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뭐, 어찌 됐든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머릿속으로 여길 뚫고 나갈 전략을 세웠다.
'지난 미션 때 얻은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해.'
그간 각종 드링크도 많이 쌓였고 아이템도 꽤 얻었는데 이것들을 활용할 좋은 무대로 여기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피라미드를 나와 큰맘 먹고 포인트를 투자해서 산 스킬!
【무빙 샷!: 걷거나 뛰며 활을 쏠 때 조준점을 보정 한다.】
최근 미션을 하며 가장 좋은 점이라고 한다면 포인트가 예전과 달리 많이 쌓인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뱀파이어 한 마리에 4,000포인트였으니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근사한 아이템이나 스킬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옛 궁사의 활대 장식: 활에 장착하면 높은 확률로 추가 타격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옛 궁사의 화살통 문장: 한 번에 3대의 화살을 꺼낼 수 있다.】
아직 손에 익지 않았지만, 아이템으로 보강된 공격력도 완전히 적응해야 했다.
무엇보다….
【불바다 드링크: 반경 10미터에 불길을 일으킬 수 있다.】
【폭탄 드링크: 반경 10미터에 강력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물 폭탄 드링크: 반경 10미터에 홍수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이것 외에도 수십 종의 드링크가 내 가방에 들어있었다. 적재적소에 사용한다면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션 정보를 무시해선 안 된다. 여긴 '지하 3층'이라고 했었다. 이게 지하 4층으로 이어질지 혹은 2층이 될지 아직 모르지만 다음을 생각해둬야 한다는 뜻이었다.
'불은 잘 붙네.'
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샤샤샥, 샤샤샤샥!
놈들이 더 멀리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나는 번뜩 스치는 좋은 생각을 곧장 실행에 옮겨보기로 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놈들은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까지만 물러나서 도사리고 있었다. 불이 꺼지면 언제든 달려들 생각일 거다.
화살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화살 끝에 가방에서 꺼낸 드링크를 매달았다. 줄이나 끈 같은 것들도 내 생존 가방에 들어있기에 어렵진 않았다. 이래서 준비가 철저할수록 좋은 거다. 초창기 내가 들고 다니던 가방엔 먹을 것 위주였다면 이제는 진짜 필요한 것들만 자릴 잡았다.
'무게가 달라졌어. 촉을 높이 들어서 더 강하게 쏴야 돼.'
화살이란 놈은 굉장히 민감하다. 균형이 조금만 틀어져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이런데 촉에 드링크까지 매달았으니 자칫 잘못하면 몇 미터 날아가다 말고 바닥에 고꾸라질 수도 있었다.
'긴 거리가 아니니까 저기까진 날아갈 거야.'
100미터, 200미터를 쏴야 한다면 연습 없인 힘들겠지만, 놈들과의 거리가 고작 10미터다. 이 정도도 감을 못 잡으면 나는 그간 헛짓한 거다.
'후…. 해보자.'
설명은 길었지만 내가 드링크를 꺼내 활촉에 매달고 시위를 당긴 건 한 호흡만이었다. 이건 활도 손에 익은 덕분이기도 했지만 드링크 역시 매일 장난감처럼 만졌기에 이질감이 없었다.
투우웅-!
화살이 날았다. 역시 묵직함이 완전히 달랐다. 마지막 순간에 촉을 더 들지 않았다면 10미터도 못 갔을 거다. 하지만 시위를 놓음과 동시에 활을 치켜들었고 활을 벗어난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어둠으로 날아갔다.
그리곤 곧장!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드링크가 터져버렸다.
【폭탄 드링크를 사용했습니다.】
【4,000P를 얻었습니다.】
폭발에 휘말린 뱀파이어 한 마리가 즉사했다.
캬아아아!
크아!
히이이이익!
나머지 놈들도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팔이나 다리가 날아가 버린 녀석도 있었고 몸에 불이 붙어서 바닥을 구르는 뱀파이어도 있었다.
'효과 죽이네!'
처음 써본 것이긴 했지만 어마어마하다. 화살이 날아가지 못하고 내 앞에 떨어졌다면 끔찍한 경험을 할 뻔했다.
"차아-!"
앞으로 성큼 뛰어가며 활을 쐈다.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다.
쌔애애애애액!
피피피피핑!
폭발 덕분에 시야가 확보되었고 놈들도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찬스였다.
【무빙 샷!이 활성화 중입니다.】
빠른 걸음으로 뛰어가며 12대의 화살을 날렸다. 폭발 때문에 천장이 무너지면 어쩌지? 잠깐 걱정했지만, 흙더미가 조금 떨어져 내릴 뿐 앞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뱀파이어를 사냥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뱀파이어를 사냥했습니다.】
뱀파이어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갔다.
'몇 마리째지? 20? 21?'
사냥한 뱀파이어 숫자를 카운트하면서 속도를 더 높였다. 빠른 걸음으로 쭉쭉 나아가면서 샷의 정확도를 높여갔는데 뱀파이어의 심장을 뚫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야 확보가 더 필수였기에 벽이나 천장, 바닥에 화살을 박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4,000P를 얻었습니다.】
뱀파이어 그림자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저 끝 지점에서 어른거리는 놈들이 사라졌는데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순 없었기에 계속해서 활을 쏘며 전진했을 때,
티익-!
앞으로 날아가던 화살이 벽에 막혔다. 내가 옆을 겨냥했다는 게 아니다.
'다 왔나?'
좀 더 걸어가자 계단이 보였다. 위로 향하는 것이었다.
"후…."
나는 벽에 붙으며 한숨을 돌렸다. 여기까지 오며 얼마나 집중력을 유지했는지 등이 축축했다.
'올라가네.'
계단에 살짝 진입하며 위를 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 공포심을 자극했다.
"흠…."
내 가방 속 드링크를 믿자. 여차하면 전부 불바다를 만들어버릴 테다.
두근, 두근!
그렇다 해도 뛰는 심장을 어쩔 순 없었다.
하나씩 계단을 올랐을 때,
【지하 2층에 진입했습니다.】
메시지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쫄깃하네.'
미션의 패턴을 생각하면 3층과 2층이 뭐가 달라도 다르니까 구분해뒀을 거다.
나는 화살을 앞쪽으로 쏘면서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화르륵!
횃불처럼 박힌 불화살이 길을 안내해주었는데 앞쪽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불길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한기?'
바람이 차다. 본래 이런 지하는 서늘함을 유지하지만, 이 바람엔 냉기가 깃들어있었다.
'끝인가?'
저 앞 계단이 더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면서 긴장을 극한까지 유지했다. 그리곤 곧장 뛰었다.
타타타닥!
만약 저 뒤에 적이 숨어있다면 대비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범이도 내 뒤를 따르며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왔다.
후욱-!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서 활을 겨냥했다.
"…."
여전히 어두운 지하공간이었다.
슉슉!
화살이 사방으로 날아가며 시야를 밝혔다.
후룩! 후루룩!
역시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범아! 피해!"
내 바로 옆에서 벽을 뚫고 나오는 어떤 형체를 느끼면서 나는 버럭 외쳤다.
규웃?
범이가 머리를 갸웃거릴 때 나는 적을 향해 화살을 쐈는데 불화살은 허무하게도 어떤 형체를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어… 어?"
당황해서 다시 활을 겨눴는데 벽에서 나온 희끄무레한 그것은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스르륵 미끄러져서 반대편 벽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야?"
유령? 귀신? 뭐라고 불러야 하나?
"너도 봤지?"
규우웃?
범이가 계속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보았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던지라 침을 꿀꺽! 삼키며 기다렸다. 뭐랄까? 다리가 굳었다고 해야 하나?
"…으음."
3분, 5분….
'그게 뭐였지? 남자?'
아까 만난 걸 떠올리며 대기하는데 앞쪽에서 스르륵, 형체가 또 이쪽으로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흡!"
활을 겨눴다. 어쩌면 이런 물리적 공격이 전혀 듣질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이번엔 젊은 여자의 형상이었다. 그게 내 쪽으로 바람처럼 다가오자 나는 옆으로 물러서며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규우우우?
이번에도 범이는 전혀 보질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냐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공격 의사가 없어.'
여자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계속 이 자리에 있을 순 없었기에 벽에 밀착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스윽.
여자가 내 옆으로 지나갔다. 그녀는 일정한 속도로 그렇게 뒤쪽까지 가다가 사라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알 수 없지만 위험하진 않았기에 나는 계속 어둠을 뚫고 나아갔다.
.
.
.
"팀장님…."
강나은 경위가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조금 있다 얘기하지."
팀장은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그의 앞엔 사체가 한 구 있었다.
사람이 죽어 있다는 신고가 들어온 건 오늘 아침 6시 5분경. 출근길 40대 남성이 신고했는데 광수대가 출동한 건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난 후였다.
강나은 경위와 팀장에게도 곧장 연락이 왔다.
장갑 낀 팀장의 손가락이 피해자의 목에 닿았다. 선명하게 난 2개의 구멍은 송곳으로 찌른 것 같았다.
"으으음…."
팀장이 신음하며 일어났다.
"어떤 미친 자식이…."
피해자는 경동맥을 정확히 공격당했다.
강나은 경위가 급히 물었다.
"주변에 혈흔이 전혀 없어요. 최소 1리터 이상의 피를 흘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더 이상한 건 목이나 다른 옷가지에도 혈흔이 튀지 않았다는 거예요. 마치 누가…."
"쭉쭉 빨아먹은 것 같지."
"아, 아니. 설마 그러진 않았겠지만 대체 왜 이런 건질 모르겠어요."
"혈액형 분석이 나오면 알게 되겠지."
"설마 혈액을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 건가요?"
"몰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해."
하지만 팀장도 그런 단순함 범죄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광수대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니까.
저쪽에서 현장을 살펴보던 광수대 윤일권이 팀장에게 걸어왔다.
"이상하죠?"
윤일권이 사체를 내려보며 묻자 팀장도 입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다.
"저항한 흔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격렬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여기로 옮겨진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이거 보이십니까?"
팀장이 땅을 가리켰다.
"발로 비빈 흔적입니다. 보통 뒤에서 목이라도 잡히면 끌려가면서 이런 족적을 남기죠. 버티려고 했을 테니까요."
윤일권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미친놈이 뭘 노린 걸까요?"
"피해자 신원은 나왔습니까?"
"인근에 사는 29세 여성입니다. 새벽에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데 CCTV를 분석해보니 5시 33분에 화장실을 가려 했는지 편의점에서 나왔다가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그 후엔 여기서 발견됐고요?"
"그렇습니다. 이동 경로의 블랙박스나 CCTV를 찾아보곤 있지만, 그녀가 스스로 여길 올 이유는 없습니다. 편의점에서 80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여긴…."
그녀의 집으로 가는 동선도 아니었고 주변에 특별한 게 없었다.
팀장은 저쪽으로 보이는 탄천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다른 의도는요?"
이런 외진 곳에서 젊은 여자가 살해됐다면 유추해볼 수 있는 가정이 있었다.
"전혀요. 보시다시피 단추 하나 풀리지 않았습니다."
특이한 혈액을 노린 범죄일까? 그게 아니라면 원한이나 돈?
창백한 여자는 일반 시체보다도 더욱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기괴한 건 여자의 표정이었다.
"마약 반응이 나오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여자는 극도의 쾌락을 느꼈던 건지 감지도 못한 눈동자는 한껏 위를 향하고 입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