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그런데 저놈은 내가 봤던 놈보다 크기가 훨씬 작았다. 물론 일반 원숭이보다는 몇 배나 컸지만 작은 산이 움직이는 것 같진 않다. 실제로 저 녀석이 나무를 잡고 몸을 띄운다는 것이 그걸 증명했다.
"가이!"
그녀가 웃으며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놀라지 마세요. 우리 마을의 수호신이에요."
"…수호신?"
원숭이가 다가오는 걸 보며 그녀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호숫가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가이는 죽어가고 있었어요. 태생이 약해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죠."
"그래서?"
"우리는 모든 치료를 동원했지만 가이를 도울 수 없었어요. 그래서 마법의 힘을 빌렸죠. 본래 마법은 동물에게 가혹해요. 지능의 크기가 넓을수록 그릇처럼 마법을 받아들이는데 고등생물일수록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게 그 이유에서죠."
"계속해봐."
"우리도 반신반의했어요. 가이의 가련한 육체와 비좁은 정신이 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그런데 버텼다?"
"네! 가이는 본능적으로 아니, 기적적으로 생존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어요! 바로 자신의 몸을 키우기 시작한 거죠! 지금도 가이의 몸에는 다 소화하지 못한 큰 마법이 도사리고 있지만 가이는 계속해서 몸집을 키우면서 저항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궁금해졌다. 이건 진짜 궁금했다.
"저런 녀석이 많아?"
"말씀드렸잖아요. 이건 기적이라고요. 이전에도 앞으로도 다시는 가이와 같은 개체는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우리도 혹시 몰라서 다른 위기의 동물들에게도 같은 방법을 써봤지만, 그 누구도 견뎌내지 못했어요."
말을 하다 보니 원숭이가 가까이 왔다. 녀석은 저 아래 바닥에 뒷다리를 지지하고 우뚝 섰는데 머리가 우리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키가 아마 10미터는 넘겠지? 더 되려나?
"그 작고 위태롭던 아이가 이제는 이렇게 자라서 우리를 지켜준답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목에 내가 가져왔던 목걸이와 똑같은 게 걸려있다. 이 마을의 증표인가보다.
원숭이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는 그녀를 보다가 나는 시선을 돌렸다.
"…."
원숭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왠지 저 눈동자…. 낯설지 않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이때부터 몇천 년을 살아남았다고? 몸집을 계속 키우면서?
"흐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데도 계속 눈길이 갔다.
.
.
.
"거기 안 서? 야!"
폴짝폴짝 뛰어가는 원숭이의 망토를 보면서 도화지는 짜증이 치솟았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놀리는 것처럼 원숭이는 계속해서 얼쩡거렸는데 그녀가 쉬려고 잠시 벽에 등을 기대면 어김없이 슬금슬금 접근했다. 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은 항상 유지했다.
그르르르르….
범이가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이 역시 놈의 순발력을 따라잡지 못했는데 이젠 머리끝까지 화가 가득 찼다가 싸늘하게 식어버려서 허탈감이 가득했다.
"아오…."
저딴 원숭이한테 놀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서러워졌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민준이는 흔적도 없었고 김우태는 아주아주 멀리에서 희미하게 느껴졌다.
"됐어! 이제 너 무시할 거야! 멍청이야! 마음대로 해!"
원숭이에게 소릴 지르며 도화지가 돌아섰다. 10시간 넘게 따라다녔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자 다른 수단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흥!"
그녀가 돌아섰다. 그리곤 홀을 내려갔다. 놈을 따라다니느라 이런저런 방을 다 돌아다녀 왔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결국 저놈을 생으로 잡아 족쳐야 한다는 건데 그녀로선 돌파구가 없었다.
끼우? 끼우우!
원숭이가 그녀를 뒤따르며 우끼끼! 웃어댔다. 사람 놀리는 직업이 있다면 저 녀석이 1티어일 거다.
"진짜, 싫다…."
그녀는 터덜터덜 아래로 내려갔다. 왜 이런 시련이 생겼는질 모르겠다. 일단 무기부터가 놈과 상성이 맞질 않는다. 민준이처럼 멀리서 쏠 수 있으면 시도라도 하겠는데 망치를 집어 던진다고 해서 녀석이 맞을 것 같질 않다. 게다가 어찌나 예민한지 따라가면 금세 멀어졌다.
'하아, 내가 지능케가 아닌 게 이렇게 원망스러울 줄이야.'
차라리 피라미드 밖으로 나가버릴까? 생각까지 들었는데 민준이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기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1층으로 내려오자 원숭이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우르르 도주했다.
그녀는 놈들이 마시던 에너지 드링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곤 몸을 숙여 그걸 마셨다. 범이도 옆에서 할짝할짝 갈증을 풀었다.
"조금 낫네."
그녀는 주저앉아 범이의 몸에 상체를 기대며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범이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걸 지켜보던 원숭이들이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금방 갈 줄 알았던 도화지가 자릴 잡고 앉아버리니까 조바심이 난 거다.
"…오옹?"
그걸 도화지도 느껴버렸다.
"…호오오오? 그런 거냐?"
이 에너지 드링크는 원숭이들의 식수이자 식량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흐흐흐…."
저 위 3층쯤에서 이쪽을 내려보는 망토 원숭이도 대가리를 좌우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저건 불안증세다.
"어쩔까나?"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대며 원숭이들을 향해 씨익 웃었다. 놈들이 가까이만 오면 사냥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놈들이 그녀보다 빠르다는 게 문제였는데 여길 점유해버리면 놈들의 목줄을 틀어쥔 거나 마찬가지였다.
"헐, 나 혹시 천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뿌듯한 표정으로 망치를 바닥에 쿠웅! 찍었다.
"범아. 이제부터 여긴 우리 구역이야. 절대 저놈들한테 뺏기면 안 돼. 알겠지?"
규우우!
말하지 않아도 범이 역시 놈들에게 분을 풀고 싶을 거다.
"누구 똥줄이 먼저 타는지 보자고! 아하하하하!"
그녀의 웃음소리에 원숭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
.
.
정글엔 피라미드처럼 생긴 많은 우주선이 도처에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왜 처참하게 파괴되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끔찍한 전쟁이 벌어질 거야."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있었다. 회의가 끝났는지 마을 지도자들은 나를 불러냈는데 그들에게 다시 한번 설명하자 그들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신음했다.
"그들이 실험을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침략자들은 우리의 육체가 필요한 건가?"
"이 환경에 적응하려고 하는 것이겠죠."
"어쩌면 가장 최적화된 육체를 구성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요."
내게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다시 토론을 이어가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이게 사실이라면 지금 즉시 움직여야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어차피 거짓이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지 않습니까?"
"허, 저 하늘 밖에서 날아왔다니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참 말 많은 사람들이었다. 사람을 불러놨으면 결정을 해야 할 거 아닌가?
"너희에게 도움을 바란 적 없어. 나를 보내주기만 하면 돼."
내 말에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이건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의 안위가 걸려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아깐 믿지도 않더니만…."
어이가 없어서 웃었는데 남자가 말했다.
"네가 아니라 증표를 믿기로 했다."
그들은 계속 쑥덕거리면서 사람들을 편성했다.
남자 다섯과 여자 셋이 나와 함께 도시로 향할 모양이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잘 부탁한다."
"가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여러분이 고생이죠."
일종의 선발대는 도시에서 멈추지 않고 벌레를 확인하는 것까지 여정을 할 것 같았다.
여자가 내게 메뚜기를 끌고 왔다.
목줄처럼 생긴 걸 내게 쥐여주었다.
"당신은 이 아이를 잘 다루지 못할 걸 아니까 이걸 드릴게요."
【엘프의 고삐(레어): 의지나 생각을 대상에 전할 수 있다. 단, 대상이 따를지 말지는 호감도에 의해 결정된다.】
'오….'
이거 득템인데?
여자가 말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까는 적대해서 미안해요."
"아니야.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나라도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을 거야."
내가 웃자 그녀가 이마를 살짝 숙였다. 그리곤 화사하게 웃었다.
"어쩌면 당신이 이 세계를 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누구도 나서지 않는 지금 당신 홀로 이렇게 여행을 하고 있잖아요. 모두를 위해서."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가이가 그녀의 뒤에서 슬금슬금 걸어왔다.
"우린 당신을 친구로 생각할 거예요.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요."
"내가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만이라도 고마워."
"가이, 친구에게 인사해야지."
꾸우우?
녀석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팔을 뻗었다. 워낙 커서 손가락 하나가 내 손목처럼 굵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손가락을 손으로 잡고 흔들다가 놨다. 그리곤 메뚜기에 올라탔다.
'이 고삐, 상당히 좋은데? 범이에게도 쓸 수 있겠어.'
범이완 교감이 진척되어서 어느 정도 컨트롤이 되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 고삐라면 훨씬 더 섬세하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출발하자!"
"곧 돌아올게!"
"조심하세요!"
마을 사람들이 배웅할 때 여자가 내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당신의 여정에 평화만 가득하길."
"나도 그러면 좋겠네."
미소 짓자 메뚜기가 날개를 폈다.
푸드드드득!
내 것을 포함한 9마리의 메뚜기가 편대를 이뤄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잘 가요! 친구!
-또 놀러 와요!
-다음엔 우리랑 놀아요!
아이들이 나를 보며 팔을 흔들어대자 그 옆에서 가이가 따라 하듯 나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더 감상할 틈은 없었다. 메뚜기가 속도를 높이며 방향을 튼 것이다.
파르르르르르!
스스스스!
나무 위까지 고도를 올려서 능숙하게 한 방향으로 무릴 이뤄 날고 있는 메뚜기들은 아주 훌륭한 이동 수단이었다.
'저렇게 조종하는구나.'
나도 몇 번 메뚜기를 운전해본 경험은 있었지만, 숙련자의 솜씨를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엘프들은 20년쯤 배달한 라이더처럼 베테랑이었다.
'운전이라면 나도 좀 하지.'
나는 그들을 유심히 보면서 어떻게 하면 메뚜기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바꾸는지, 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몸의 중심을 잡는지 익혔다.
3시간쯤 가다가 잠시 내려가서 메뚜기에게 풀을 먹이곤 다시 날아서 4시간을 이동했을 때 나는 저편에서 웅장하고 넓은 인공물을 발견했다.
높고 넓은 성벽과 그 테두리 안에 지어진 수많은 집. 그리고 가장 끝에 우뚝 선 성은 장엄하며 생동감 넘쳤다.
"도착했다! 하강한다!"
7시간을 날았더니 이제 메뚜기를 타고 비행하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고삐가 없었다면 애를 먹었겠지만, 이번 비행은 미래에 두고 온 내 오토바이를 모는 것처럼 편안했다.
'이건 무조건 챙겨야겠어.'
바닥에 내려서 고삐를 쥐고 메뚜기를 토닥토닥 만져주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벽 안에서 말을 타고 나왔다.
번쩍거리는 갑옷과 뾰족하고 큰 창이 인상적이다.
"엘프들이 아슬가드에 어쩐 일인가?"
가장 선두에서 온 남자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우릴 보며 물었다.
'어디서 봤더라?'
나는 그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