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촤아아아아아아악!
피라미드에서 액체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폭포처럼 떨어지는데 그 아래 깔린 지붕이 무너졌다.
촤악!
뿌려진 액체가 사방에 흐르고 튀었다.
-꺄아아아아아!
-도망쳐!
-저게 뭐야?
-마왕이다! 마왕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놀라 도망쳤는데 성벽 위의 궁사들이나 마법사들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피라미드가 너무 높아서 닿질 않았다. 피라미드는 공중에 우뚝 멈춰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어느 날의 구름처럼 그냥 그렇게 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괴사는 지금부터였다.
스스스스스.
지면으로 떨어진 액체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것들은 돌과 건물, 흙이나 모든 것에 달라붙었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히이이이이익! 이게 뭐야?
-닦아내! 기분 나빠!
-떨어지질 않는다고!
액체는 점점 더 굳어갔다. 그러더니 혈관처럼 동그랗고 길쭉하게 변형되어갔다.
두근! 두근!
어느 순간부터였다. 그것들에서 규칙적인 박동음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올 게 온 모양인데…."
눈썹이 계속 떨렸다. 눈으로 보진 않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란과 말로 짐작할 수 있었다.
"뭐죠?"
"설마 당신이 말한 그건가?"
엘프들의 질문에 내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도…. 결국 이렇게 되는군."
이렇게 정해졌던 것 같다. 내가 목걸이를 들고 엘프 마을을 거쳐 이곳에 와서 전했지만 피라미드의 침공지역에 날아든 거다.
"어쩌죠?"
"저들을 막을 방법은 있나요?"
흥분해서 말하는 엘프들을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나라고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때였다.
후다닥,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아까 그 젊은 경비대원이 우리가 있는 쇠창살 앞으로 왔다.
"너는 저게 뭔지 알지? 네가 말했던 그게 저거 맞지?"
도시 전체가 혼돈과 혼란에 빠져들어 갔다. 사람은 본래 상상하지도 못한 일에 직면하면 공황에 빠지는 법이다.
"어떻게 생겼지?"
"모르겠어! 산 같은 게 하늘에 떠있다고! 저런 건 처음 봐! 설마 저게 떨어지진 않겠지?"
"…내려앉을 거다. 네가 본 게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 같다면."
"히이이이익!"
그가 자물쇠를 풀었다. 벌컥! 문을 열며 외쳤다.
"뭐라고 해봐! 모두 죽게 생겼어!"
"…내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는 저걸 알고 있었잖아! 방법을 찾아보라고!"
그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녀석이 경비대장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지.
뒤에서 엘프들이 다가왔다.
"그게 하늘에 떠 있다면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올라갈 수 있어요."
아, 메뚜기가 있었지.
"올라가서?"
"막아야죠!"
엘프들은 또렷한 눈으로 한 점 의심 없이 나를 봤다.
"재앙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 몰랐지만, 당신이 있으니까 모르고 당하는 것보단 나을 거에요!"
이봐들, 나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피라미드는 처음이라고.
"제발 도와줘! 부탁이야! 도시가 파괴되고 있다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
젊은 경비대원이 앞장서서 계단을 뛰어오르자 엘프들이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나도 움직였다. 어차피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해도 지금 내가 속한 이곳에선 나 역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야! 당신들 소지품은 다 보관해뒀어! 날짐승도!"
저쪽에서 팔을 흔드는 젊은 경비대원의 말에도 엘프들은 한동안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진정한 재앙이…."
일단 피라미드의 크기에 압도된다. 저게 그냥 쿠웅! 바닥에만 떨어져도 이 왕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물론 그러면 피라미드도 충격을 받을 테니 저렇게 멀찌감치 있겠지만 싸움에서 크기는 가장 먼저 상대를 짐작하는 척도다.
'겁나 크네.'
설마설마했는데 역시 정글에 있던 그 피라미드가 맞았다. 내가 본건 오래되고 부서져서 외부가 돌처럼 보였었는데 지금 저기 있는 건 메탈처럼 번쩍번쩍 검은빛과 회색빛이 번들댔다.
"미친…."
그저 발자취를 따라가라는 미션일지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저걸 보고 태연할 수가 있을까?
-끄아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허억! 다리가 안 움직여!
-이게 뭐야! 무서워! 으아아아아앙!
액체를 뒤집어쓴 사람들의 몸에서도 그 혈관 같은 게 자라났다. 그것들은 피부와 딱 붙어서 사지를 잘라내지 않는 이상 도려낼 수도 없었다.
"최악이네…."
그간 미션을 해오면서 별의별 걸 다 봤지만 저렇게 끔찍한 장면은 처음이었다.
나는 메뚜기 고삐를 쥐고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가면 죽을 수도 있어."
저 위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열이 받는다. 이 화를 풀어야겠다.
"우린 각오하고 마을을 떠나왔어요."
"저걸 남겨두면 우리 마을에도 곧 날아오겠지."
"지금 뭐라도 해야 됩니다."
나는 메뚜기에 올라타서 고삐를 당겼다.
지릿지릿.
눈썹이 눈두덩이를 당기는 느낌이다.
"가지. 모두…."
죽지 말라고. 라는 말을 삼키며 메뚜기를 몰았다.
파르르르르르!
9마리 메뚜기가 피라미드를 향해 솟구쳤다. 도시는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런 게 하늘을 둥실둥실 떠다니며 공격을 하니 세상이 망한다는 말도 이해가 됐다.
'우릴 신경 쓰지 않는 건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가 접근하는데도 피라미드에선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혹시 우릴 향해 이상한 공격이라도 하면 어쩌나 가슴을 졸였지만 내 메뚜기가 바짝 접근할 때까지 피라미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른 메뚜기가 내게 다가왔다.
그 위에 탄 남자가 물었다.
"안으로 잠입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흩어져? 아니면 함께?"
"나는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할 것 같아."
"알았다. 우린 저쪽으로 가지."
피라미드 외벽엔 구멍이 창문처럼 뚫린 곳들이 있었다. 일부러 열어둔 건지 아니면 비행하기 위한 어떤 필수요소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파고들 틈은 그곳들이 유일했다.
엘프들이 우측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걸 보면서 나는 메뚜기를 옆으로 끌었다.
'내가 본 것과 똑같다면 내부 구조는 알아.'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최대한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
눈앞에 도면이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집중력이 높아질수록 피라미드 곳곳이 투영되는 것처럼 선해졌다.
'저기다.'
내가 정글에서 본 피라미드엔 더 많은 구멍이 있었지만 이건 닫힌 곳도 많아서 열린 것들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메뚜기와 함께 구멍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활을 들었다.
"…."
메뚜기 다리가 바닥에 안착했다.
인기척이 없었다.
'20미터 앞 왼쪽 첫 번째 문.'
나는 메뚜기에게서 고삐를 풀었다. 이제 녀석과 헤어질 시간이다.
"가. 수고했다."
고삐는 잘 챙겨뒀다. 녀석의 몸을 두드려준 뒤 자세를 낮추고 빠르게 뛰었다.
'역시 같아!'
복도엔 아무것도 없어서 내가 알던 모습과 흡사했다. 단지 새것과 2천 년 묵은 중고의 사용감 정도의 차이?
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지 않으면 마스터키를 쓸 생각으로 한달음에 달렸는데 내가 문 앞에 서자 지이이잉, 알아서 열렸다.
처억!
활을 겨눴다.
"…."
하지만 안엔 움직이는 건 없었다. 있다면 반짝이는 빛이 벽을 가득 채운 기계들에서 나오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생겼었구나.'
2022년 기준으로 500년쯤 흐른 훗날의 컴퓨터를 보면 딱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것들이 방안을 꽉 매웠는데 내가 노리고 온건 이런 정밀한 기계가 아니었다.
'있다.'
저 위 천장에 달린 환풍구!
바로 저걸 찾으려고 이곳에 온 것이다.
그쪽으로 뛰면서 나는 기계들을 유심히 봤다. 정글에서 봤을 때는 이것들이 거의 가루가 되었을 정도로 파괴되었었다. 그렇게 부수는 것도 일이었겠다.
'원망과 증오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진 않았겠지.'
단 하나도 멀쩡하거나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건 집착적으로 하나하나 잘근잘근 부쉈단 거다.
나는 환풍구를 열고 스윽 올라갔다.
'그때 그 일이 이렇게 도움이 되네.'
역시 사람은 배워두면 뭐든 써먹을 때가 있다.
'자, 보자. 여기에 뭐가 있는지.'
이 환풍구는 피라미드 모든 곳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원숭이 왕과 숨바꼭질하느라 몇 번이나 누볐었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이동했다. 사라락, 옷깃 스치는 소리도 내 귀엔 예민하게 들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50미터쯤 이동했다.
'저 방이 앞에 것보다 좀 더 넓었었지.'
원숭이 몇 마리가 모여서 우끼끼! 놀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난 그런 녀석들의 머리통에 화살을 먹여주었었지.
'음?'
움직임을 멈췄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가 있어.'
포복이 아니라 손바닥과 무릎을 이용해서 거미처럼 몸통을 들고 소리 나지 않게 살금살금 앞으로 갔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다섯 사람이 모이면 둘과 셋으로 나뉠 수밖에 없고 세 친구가 만나면 한 명은 결국 왕따가 된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베스트는 둘이 있을 때였다.
"…."
물론 김우태는 이 상황이 미칠 지경이었다.
"그만 좀 해."
손가락이 그의 머리를 쓸었다. 손톱이 그의 머리보다 커서 누가 보면 어이가 없겠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이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걸 알았다.
"제발 그만 좀…."
몸을 뒤틀어보지만 그의 온몸은 이미 거대한 손에 꽉 잡혀 있었다. 도망칠 수도 없고 이 손아귀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히이-!
그의 눈앞에 엄청나게 큰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헤벌쭉 웃었다.
"하아…."
거대 원숭이에게 잡혔을 때는 즉사하는 줄 알았다. 피라미드에서 떨어지면서 죽음 직전에 보인다던 주마등도 스쳤었다. 하지만 그를 움켜쥔 거대 원숭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정글을 뛰어다니며 흥분한 듯 날뛰더니 밤엔 이렇게 앉아서 그를 애지중지…. 갖고 논다. 물론 이놈의 손에 잡혀서 정글을 누빌 때는 롤러코스터를 온종일 타는 기분이어서 몇 번 오바이트도 했다.
"차라리 죽여줄래?"
김우태가 원숭이를 보며 말했지만, 원숭이는 끼끼! 즐거워하다가 바닥에서 뭔가 손으로 한 줌 쥐고 김우태의 앞에 가져와 손을 폈다.
"…."
흙과 과일, 풀과 나무가 범벅된 식사였다.
"됐고…."
김우태가 고갤 홱 돌려버리자 원숭이가 얼굴을 갸웃갸웃하면서 김우태를 쥐던 손을 풀었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된 김우태가 원숭이가 마련한 식사 위로 올라앉았다. 그래봐야 원숭이의 다른 손바닥 위였다.
"와 씨…. 이게 얼마 만이냐."
세상 이렇게 서러울 수 있다니. 근데 또 배가 꼬르륵댄다.
"환장하겠네."
흙 묻은 과일 하나를 집어서 바지에 슥슥 닦은 그가 한입 깨물자 달콤한 향이 입을 넘어 콧속까지 치밀어올랐다.
"음…. 맛은 있네. 하지만 이걸로 내 화가 풀렸다고 생각하진 마라. 넌 내 자존감에 상처를 줬어."
원숭이가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놈이 풀어줄 것 같지도 않다는 게 문제였다.
"하아. 내 신세야."
멋진 모험을 하면서 나중에 자식들에게 들려줄 영웅의 무용담을 기대했건만 변태 원숭이의 피규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