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에너지 드링크였나? 그게 보글보글 기둥 안쪽에서 끓고 있는 게 보였다.
이건 놈들의 식량 아닌가?
자고로 전쟁에선 적의 보급로를 끓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때 내 생각을 뒷받침하는 메시지가 떴다.
【미션이 갱신됩니다.】
【에너지 보관소를 파괴하세요.】
【에너지 보관소의 에너지는 이 시설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소모품이 아니라 시설이 활동할 수 있는 자원입니다.】
【주의: 에너지 보관소가 파괴되면 시설은 추락합니다. 탈출로를 확보하세요.】
미션은 언제나 환영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고 헤매는 것보다 이렇게 확실한 목표를 딱 정해주면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초반엔 미션 자체가 거북했지만 이젠 이정표처럼 여기게 된 거다.
"차아-!"
거미들이 멍때릴 때가 기회였다. 스턴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츠려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녀석들을 보니 불쌍한 생각까지 들었지만, 쟤들 일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퍽!
퍽퍽퍽퍽!
강력한 회전력을 일으키며 날아간 화살의 강철 촉은 너무도 쉽게 표면을 뚫었다.
'아, 기름은 아니네.'
에너지에 달자마자 불길이 확! 번져서 폭발이라도 일으키는 장면을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불은 곧장 꺼져버렸다.
나는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뱀파이어 날개 덕분에 공중에 뜬 채 계속 난사할 수 있었는데 위에서 떨어지는 낙하물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크!"
몸을 옆으로 움직여 그것들을 피하면서 계속 에너지 보관소를 공략하는데 메시지가 떴다.
【활의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이제 보다 더 빠르게 활을 다룰 수 있습니다.】
오!
좋아, 좋아.
긴박할 때 얻는 기술과 스킬의 향상은 언제나 옳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생각보다 단단하네.'
둑에 구멍이 터지면 순식간에 터져버린다. 하지만 에너지 보관소는 화살이 박히자 녹색 액체만 쪼르르 흘러내렸다. 유리창처럼 깨져버렸으면 좋았겠는데 구멍만 숭숭 나고 있었다.
무려 30개 넘는 화살이 박혔지만 터지거나 깨질 징조조차 없어서 난감해하고 있을 때 위에서 또 그림자가 떨어졌다. 올려보니 이번엔 낙하물이 아니었다. 뭐, 떨어지고 있으니까 비슷하긴 했는데 사람이란 게 달랐다.
"괜찮아요?"
여자 엘프였다.
내가 버럭 외쳤다.
"저걸 파괴해야 해! 그러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어!"
"확실해요?"
"그래!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다고!"
엘프는 몸놀림이 환상적이었는데 대각선으로 떨어지면서 거미 몸통을 밟거나 계단 난간을 밟아 뛰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순발력을 얼마나 찍으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녀가 기둥에 매달려서 내게 물었다.
"어떻게 부숴야 하는데요?"
"나도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지."
고슴도치처럼 화살 박은 걸 보라고.
"음…."
그녀가 외쳤다.
"방법을 찾아볼게요!"
엘프가 아래로 주르르륵 내려가는 걸 보면서 나는 날개를 비틀었다. 기둥을 중심으로 돌면서 다른 특별한 게 없나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 아래 끝까지 녹색 액체만 잔뜩 보였다.
그리고 이때 움츠렸던 거미들이 다시 다릴 뻗었다.
"이크!"
나는 급히 계단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뜬 상태에선 놈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깨어난 놈들이 나를 향해서 거미줄을 뿜어댔다.
촤악! 촤아아악!
하지만 이제 막 깨어나서인지 정확도도 떨어지고 놈들의 움직임도 느려터졌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난간을 밟고 뛰면서 거미 한 마리 등짝에 화살을 날렸다.
콰르르르륵!
놈의 등에 닿자마자 화살이 드릴처럼 놈의 껍데기를 뚫었다. 얼마나 단단하면 푸욱! 박힌 게 아니라 저러나. 각도가 조금만 빗나갔어도 픽! 옆으로 튕겨 나갔을 거다.
-키애애애애액!
하지만 이번엔 운이 좋았다.
놈의 갑각을 뚫은 화살이 내부를 파버리자 기둥에 매달렸던 놈은 힘을 잃고 추락했다.
【전투 거미 23567-A를 사냥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000P를 얻었습니다.】
우와! 3천?
까다로운 놈들이란 건 알지만 공략할 수 있단 가능성을 본 이상 놈들은 그저 내겐 포인트 벌이용 몬스터일 뿐이었다.
"하하하! 여기다! 여기라고!"
나는 뱀파이어 날개를 폈다 접었다를 반복하면서 놈들을 유인했다. 그냥 도망만 치는 게 아니다.
슈욱! 슉슉!
놈들을 향해 계속해서 화살을 날리면서 내려갔다. 놈들의 다리에 맞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지만, 몸통이나 머리는 화살촉이 뚫기 쉬웠고 3대 정도 화살을 쏘면 그중 하나는 맞았다.
【3,000P를 얻었습니다.】
【3,000P를 얻었습니다.】
"오…!"
그렇다고 해서 내 상태가 유유자적한 건 절대 아니었다.
촤악! 촤아악!
사방에서 날아오는 거미줄 하나에만 맞아도 나는 꼼짝없이 놈들에게 잡힐 거다. 놈들이 얼마나 크면 하나가 내 근처에 다가오기만 해도 큰 벽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만큼 목표가 크니까 활을 쏘긴 편하다.
카아아아아아!
바짝 다가온 놈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저게 입인가? 턱인가? 곤충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물리면 목이 싹둑 잘려 나갈 것 같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이거나 먹어!"
옛날이었으면 쫄아서 도망치려고 급급했겠지만 이제 나는 이런 와중에서도 빈틈을 노린다.
푸욱!
놈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화살은 내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불까지 붙어서 아주 화끈한 맛일 거다.
키이이이이익!
다리를 오므리며 아래로 추락하는 거미를 보면서 나는 다시 반대편으로 날아갔는데 저쪽 계단에서 엘프가 외쳤다.
"없어요!"
없다고?
"부술만한 게 보이지 않아요! 이걸 통째로 날려버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무슨 수로? 10미터짜리 도끼 하나 있으면 잘라버리겠지만 그런 게 있다고 해도 누가 휘두르나?
쿠웅!
이때 아래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낙하물들이 떨어지면서 기계들을 부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아까 미션을 받고 깨달았다. 내부의 뭘 부순들 이 에너지 보관소를 파괴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거다.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계속 찾아봐! 어딘가에 반드시 방법이 있을 거야!"
.
.
.
밥그릇을 빼앗긴 개처럼 원숭이들은 분노해서 떨어댔지만 도화지를 넘을 수 있었다.
도화지는 범이의 몸을 베고 누워서 큭큭, 웃었다.
"배고프지? 이리 온."
하지만 이미 도화지 주변엔 머리가 박살 난 원숭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가는 원숭이들이 결연한 눈으로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몰아쳤지만 이때 원숭이들도 깨달았다. 도화지의 방어력은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해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깨물고 할퀴어도 피조차 나지 않으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우…. 소심하네."
도화지도 슬슬 지루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망토 두른 놈을 잡아야 하는데 그놈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일반 원숭이들만 모여있었다.
"용기 없는 남잔 인기 없다고."
그녀가 일어나서 범이의 머릴 손으로 쓰다듬곤 망치를 어깨에 둘렀다. 확실히 이 녹색 액체가 놈들에게 중요한 것인지 원숭이들은 자릴 떠나지 않았다. 배가 고픈지 침을 줄줄 흘리고 있다.
"언제까지 이럴 건데?"
원숭이들이 워낙 빨라서 도망가면 도화지로선 잡을 수가 없었다.
"너네가 내 시급 줄 거야? 시간은 곧 돈이라고!"
도화지는 어려서부터 혹독한 환경에서 가혹하게 살아왔다. 특히 할머니가 아픈 뒤론 잠시도 쉴 수 없었다. 공부를 싫어하긴 하지만 책상에 앉아 있을 때가 가장 편한 휴식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학교를 포기할 수 없기도 했던 것 같다.
이런 그녀다 보니까 이런 대치 상황에 익숙하질 않다. 벌써 몇 시간째인가?
"으으음…."
그녀가 원숭이들을 노려보며 기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곤 다릴 하나 꼬고 훈계하듯 말했다.
"언니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동심이 좀 없거든? 그래서 동물원도 안 간다고. 그런데 여기서 너네랑 놀아야겠니?"
빨리 민준이를 만나고 싶었다. 얼마나 힘들면 김우태도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빠른 길은 미션을 해결하는 거다.
'근데 민준이는 그렇다 치고 오빠는 대체 어딜 간 거야?'
어디 숨어서 탱자 탱자 놀았으면 엉덩이를 걷어차 줄 거다. 그녀로선 지금 김우태가 어떤 시련을 당하고 있는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아오! 정말! 계속 이래? 이럴 거야?"
차라리 화끈하게 싸우던지!
"너네 대장 데려오라고! 이거 먹고 싶으면 다 같이 가서 멱살이라도 잡아끌고 와!"
그걸 알아들으면 얘들이 원숭이게.
"아우우우!"
도화지가 주먹으로 기둥을 때렸다.
쿠웅!
그녀는 아이템 덕에 힘도 올랐지만 '추가 타격'이라는 효과가 있다. 주로 둔기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붙는 일종의 치명타인데 치명타가 왜 치명타인가?
움찔!
흠칫, 흠칫!
"오… 오옹?"
원숭이들이 반응하다 그녀는 원숭이들과 기둥을 번갈아 보았다.
"오오오오오옹?"
다시 원숭이들을 보았다.
흠칫!
눈만 마주쳤는데 불안에 떨고 있다. 마치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매우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호오오오?"
도화지에게 표정을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원숭이들의 실책이었다.
"그랬니? 이거니? 이게 너네 밥통이란 거지?"
원숭이들의 철밥통은 쇳덩어리처럼 기계로 이뤄져 있어서 웬만한 여자는 이걸 보며 이런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겠지만, 도화지는 달랐다.
"언니가…."
그녀가 두 손으로 망치를 잡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야. 그놈 데려와라."
-끼끼끽!
-끼이이이익!
-우끼끽!
원숭이들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그걸 보면서 도화지는 자신의 생각을 굳혔는데 기둥이 원숭이들에게 매우 중요할 것 같단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하아아아아압!"
쿠웅!
"으으윽…. 아파라…."
정확히 때리긴 했는데 튼튼한 기둥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히끼이이이익!
-우끽!
-우우우우끽!
"너네가 지랄하는 걸 보니까 이게 맞긴 하는데."
그녀가 기둥을 돌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딜 때려야 부서질지 고민하는 거다.
"약한 곳이 있을 건데."
빙빙 돌다가 다시 망치를 옆으로 들었다.
쿠웅!
"아우우우…."
이번에도 실패였다. 칼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둔기를 쓸 때 단단한 바닥이나 벽을 때리면 그 힘이 고스란히 반탄력으로 돌아온다.
"진짜 아프다고…."
저릿저릿 감전된 것처럼 아픈 팔이 다시 진정되었을 때 도화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자동차에 달린 주유구 뚜껑 같다.
도화지는 그걸 손으로 잡아서 뜯어내려고 했지만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어나며 손에 침을 뱉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제는 오기까지 들었다.
쿠웅!
망치가 정확히 닿았을 때 메시지가 떴다.
【추가 타격 효과가 발동했습니다.】
우적!
"그렇지!"
그녀는 쉬지 않았다. 한 번으로 안 되면 열 번, 열 번으로 안 되면 천 번을 때릴 자신도 있었다. 이미 망치질에 이골이 난 그녀였기에 추가 타격 효과가 터질 때까지 계속해서 망치질을 해댔는데 범이가 그런 그녀의 곁을 어슬렁거리며 원숭이들을 견제했다.
그렇게 얼마나 때렸을까.
터엉-!
뚜껑이 떨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