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아, 기억났다.
중학교 때였나? 우리 반 담임을 맡았던 체육 선생님 같았다. 괄괄하고 자존심 세던….
엘프가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하며 대답했다.
"변고가 있어서 소식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맨날 숲에 처박혀서 사는 당신들이 무슨 변고가 있소?"
약간의 비웃음을 포함한 말투에도 엘프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침략자들이 왔다고 합니다."
"침략자야 항상 있어 왔지. 40년 전에도, 200년 전에도 우린 항상 맞서 싸워 이겨냈었고. 그럴 때마다 당신들은 숨기에 바빴지 않았나?"
"이번엔 다릅니다. 당신들의 왕께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왕을 알현하고 싶다라…. 내가 왜 허락해야 하지? 아슬가드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경비대장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우릴 내려봤는데 분위기를 보던 나는 엘프 여자에게 물었다.
"다른 도시는 없나?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는데."
"이틀거리에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이곳이 가장 번성했어요."
우리 목소리에 경비대장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인간인데 어떻게 엘프와 함께 다니는 거지?"
대답은 남자 엘프가 했다.
"이 사람이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한 번이라도 들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동맹도 아니고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번의 교류도 없다가…."
경비대장이 이죽거리며 다른 경비대원들을 둘러보자 낄낄! 웃음이 터졌다.
"낯짝도 두껍군 그래. 원래 그런 족속들인 건 알고 있었다만."
으르렁대는 짐승처럼 경비대장은 적대적이었다.
"…."
그걸 지켜보다가 나는 남자 엘프의 앞에 나섰다.
"이건 처음부터 내 일이었으니 내가 해결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
경비대장이 나를 보며 고개를 비틀었다.
"이걸 엘프들에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라고 들었다."
나는 목걸이를 풀어서 손에 쥐고 경비대장을 올려보았다.
"한 마을에 하나씩밖에 없다고 하더군."
"…증표가 어떤 물건인지는 안다. 저들이 약속할 때 사용한다는 것도."
"그래, 이걸 내게 어떤 엘프가 맡겼다. 그의 마을은 전멸했고 생존자들은 실험체가 되어 끌려갔다. 엘프뿐만 아니라 드워프도 있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종족도 있었지. 그들의 마을 모두 파괴됐다."
"…너는 누구지?"
"여행자. 그리고 그 생존자들을 목격한 사람."
목걸이를 그에게 던졌다.
훅! 날아간 목걸이를 그가 낚아챘다.
"나는 전달했다. 이것으로 내 역할은 끝났어. 나머지 판단은 그쪽이 하도록 해."
경비대장의 이마가 구겨졌다.
"세상이 망하든 말든 이제 당신 손에 달렸어."
"…나보고 뭘 결정하라고?"
경비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호기 있게 윽박지르곤 있지만, 그는 이런 큰 결정을 짊어질 타입이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알겠다고.'
부하들을 이끌고 시시덕거리면서 잡담을 하는 걸 즐기지만 그렇다고 책임질 일을 만드는 성격은 아닌.
"돌아가지."
내가 미소 지으며 엘프를 향해 몸을 틀자 경비대장이 말했다.
"잠깐!"
"…나는 분명히 전달했다고 했는데?"
"기다려."
그가 내게 목걸이를 집어 던졌다.
"네가 가져왔으니 네가 끝까지 맡아라. 괜히 그런 불길한 물건을 우리가 보관했다가 엘프와 척을 지고 싶지 않다."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전쟁이 얼마나 사소한 거로 시작되는지 나는 그간 많이 봐왔어! 궁에 기별은 전하겠다. 여기서 대기하도록. 너희는 이들이 허튼짓하지 못하게 잘 감시해라!"
"네!"
"알겠습니다!"
경비대장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듯 말을 몰아 성으로 향했다.
경비대장이 떠나자 경비대원 중에서 가장 어린 남자가 다가와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해하라고. 우리가 엘프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잖아. 그러게 지난 전쟁 때 참전하기만 했어도 이 지경까진 오지 않았을 건데."
나는 그 말에 남자 엘프를 보며 물었다.
"왜 돕지 않았지?"
"우리는 사사로운 영토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왜 남의 것을 빼앗는 전쟁을 도와야 하지?"
"그렇군."
저들의 마을을 가봤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자연 그대로를 해치지 않고 영위하는 삶. 엘프들에겐 소유욕이란 없었다.
그런 이들이었지만 세상 자체를 위협하는 적 앞에선 이렇게 나섰다. 그간의 세월 때문에 감정의 골이 깊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대의를 위해 뜻을 모아야 한다는 걸 인간들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두웅-!
성벽 위에서 북이 울렸다. 길게 한번.
경비대원들이 움찔하며 성벽을 봤다. 여기서 한 번 더 길게 울리면 전투태세다.
두웅-!
움찔, 움찔! 경비대원들이 반응할 때 성벽 위에 수많은 병사들이 활을 들고 이쪽을 겨냥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게 뭣…."
내가 어이없이 쳐다보는데 젊은 경비대원이 인상을 팍 쓰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순순히 투항해.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200명의 궁수와 18명의 마법사가 너희를 겨냥하고 있다고."
"왜 이러는 건데?"
"모르지. 왕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짐작이야 하겠나? 피차 피곤해지니까 반항하진 말자고."
경비대원들이 허리에서 줄을 풀었다. 그걸로 우리를 묶더니 굴비처럼 엮었다.
"…."
"…."
엘프들도 당황했지만 저항하진 않았다.
"이래서 얻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젊은 경비대원 역시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난들 알겠나?"
.
.
.
우리가 초대된 곳은 감옥이었다.
더럽고 냄새나며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여기에 며칠 있으면 병을 얻을 것만 같은 최악의 공간이었다.
나야 뭐…. 이걸 과거의 어떤 거로 인식하고 있어서 살짝 현실감이 떨어졌지만, 엘프들은 달랐다. 이들에겐 이게 현실이잖나? 그런데도 엘프들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게 이상해서 물어봤다.
"억울하지도 않나?"
"이 정도 변수는 예상했으니까."
"예상했다고?"
"우린 인간과 어울리지 않아. 인간의 탐욕은 우리를 언제나 괴롭히지.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악한 짓도 서슴지 않았어. 마법을 가르쳐주면 그 마법으로 우릴 공격해서 노예로 부렸고 동물을 주면 그 동물을 잡아먹었어."
"…."
"그래서 인간을 만날 때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이런다고 해도 그다지 놀랍지 않아. 왜 네가 우리 마을에 왔을 때 그렇게 경계했는지 알겠지? 인간 한 명이 우릴 찾으면 그다음엔 사냥꾼이 오고 그 사냥꾼이 실패하면 곧 군대가 와."
나는 엘프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들의 미모나 마법적 능력을 떠나서 온순한 성격을 생각하면 노예로 부리기 딱 좋을 거다.
"그래서 우린 발각되면 이주를 해. 싸우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으니까."
"너희도 왕국을 만들어서 세력을 키우면 되지 않아?"
"숲은 인구가 과밀하면 반드시 파괴될 수밖에 없어. 뭐든 적정한 선이란 게 있는데 우린 그걸 넘지 않아."
나무가 맺는 열매는 언제나 비슷하고 한 그루가 백 명을 먹여 살릴 순 없다. 엘프들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인간 나빠! 엘프 좋아!'를 외친다는 건 아니다. 60억 인구가 있으면 모두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이 있는 거고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건 존중받아야 하는 거니까.
"…."
나는 감옥을 둘러봤다. 쇠창살이 있긴 하지만 곳곳이 허술했다. 탈출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방법이 아주 없을 것 같지도 않다.
'이번 미션은 어떻게 해야 끝나는 거지?'
하지만 내가 감옥에서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이것 또한 내가 봐야 할 발자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목걸이를 줘도 안 되고. 왕을 만날 수도 없고.'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처럼 기분이 답답해지는데 여자 엘프가 말했다. 표정을 보니 불안함을 달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여행을 많이 했나요?"
"누구보다 충격적일 정도로."
과거로 돌아온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니까.
"당신의 지난 여행길은 주로 어땠나요?"
"처참했었지."
40년을 고독하게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가혹하다. 근데 이걸 내가 잘못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사회가 정한 기준을 따라가지 못해서 도태한 것이다.
돈, 외모, 능력, 물고 나온 수저의 색깔.
지금도 목숨 걸고 미션을 뛰지만, 그때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혼자였으니까.
"즐거운 적은 없었나요?"
가끔 하던 치맥 파티? 아니면 나 혼자 했던 가슴 미어지던 짝사랑? 아, 오토바이를 샀을 때 좋았던 것 같다.
"흐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그런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금은 매 순간이 즐거워."
과거로 돌아오고 재능마켓을 만난 뒤로 나는 혼자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악한 미션을 주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었고 이제는 동료도 생겼다. 특히 괴물들을 사냥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쓸모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음식을 배달하는 것도 누군가를 즐겁게 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들이 음식을 받으며 나를 보는 눈빛엔 존경이나 감사보단 다른 게 더 많았었으니까.
"이상한 말이네요. 과거는 처참한데 지금은 즐겁다고요? 여기에서도요?"
"인생 뭐 없더라고. 내가 즐기면 그게 행복인 거지. 똥통이면 어때? 내가 좋다는데. 눈치 볼 거 있나?"
"즐기면 행복…. 좋은 말이네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거죠? 기억해둘게요.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돌아간다라…. 이 분위기를 봐선 그게 쉬울 것 같진 않은데.
'설마 다 죽는 거냐.'
이게 2챕터의 끝이고 3챕터로 이동하는 건가? 1챕터 경기장에서처럼?
'슬슬 짜증 나는데.'
괜히 정들게 해놓고 죽는 것만 구경하라고 나를 보낸 건가? 이건 좀 별론데?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오르려고 할 때,
"어머? 당신 눈썹이…."
눈썹을 가장한 위기 감지 더듬이가 움직였다.
"…?"
갑자기? 이런 감옥 안에서? 아무것도 없는데?
'왜…?'
설마 우리 목을 자르러 미친 왕이라도 내려오는 건가?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쿠우우우웅-!
우린 일종의 반지하 지점에 있었다. 우리에게 보이는 저 높은 창문은 밖에서 보면 땅바닥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떤 거대한 충격이 이런 지하에까지 선명하게 전해질 정도로 일대를 뒤흔들었다.
'지진? 아니야. 이건….'
-꺄아아아아아아아!
멀리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앗? 갑자기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이봐! 빨리 나가서 확인해봐!
-죄수들 동요하지 않게 단속해!
경비대원들이 우왕좌왕하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감옥에서 빠져나갈 때 또 창문 틈으로 비명이 흘러들어왔다.
-으아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 잘렸어!
-허억? 저게 뭐야?
-무너진다! 피해!
도시 한복판에 뭔가가 날아와 박혔다. 그 충격으로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건물이 무너지고 동상이 쓰러졌다.
그러나 진정한 위험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저, 저기야!
-하늘을 봐!
-마, 맙소사! 저렇게 큰 게 어떻게 떠 있는 거야?
도시의 반을 그림자로 채울 만큼 거대한 피라미드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