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콰앙-!
엘프가 외쳤다.
"됐어요!"
뚜껑이 날아가자 나는 거미줄을 피하며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뒤집었다. 그리곤 시위를 당겼다.
'가라!'
결국 바닥까지 내려와서 찾은 게 이거였지만 다른 것을 찾을 수 없었고 이제 여기에 모든 걸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스아아아악!
화살이 날아 정확히 박혀 들었다.
'이것도 아닌가?'
미간을 찡그릴 때였다.
드드드드드드드!
지진이 난 것처럼 기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엑!
-쉬이이익!
거미들이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위에서 쩌저저저저적!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솨아아아아아아! 폭포가 흐르는 소리가 났다.
"피해요!"
녹색 액체가 우릴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크고 묵직한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우리 몸이 갸우뚱 기울었다. 내가 중심을 못 잡은 게 아니라 피라미드 전체가 옆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헛-!"
『보습소가 파괴되었습니다.』
『추락하기 전까지 탈출하세요.』
나는 엘프에게 외쳤다.
"가야 해! 어서!"
"어디로요?"
"어디든!"
거미들도 무언갈 느꼈는지 우릴 공격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푸수수수수수수!
기둥에서 떨어진 액체가 많아질수록 피라미드는 급속도로 기울었는데 나는 1층 복도를 뛰어가면서 엘프에게 물었다.
"네 친구는 다시 와?"
메뚜기라도 있으면 탈출하기 쉬울 것이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기다릴 여윤 없었다.
"뛰어!"
저 앞에 외부로 통하는 빛이 보였다.
"내 손을 잡아!"
와…. 막상 뛰어내리려니까 나도 긴장되는데?
나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그냥 손만 잡아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곤 힘껏 바닥을 찼다.
"아아아…."
밖으로 나와서 뱀파이어 날개를 펼쳤다.
"추락하고 있어요!"
살다 살다 이런 장관은 처음 봤다. 마치 산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으으으으으으으윽!
무언가 뒤틀리고 비틀리는 소릴 내며 피라미드는 점차 아래로 향하더니 쿠우우우우웅! 완전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허억!
-와, 왕궁이!
-깔려버렸어!
공교롭게도 피라미드는 성을 덮쳤는데 완전히 으깨져 버린 성은 형체도 찾을 수 없었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피라미드 곳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저 큰 게 추락했으니 내부가 온전할 리 없었다. 그 충격만으로도 안에 있던 사람은 곤죽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가 떨어졌을 때보다 훨씬 더 강했으리라.
"……."
"……."
나는 엘프를 안고 허공에 머물면서 피라미드를 보았다. 그게 떨어지자 땅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왕국의 절반이 사라지고 대신 피라미드가 우뚝 솟았다.
그런데 떨어진 피라미드에서 거미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히이이이익!
-괴물이다!
-경비병! 경비병! 괴물을 죽여라!
맨 처음엔 거미였지만 사마귀나 개미 모습을 한 놈들도 간간이 튀어나왔다.
-놈들에게 복수하자!
-우와아아아아!
-싸우자!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놈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피라미드에서 나온 녀석들은 떨어질 때의 충격이 심했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강해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엘프가 말했다.
"이제 끝난 걸까요?"
"아마도."
나머지는 사람들이 해결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일 것이었다.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피라미드에서 나온 것들이 사람들의 손에 죽어가고 있었다. 본래 사마귀나 개미 같은 지능형들은 무기를 다룰 줄 알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기둥을 지키는 거미들이 문제였지만 그것들도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필사적으로 피라미드에서 멀어지려는 놈들을 사람들은 우르르 달라붙어서 창과 창으로 찔렀다.
-단단해!
-비켜라! 이놈은 우리가 상대한다!
살아남은 경비병들이 하얗게 빛나는 창으로 찌르니 거미의 단단한 외피도 뚫렸다. 거미는 죽어가면서도 단 한 걸음이라도 도망치려는 반응이었다.
-하하하하! 이놈들! 겁쟁이구나!
-별거 아닌 놈들이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끝난 건가? 나는 이제 돌아가면 되나?
바라보고 있는데 피라미드가 드드드드! 진동했다.
"…어?"
피라미드 꼭대기 부근에서 아까 헤어졌던 엘프들이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다. 상태를 보니 무사한 것 같았다.
-도망쳐!
"에에에?"
내 옆에 있던 엘프가 이상하다는 듯 그들을 보았다.
"도망치라고…?"
엘프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피라미드 외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는데 피라미드 꼭대기 부분이 갈라지며 열렸다.
"허엇…."
"저, 저게 뭐죠?"
거미다. 거미인데 아까 10미터짜리 거미들보다 몇 배는 더 컸다. 웅크린 다리를 펴자 피라미드 윗부분을 모조리 덮을 만큼 웅장했다.
-히에에에에엑?
-괴물이다!
-저렇게 큰 괴물이라니!
최종병기냐….
하지만 미션이 뜨지 않는다. 한편으론 이 사실이 매우 다행이었다. 나보고 싸우란 얘긴 아니지 않나?
추우우욱!
거미가 입에서 거미줄을 뿜었다. 그게 허공에서 촤악 펼쳐지며 그물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허어어억!
-피해!
-꺄아아아아아아!
50미터짜리 거미줄이 바닥을 덮었다. 거기에 달라붙은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강력접착제에 온몸이 붙어버린 것 같았다.
그걸 본 거미가 샤샥 움직였다.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그 놈을 보며 사람들이 공포에 질렸다.
-허어어어어어억!
-어, 어떻게 좀 해봐!
-으으악! 이리로 온다!
저건 무리인데. 내 화살이 박히기나 할까? 심지어 아까 그 거미들보다 외피도 몇 배는 단단해 보인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고갤 돌려버리고 싶을 만큼 무섭게 생겼다.
"후우…."
그래도 어쩌랴. 이미 나서는 게 익숙해 져버린걸.
내가 활을 빼며 앞으로 나가려 하자 엘프가 내 손목을 잡았다.
"불가능해요."
"알아."
"그런데도 가시겠다고요?"
나는 피식 웃었다.
"아까는 안 그랬나?"
부딪히고 깨지다 보면 방법이 있지 않겠나? 내 단호한 눈빛을 본 엘프가 스르륵 손을 풀었다.
그런데 이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후우우욱-!
내 머리 위로 큰 그림자 하나가 지나갔다.
"…어?"
나도 모르게 올려봤는데 이미 그건 사라지고 없었다. 급히 옆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나는 엘프의 목소릴 들고 소름이 쫙 돋았다.
"…가이이이이이!"
쿵! 쿵! 쿵쿵쿵쿵쿵!
거대 원숭이는 무식하게 빠른 속도로 피라미드까지 뛰어가더니 훌쩍 날아오르며 거미에게 곧장 돌격했다.
쿠어어어어어어어어!
거미도 포효에 놀라 방향을 바꾸며 원숭이와 부딪혔다.
워어어어어어어!
원숭이가 포효할 때마다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거미의 다리를 두 손으로 잡고 힘겨루기를 하던 원숭이는 이마로 거미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쿠웅!
그러더니 둘이 합쳐져서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이때 우리 위에서 익숙한 소리가 났다.
파라라라라락!
메뚜기 날갯소리!
"살아 있었군요!"
많은 엘프들이 메뚜기를 타고 왔다.
"언니!"
"너도 무사했구나!"
쿼어어어어어어!
엄청난 소리에 저쪽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콰드드득!
원숭이가 거미 다리 하나를 통째로 뜯어냈다.
-캬아아아아아아!
거미가 남은 다리로 원숭이를 찔러보지만, 원숭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빨랐다. 또 하나의 다리가 뜯겨나갔다.
"허…."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자 메뚜기에서 뛰어내린 여자 엘프가 말했다.
"가이는 마법을 품고 자란 아이예요. 그 어떤 생물도 가이를 감당할 순 없을 거고요."
진짜 저 원숭이는 사기 캐릭터였다. 내가 그간 수많은 몬스터를 봤지만 저런 깡패는 딱 한 번 봤다.
'그놈이 이놈이잖아!'
이제 확실히 알겠다. 저 원숭이는 내가 정글에서 본 그 녀석이다.
'제길, 설마 김우태가 당한 건 아니겠지?'
저렇게 무식하고 엄청난 놈에게 쫓겼는데 살아 있을까?
-캬아아아아아!
거미도 지지 않으려는지 원숭이의 얼굴을 턱으로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 턱을 원숭이가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곤 좌아아아아아악!
찢어버렸다.
'아…찢 었다.'
말 그대로 그냥 턱이 찢긴 거미는 한차례 크게 부르르르르르 떨더니 앞으로 쿠웅! 엎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거미줄 때문에 묶인 사람들을 제외해도 원숭이의 존재감은 눈만 마주쳐도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정도였다. 하긴 나도 저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땐 그러지 않았나? 하늘에서 날아오는 피라미드를 목격했을 때랑 저 녀석을 보고 있는 지금, 어느 쪽이 더 충격적일까? 답은 모두가 다르겠지만 피라미드와 비견할만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
"당신이 말한 게 사살이었네요. 혹시나 해서 왔는데 가이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어요."
『미션을 끝냈습니다. 이제 피라미드에 가서 출구를 찾으세요.』
바닥이 빛이 났다. 피라미드로 향하는 긴 띠가 내 앞에 나타난 거다.
"떠나시려고요?"
눈치 빠른 여자다.
"내 할 일은 끝났으니까."
그녀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당신 곁엔 언제나 우리의 인연이 함께 할 거예요."
『엘프의 호감을 얻었습니다. 이제 모든 엘프는 당신을 적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이도 언젠가 당신을 만나면 알아볼 거예요."
"저 녀석이?"
"가이는 굉장히 똑똑하답니다. 당신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런 느낌은 못 받았었는데….
어쨌든 내 할 일은 끝났으니 서둘러야 했다. 도화지나 김우태가 심히 걱정된다. 내가 이 돌발 미션을 하는 시간이 저쪽도 똑같이 흘렀다면 홀로 남겨진 그들에게 너무도 위험한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쿠우우우웅!
막 피라미드로 들어가려는 내 앞에 원숭이가 뛰어내렸다. 얼마나 육중하면 내 몸까지 흔들리는 것 같다.
"…왜?"
당황하고 조금은 겁도 나서 녀석을 바라보는데 원숭이가 자기 목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툭, 목걸이를 끊었다. 워낙 큰 놈이라 펜던트는 털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았었다.
녀석의 손이 내 앞으로 왔다. 그리곤 손을 폈다.
손바닥엔 우정의 증표가 있었다.
『추억의 고리가 연결되었습니다.』
"나 가지라고?"
원숭이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갤 끄덕이더니 히죽 웃었다.
"으음. 고마워."
나는 녀석의 손에서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우정의 증표를 얻었습니다.』
우오! 우오! 우오오!
원숭이가 기쁜 듯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러던 녀석이 내게 다시 손을 뻗었다. 워낙 커서 악수 따윈 할 수도 없다.
하나 삐죽 내민 손가락을 나는 웃으며 잡아주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빠르게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갔다.
질척질척, 녹색 액체가 사방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빛을 따라 계속 뛰었다. 계단이 보였다. 기둥이 부서져서 빛을 잃었다. 을씨년스러운 그 모습은 원래 내가 알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계단으로 이어진 빛을 따라서 달렸다. 떨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피라미드 내부는 온통 갈라지고 부서졌다.
'아직도 뭔진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본 과거에 아주 중요한 열쇠가 있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