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울창한 숲이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있던 정글하곤 분위기나 습도가 달랐다. 그보단 훨씬 더 포근하고 볕도 잘 든다.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온 건가?'
잠깐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짹짹.
새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웠고 따스한 느낌이 가득했다. 정글에서처럼 독충이나 뱀도 없었다. 그저 풍요롭고 나른하기까지 하다.
"음…."
일단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다. 미션에 대한 메시지가 뜨지 않기 때문에 내가 단서를 찾아야 한다.
'평화롭네.'
이렇게 한가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게 현실이 아니라 과거의 어디쯤이란 걸 알지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은 그런 기분일 것이다.
산책하듯 숲길을 걸었다.
'신기해.'
그러면서 느낀 건 분명 인적 없는 숲인데 정글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거다. 마치 나무들이 알아서 오솔길을 만들어준 것처럼 거치적거리는 게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등산로라면 몰라도 이곳의 자연은 때 묻지 않았건만 내게 길을 인도하듯 안내한다.
"…."
40분을 더 걸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점차 긴장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져 갈 때쯤 풍경이 변했다.
"아…."
호수가 있었다.
거짓말처럼 반짝 드러난 수면은 빛을 보석 알갱이처럼 반사하고 있었고 저쪽에선 사슴이 물을 마시고 있다.
-꺄르르르르!
-그만해!
-너는 너무 장난꾸러기야!
게다가 한 무리의 아이들이 물가에서 놀고 있었다.
"아아…."
여긴 천국인가? 저렇게 예쁜 아이들과 평화로운 이 풍경은 인세에선 만들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때였다.
스윽.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순간적으로 대응할까 하다가 눈썹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움직이면 죽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딱딱하고 뾰족한 게 등을 쿡 찔렀다.
"너는 누구지?"
목소리에 나는 두 손을 보란 듯이 들고 말했다.
"도시를 찾고 있어.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도시라면 여기서 아주 멀어. 설마 길을 잘못 들었다는 핑계를 대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자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변했다.
"움직이지 마."
"보여줄 게 있다고."
"…나한테?"
"그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들자 나는 목걸이를 풀며 돌아섰다.
'그 여자랑 똑같이 생겼네?'
뾰족한 귀와 하얀 피부, 아름다운 얼굴은 경기장에서 만난 여자 같았다.
"…이걸 어디에서 났지?"
"급한 일이 생겼어. 수많은 마을이 침략 됐고 사람들이 잡혀가고 있어. 나는 그걸 알려야 해. 그 목걸이를 보여주면 내 말을 믿어줄 거라더군."
"…성급한 행동 하지 말고 천천히 이쪽으로 와."
그녀는 내게 활을 겨누고 있었다. 나처럼 큰 양궁이 아니라 활대가 더 둥글고 크기도 작았다. 하지만 촉만큼은 날카롭고 섬찟하다.
"천천히 걸어."
어느 쪽이라곤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뭇가지가 사라락 움직였기 때문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길을 터준다.
'아, 그래서 이 숲이 묘했던 거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숲이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이 녀석들이 여기에 사니까 이렇게 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허튼짓하면 봐주지 않을 거야."
"그럴 생각 없다니까."
"…계속 가."
좀 더 숲이 울창해졌다.
'오른쪽 위, 저쪽 끝에도 있군.'
다른 사람들이 나무 위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도 활이 들려 있었는데 점점 더 그런 이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풍경이 완전히 변했다. 숲인 건 맞지만 저 안쪽으론 수많은 인기척이 있었고 인공적으로 만든 구조물도 보였다. 기본은 나무로 되어 있지만 내가 오면서 본 숲과는 전혀 달랐다.
"아이비! 그자는 누구지?"
안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당장 영화 찍어도 될 정도로 잘 생겼다.
"약속의 증표를 가져왔어요."
"증표를…?"
남자가 놀라서 다가왔다.
"각 마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증표를 이자가 어떻게?"
나는 딱히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 마을이 전멸했을 테니까."
"뭐라고?"
"날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어. 나는 가야 해. 큰 도시로 가서 도움을 청하고 온 세상에 위기를 알려야 돼. 너희가 그걸 막는다면 멸망을 너희 손으로 이끈 것과 마찬가지일 거다.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 너희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내게 그걸 준 여자도 지금쯤 죽었을 거다."
내가 본래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시간을 끌기가 싫었다.
"멸망이라니…."
"거짓말!"
두 사람의 반응에 나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내가 왜 너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도시로 가는 방향만 알려주면 떠날 거야.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두 사람이 나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남자가 말했다.
"따라와. 외부인이 발을 들인 이상 그냥 나갈 순 없어."
"보물이라도 감춰놨나?"
내가 피식 웃자 남자가 웃었다.
"마을 위치가 노출되면 우린 통째로 이주한다. 너 하나 때문에 그런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고. 이쪽도 사정이란 게 있어."
위협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무척 생소했는데 인간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엘프라….'
도화지가 만났다던 그 여자와 동류인 것 같았다.
'재능마켓 덕에 별 경험을 다 해보네.'
무기력하게 살던 이전의 삶에선 상상조차 못 해보던 모험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나도 이게 적응이 되어가는지 심장이 벌렁거리거나 하진 않았다.
조금 더 걸어갔다. 그러자 생소하지만 낯익은 것들이 보였다.
웃고 뛰노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저쪽 우리에 모여있는….
'메뚜기잖아.'
여긴 저걸 가축처럼 키우는 건가?
내가 메뚜기들을 빤히 바라보자 남자가 나를 보며 물었다.
"장비가 그럴싸한데 직접 만든 건가?"
"이런 손재주는 없어서."
"도시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들은 지니고 있군. 하는 일이 뭔가?"
"여행자라고 해두지."
"여행이라…. 혼자서?"
"잠시 일행과 헤어졌어."
"그렇겠지. 혼자 유유자적하게 다니기엔 험한 세상이니까. 그런데 아까 멸망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마왕이라도 나타난 건가?"
"마왕이 뭐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 이상이야."
"으음…."
"너희가 키우는 저 메뚜기처럼 사람을 취급하거든."
"우리는 저들을 가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서로 돕는 친구일 뿐이다."
"아, 그래. 어쨌든 뭘 상상하든 그것보단 위험하고 과할 거야. 모두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뭐가 위협한다는 거지?"
"벌레. 네 몸속에 기생하다가 널 잡아먹고 뚫고 나오기도 할… 괴물들이지."
"…정말인가?"
남자가 우뚝 서서 나를 노려봤다.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흐으음…."
아직은 진도가 많이 나가지 않아서 내가 본 그런 기생충들이 설쳐대진 않는 것 같지만 퍼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일 거다.
남자는 깊이 생각하는지 말없이 걷다가 마을의 중심부쯤에서 내게 말했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그가 대답도 듣지 않고 떠나자 여자가 말했다.
"이쪽으로…."
그녀가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는데 이건 참 기이하고 신비한 경험이었다. 오르막길 같은 경사를 오르고 있는데 넓은 나뭇가지다. 그런 나뭇가지로 이뤄진 길이 마을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점점 높아지자 아래가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들어가세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며 나는 웃어버렸다.
"감옥이라도 되나?"
"우리에게 그런 시설은 필요 없어요. 이건 외부인을 위한 공간이죠."
창살도 없고 뛰어내리면 그만인데 어른 두셋 모여앉으면 좁아터질 것 같은 공간에 서란다.
"뭐…."
나는 자리에 앉았다.
"좋아. 하지만 명심하라고. 시간을 끌면 불리한 쪽은 너희야."
"꼭 당신은 상관없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여행자니까. 나는 떠나면 돼."
"무책임하군요. 세상이 망한다면서요? 그러면 당신도 갈 곳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내 걱정을 해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웃자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갤 돌렸다. 이런 식의 말주변이 부족한 것 같았다.
스스스스스.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자지러지자 내가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그건 아무도 몰라요. 모두의 회의는 모두가 납득해야 하니까요."
말을 하다 보니 깨달았다.
'순진하고 친절하군.'
처음엔 내게 활을 겨눴지만, 그녀는 점차 상냥해지고 있었다.
"가서 돕지 그래?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저는 당신을 보호할 거예요."
"감시가 아니라?"
"어느 쪽이든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목걸이만 보여주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진도가 더디다.
'그냥 확 가버려?'
생각하다가도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아니야. 발자취라고 했었어. 과거의 어떤 누군가가 갔던 길. 그걸 내가 답습하고 있는 거겠지.'
이걸 내게 보여주는 건 정보가 이 안에 있다는 뜻이다.
'발자취라….'
이번 미션은 아마도 벌레에 관련된 것. 전에 도화지는 로드와 접점이 있는 인물을 만났었다. 재능마켓은 어쩌면 현시대의 재앙을 막기 위해 우릴 이곳으로 이끄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하면 나는 관전자라는 건데.'
미션 실패가 사망이니 마음을 놓을 수도 없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현대인이 어떻게 과거에서 죽어?
'시간을 다룰 수 있는 재능마켓이라 가능한 건가?'
마흔 살 먹은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 자체가 어차피 정상은 아니었으니 이런 복잡한 문제는 뒤로 미루자.
1시간이 더 지났다.
"이러다가 해가 지겠는데."
내 말에 그녀가 고갤 돌렸다.
"도시까지 멀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고."
"친구들과 함께면 하루 안에 가요."
"아, 그래?"
메뚜기면 그럴 수 있겠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네 친구들 말이야. 따로 소통하는 방법이 있나? 친화력을 높인다든지."
메뚜기는 뭐랄까…. 벽보고 얘기하는 기분이다. 범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똑같지만 메뚜기는 표정도 없어서 더 그런 것 같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소통하는 방법을 타고나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손발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다들 말문이 막히는 그런 건가?
'재능이겠지.'
머리가 좋아지고 힘이 늘어나고 스킬을 얻다 보니까 알겠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는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하지만 그걸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뭐라도 좋으니까 말해봐.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으음…."
경험과 노력은 기술을 완성시킨다.
"우선 제 경험상 마음을 곱게 써야 해요. 나쁜 감정을 품고 다가가면 누구라도 싫어할 거에요."
그녀가 저 아래 메뚜기들을 보며 말했다.
"한 번의 웃음이라도 친절하게 진심을 담아서, 한마디 말이라도 사랑스럽게 마음으로 전달하면…."
그러다가 그녀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쿠워워어어어어어!
"…?!"
나도 그쪽을 봤다.
"어? 어어어엇?"
커다란 원숭이가 이쪽을 향해 나뭇가지를 철봉처럼 잡고 훌쩍훌쩍 건너며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