다. 게다가 '그분'이라는 놈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션으로 묶였으니까 시간은 벌었어.'
그냥 말로만 했으면 나도 믿기 어려웠겠지만 우정의 증표와 똑같이 생긴 것까지 받았고 미션이 갱신됐다.
"혹시 인근에 갈만한 곳이 있습니까?"
"몇 곳 있긴 하지만 그 마을들이 아직도 건재하리란 보장은 없네."
그래도 여기가 창고 비슷한 지하라서 먹을 건 충분히 생길 수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30분쯤 기다렸을까?
사람들이 봇짐을 메고 하나둘씩 이쪽으로 걸어왔다.
"제가 먼저 앞장서죠."
"우릴 위해 이렇게 나서주다니, 고맙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여기서 벗어나면 그때 다시 얘기하죠. 우선은 말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의 행선지 같은 것들을 저들이 알아선 안 됩니다."
"알겠네. 내, 단속시키지."
생존자는 100여 명 언저리 정도 되었는데 하인들이 절반이라 짐을 나르거나 아이들을 업는 건 익숙해 보였다.
나는 뱀파이어들이 내려왔던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아무리 미션을 받았다고 해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하 1층에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올라오니 아무런 기척이 없다. 뱀파이어가 모두 지상으로 올라가 버린 것 같았다.
"여긴 뭐하는 곳입니까?"
내가 둘러보며 묻자 대장이 말했다.
중요한 물건이나 다른 왕국에서 받은 특산품 같은 것들을 저장하던 곳이네. 아래는 주로 곡식이나 술이라면 여긴 물건을 놓았지. 고급 가구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네.
"그렇군요."
나는 좀 더 걷다가 말했다.
"작고 귀한 것들은 챙기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왠지 당분간은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거든요."
"흐으… 이렇게 떠나야 한다니."
"흐흐흐흑!"
"아빠! 집에 가고 싶어요!"
아이들과 여자들이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내들은 아직 뱀파이어의 모습을 잊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저 어딘가의 구석 그림자에서 놈들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뛰쳐나올 것 같았다.
"가야 합니다. 아가씨."
"반드시 성을 되찾을 겁니다!"
나는 창고를 뒤지던 사내들이 돌아오자 다시 걸었다. 대장이 물었다.
"여행자라고 했는데 우리 왕국엔 무슨 볼일이었나?"
계속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본래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성격이라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곧 떠날 예정이었고요. 그런데 괴물을 봤습니다. 전에도 한 놈 본 적이 있었거든요. 놈들은 불에 약하고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파괴하면 죽습니다."
"하! 이 괴물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는가?"
이 세상에서는 아니었지만, 이쪽에서 넘어온 건 확실하지 않나?
"문제는 이런 약한 괴물들이 아닙니다. 놈들의 우두머리가 얼마나 강한지 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놈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하는 이유고요."
그러고 보니까 지금이 대략 언제쯤인질 모르겠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하늘을 날아다니는 커다란 물체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괴물처럼 끔찍한 벌레들은요?"
"그런 것도 있나?"
피라미드가 날아오기 전인가?
"엘프나 드워프는 몇 번 봤지만 그런 벌레는 소문도 들어보지 못했네."
"그러시군요. 다행입니다."
뱀파이어도 강하긴 하지만 피라미드를 타고 온 놈들은 규격 외다. 사람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세상의 존폐를 논해야 한다.
말을 하다 보니 계단이 보였다. 여기가 지하 1층이라고 했으니 이제 지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가겠습니다."
"부탁하겠네."
나는 활을 겨누며 위로 올라갔다.
휘이이이이이이잉.
바람이 불어서 안으로 들어왔다. 눈썹이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위험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진 않았다.
"…."
스윽 고갤 내밀었다.
조용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유령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저쪽으로 부서진 성이 보였다.
'어라? 저거, 어디서 봤는데?'
성의 모습이 낯익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지난 기억이 스쳤다.
'비궁?'
첫 번째 체류 시간 획득 미션이자 설원에서 비궁으로 통했던 그곳.
하지만 그때 본 성보다 묘하게 분위기가 신선했다. 더 젊다고 해야 하나? 30년 된 아파트를 보다가 이제 막 지은 신도시에 온 것 같다고 표현하면 비슷할 거다.
'설마 이렇게 다 연결되는 건가?'
정글 미션에서도 피라미드로 이어졌고 그 피라미드 안에서도 과거로 갔었다. 이번이 여섯 번째 미션이지만 나는 다시 첫 번째 장소로 돌아와 다른 시간과 시각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어떤 굴레 안에서 하나씩 실타레를 풀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뒤를 보며 물었다.
"나오셔도 됩니다."
대장이 사람들과 지상으로 나오며 말했다.
"지나치게 조용해서 더 기분 나쁘군."
옆으로 사내가 다가와 대장에게 말했다.
"왕께선 전사하셨지만, 아직 왕비님께서 어딘가에 숨어계실지도 모릅니다. 모셔야 하지 않을까요?"
대장이 움찔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다. 그럴 시간이 없어. 놈들이 언제 변심할지도 모르고. 무조건 지금 나가야 해."
"알겠습니다."
대장이 지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다가 금발의 소녀를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미션이 갱신됩니다.】
【공주를 보호하라.】
【공주는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그녀를 안전한 곳까지 호위하세요.】
나는 뒤를 보았다.
'변장한 건가?'
아까 하녀라고 생각했던 소녀를 보는 대장의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사흘간 뱀파이어는 우릴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호위'라는 건 또 다른 적이 있다는 뜻인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 또한 그리 간단한 미션은 아니었다.
"가시죠. 서둘러야 합니다."
내가 긴장하며 말하자 대장도 크게 고갤 끄덕이더니 잠시 저쪽 성의 꼭대기를 보다가 어렵게 머릴 둘렸다.
그가 말했다.
"여행자라고 했으니 나보다 지리에 밝을 것인데 우리가 머물 마땅한 곳이 있나?"
그걸 내가 알 턱이 있나….
"최대한 멀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만한 왕국이 무너질 정도로 놈들이 강력하니 병력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의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런 도시가 인근에 있습니까?"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사흘거리는 아니네. 말을 타도 열흘은 걸릴 곳들이라서."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엘프와 드워프를 보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주는 아니지만, 그들이 여관에 묵고 가는 일이 있다네."
"혹시 그들이 있는 곳을 아십니까?"
"엘프들은 워낙 숲에서 은밀하게 살고 있어서 모르지만 드워프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진 알지. 혹시 그들에게 부탁을 하려는 건가? 하지만 드워프는 사람들과 친해지려 하지 않는다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아는 드워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