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머엉.
참으로 오랜만에 집으로 가는 길, 현실에선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지만 몇 달 만에 지하철을 타는 것 같았다.
【에너지 드링크를 얻었습니다.】
【28,000P를 얻었습니다.】
【축복받은 팔찌를 얻었습니다.】
【날카로운 사마귀 앞다리를 얻었습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재료와 아이템을 얻었고 우린 각자의 쓰임에 맞게 분배한 뒤 재능마켓을 나왔다. 이젠 재능마켓을 집처럼 여기자고 말했었지만 아직은 집이 편한 것 같다. 이렇게 집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몸이 노곤해지는 걸 보면.
'진짜 힘들었어.'
굉장히 스팩타클했던 경험을 한 것 같은데 모든 것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꿈을 꾼 것처럼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몇 가지 정보도 얻었고 아이템도 많아. 무엇보다 가이가 동료가 됐지.'
믿기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이 모든 건 우리 힘으로 이겨냈으니 뿌듯한 마음도 든다.
-이번에 내리실 역은 서울대입구, 서울대입구역입니다.
집에 오자마자 곧장 누웠다.
"하…."
이 작은 침대가 세상 무엇보다도 포근하고 평화로웠다.
막 눈을 감으려고 하는데 톡이 왔다.
-다들 잘 갔어?
우리 재능마켓 단톡방이다.
-씻고 누움! 민준이도 도착할 때 됐지?
믿어지지 않는 일을 공유하는 지구상의 단 세 사람.
'혼자일 때 보단….'
확실히 낫단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적어도 외로움은 사라졌으니까.
.
.
.
며칠 후.
학교에 왔다. 본래 우리 학년 수업은 없는 날이었지만 어머니께서 부탁하셨다. 함께 봉사하시는 분께서 감기, 몸살에 걸리는 바람에 일손이 부족하단다.
그간 체육관도 다니고 재능마켓에 가서 훈련도 했는데 다음 체류 시간 미션을 나나 김우태 중에 맞추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직 로드나 퀸에 대한 단서가 없었기에 도화지는 계속해서 냄새에 신경 쓰고 있었고 우리가 이러는 동안에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와, 민준이라고 했나? 힘이 어쩌면 이렇게 좋니?"
채소 상자 5개쯤은 거뜬히 들어 옮기는 나를 보며 아주머니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거 아세요? 민준이가 공부도 그렇게 잘한대요."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공부까지 잘해! 민준 엄마, 정말 좋겠다!"
어머니는 아줌마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는데 학교 급식이 얼마나 맛있으면 밥 먹으러 학교 오는 애들까지 생겼다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한다.
'이래도 되나?'
생각이 들다가도 큰 사건 때문에 힘들었을 애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도움은 줘야 한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요즘 도화지와 김우태의 미션까지 함께하고 있어서 그런지 포인트 벌이가 생각보다 수월해졌다.
급식실에서 어머니를 도와 이것저것 무거운 것도 들어 나르고 설거지도 하다 보니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어머니도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내심 즐거우신 것 같았다.
-민준 엄마! 고생했어요! 내일 봐요!
-민준이도 수고했어!
모든 일이 끝나고 어머니와 전철역으로 걸어가는 길.
"힘들지 않아?"
어머니는 가게로 향하신다. 학교 일은 봉사일 뿐 어머니는 어엿한 가게 사장님이셨다.
"힘들긴. 다들 같이하는 일인데. 가게도 이모들이 잘해줘서 엄만 할 일도 별로 없어."
동네 최고 맛집으로 거듭나고 있어서 종업원도 더 뽑았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오랜만에 밥 먹고 갈래?"
"아니. 독서실에서 모이기로 했어."
"화지랑?"
"…아냐."
"호호호! 괜찮아. 엄마는 네가 연애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맨날 공부만 하지 말고."
그 연애를 도화지랑 하고 싶진 않다고….
"늦을지도 몰라. 이제 기말 준비해야 해서."
"그래, 늦으면 전화하고."
"응."
어머니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 개찰구를 지났다. 메인 미션이나 서브 미션 때문만이 아니라 이제는 무조건 재능마켓에 가서 시간을 소비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그렇다고 한방에 1,000시간씩 써버리면 정신적으로도 지치고 현실감도 사라져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야금야금 줄여야 했다.
나는 요즘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내가 이것마저 놔버리면 이제는 학교나 현실의 삶 따위는 영원히 놓아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투욱.
-야! 조심해!
"죄송합니다!"
어깨가 누군가에게 닿았나 보다. 화살 한 방이면 끝장내버릴 수 있을 상대였지만 나는 무조건 싸움이 커지지 않게 먼저 사과한다. 왜 프로 격투기 선수들이 싸움을 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 여차하면 저 아저씨가 죽을지도 모르는 거다.
'오늘따라 취한 사람들이 많네.'
강남역.
지하상가를 걸으며 사람들을 피했다.
여기엔 굉장히 다양한 상점들이 빼곡했다. 꽃집, 음식점, 디저트 가게, 액세서리, 의류….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즐비한데 물건들을 보다 보면 최근 유행이나 계절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관심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신간이네.'
작은 서점 앞.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파르르륵.
책장이 넘어간다. 눈으로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어가는 습관이 생겼는데 약이나 의학, 내가 알아야 할 전문지식에 관련된 건 구입해서 재능마켓으로 들고 가는 편이었다.
"13,000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피라미드의 비밀이라는 책을 샀다. 전의 미션 때문인지 이쪽으로도 관심이 생겼다.
책을 사서 5번 출구로 걸어가는데 도화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누나."
-나 오늘은 할머니하고 산책하러 갈 거야. 날씨도 좋고 할머니 생태도 좋아서!
"그래요."
우리가 세상을 위해 싸우게 됐다지만 각자의 소중한 시간도 지켜야 하는 법이다.
"우태 형은요?"
-몰라? 너랑 연락 안 했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통화를 마치고 재능마켓으로 올라갔다.
강남.
이젠 매일같이 드나들다 보니 여기 주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집들이 몰린 곳이라지만 내겐 다른 세상과 통하는 입구 같은 곳이라서 그런지 느낌이 조금은 달랐다.
【재능마켓에 입장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방에서 범이가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저쪽으로 가서 자릴 잡고 누웠다.
'난입 미션은 없고.'
들어올 때마다 긴장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도 드링크부터 만들어볼까?'
요즘 나는 반복적으로 내가 가진 소재들을 조합해서 드링크를 만들어대고 있었는데 아이템 하나가 최소 몇만 포인트를 요구하지만 드링크는 더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모든 드링크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꼭 필요할 때 쓰면 철갑 드링크처럼 매우 유용했다.
【드링크를 숙성합니다.】
나는 내 전용 창고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수많은 드링크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일전에 미션에서 철갑 드링크를 드워프에게 하나 주었는데 그게 두 배로 돌아와서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은 회복이고 이쪽은 특수 능력, 이쪽은 방어력이나 공격력을 올리는 거….'
드링크를 분류해서 정리한 뒤, 돌아섰을 때 체류 시간 메시지가 떴다.
【재능마켓 체류 시간이 11시간 남았습니다.】
이미 숙지하고 있었기에 나는 끄덕이면서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다음엔 뭘까?'
나는 늑대인간들이 나오던 차우산 미션까지 했었다. 그래서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도화지나 김우태가 내가 지나온 길을 간다는 걸 알았으니 다음 수행해야 할 내 미션이 무척이나 중요해졌다.
그리고 이 시점에 한가지 고민이 더해졌다.
'혼자 하는 게 낫겠지.'
도화지와 김우태가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곤 하지만 나에 비해선 아직 한참 모자랐다. 내가 그들의 미션을 도와주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 반대가 되면 두 사람이 위험할 수 있었다.
【재능마켓 체류 시간이 7시간 남았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도 정리하면서 아까 사 온 책을 읽었다. 그냥 앉아서 읽는 게 아니다. 고정 사이클을 타고 다리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이제 5시간….'
오늘은 이렇게 사이클을 하면서 시간을 다 쓸 생각이었다. 어느 한 곳에서 10시간 넘게 소비한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 적응이 돼서 그런지 그리 지치진 않았다.
'여섯 번째 필드가 나오겠지?'
설원, 정글, 홍수지역과 이어진 용암지대. 그리고 차우산까지 거쳤으니 이제 더 새로울 건 없다고 짐작하면서도 재능마켓은 항상 내 상상력을 뛰어넘는다는 걸 알기에 대비하거나 준비할 수 없다.
【재능마켓 체류 시간이 2시간 남았습니다.】
"후…."
나는 사이클에서 내려와 땀을 닦으며 가방을 새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수처럼 무거운 건 조금만 담는다. 대신 에너지 드링크와 각종 생필품을 넣었다. 캠핑을 자주 다니면 짐 싸는데 고수가 되는 것처럼 내 생존 가방도 진화하는 중이었다. 작은 주머니들엔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작은 걸 넣는다. 삽과 망치는 오른쪽과 왼쪽에 달아두고 활통과 활을 어깨에 멘다.
일종의 의식처럼 경건하게 준비를 마치자 이제 체류 시간이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가자.'
나는 주저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미션을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래."
범이가 내 옆에 섰다. 김우태와 도화지는 없었지만 범이가 있으면 고독하진 않다.
【스테이지로 입장합니다.】
【미션을 완료하기 전엔 탈출하실 수 없습니다.】
반투명한 경계에 들어가자마자 풍경이 확! 바뀌었다. 시각적인 것보다는 온몸의 솜털과 후각이 먼저 반응한다.
【체류 시간 미션이 중급으로 올랐습니다.】
【이제 미션의 난이도가 상승합니다.】
【필드에서 좀 더 높은 확률로 고급 아이템이 출현합니다.】
"아…."
체류 미션이 다음 단계에 진입했다. 설원부터 차우산까지가 초급이었던 것 같다.
보급품이 들어있는 상자가 보였다.
가서 열어보았다.
언제나 이 상자는 참으로 빈약한 것들이 들어있다.
"…."
오늘도 역시 빈 병 몇 개와 쇠망치 하나가 있었는데 망치는 있으니까 병만 챙겨서 받았다.
"가자, 범아."
규우우우.
범이가 어슬렁어슬렁 몸을 틀자 나도 출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두운데?'
베이스캠프에서 나가면 주로 외부로 통했기에 밝아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화르르륵!
화살에 불을 붙여 활에 끼웠다. 시야도 확보하면서 적이 나온다면 즉각 대응하려는 것이다.
【안전구역을 벗어나셨습니다.】
【인내가 발동 중입니다.】
인내 스킬은 활을 오랫동안 쓰지 않을수록 강력한 첫 발을 쏠 수 있는 스킬이었다. 매우 유용하지만 빗나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기도 했기에 조준을 잘해야 했다.
반동을 없애기 위해서 호흡을 멈춘다.
그리곤 앞으로 걸어갔을 때 내 앞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 냄새….'
아래를 보니 축축한 습기가 가득했다.
'지하인가?'
범이도 발이 젖는 게 싫은지 벽으로 바짝 붙었다.
"…으윽."
그냥 물이 아니라 오·폐수 같이 썩은 냄새가 났다.
그리고 이때,
【미션: 피의 저주를 풀어라.】
메시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