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마켓-156화 (156/277)

#156화

아득히 먼 옛날.

몇 개의 우주선이 날아왔다. 이들 종족이 행성을 장악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벌레.

생각해보면 더 크고 강력한 생물을 만들어 지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겠지만 본래 작은 것들이 더 생존력이 강하며 그것들은 무한한 변화를 거칠 수 있다.

하지만 벌레는 지능이 낮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그들을 통제할 지휘관이 필요했는데 이들은 그 상위 개체를 '어머니'라 칭했다.

처음엔 순조로운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미 이 행성엔 수많은 침략자들이 먼저 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생하면서 강해진 개체도 있었고 엘프라는 원주민도 있었다.

우주선은 파괴되어갔다.

이 행성의 '마법'은 기술로 진화한 이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엘프들은 행성의 사활을 걸고 맞섰고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전쟁을 해나갔다. 다른 종족도 연합했다. 평소엔 헐뜯던 이들도 외세의 침략엔 똘똘 뭉쳐 대항했다.

우주선들을 관장하던 시스템은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행성은 위험하다. 단기간에 함락하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역시 피라미드가 아니었네."

나는 빠르게 스쳐 가는 그래픽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주변으론 과거가 재생되고 있었다. 심하게 요약되어 보여졌지만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기생충 같은 벌레를 네놈들이 가져온 거구나."

전쟁은 끝났지만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심지어 그게 우리 세상으로까지 번졌다.

"흠…."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언제까지고 넋 놓고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놈은 어디로 간 거지?'

분홍색 원숭이가 미션의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션 자체가 워낙 두루뭉술했다. 과거로 초대받았다. 그런데 뭐? 어떻게 하라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보았다. 나를 중심으로 영상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

우주니 뭐니…. 어차피 아득히 뭔 과거의 일이었고 더 엄밀히 따지면 우리 세상일도 아니었다. 와닿지 않는다는 거다.

'어쩌면 이놈들 모두가 우리 세계의 적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재능마켓이 발동했을 수 있다. 면역력처럼 말이다.

나는 계속 걸어가면서 영상을 둘러보았다.

이제 생존한 우주선들이 떠나는 것까지 진행되었다. 피라미드처럼 생긴 우주선들은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멀어져갔다.

그리고 영상이 끝났다.

파팟-!

거짓말처럼 주변이 변했다.

"헛…."

급변한 환경에 나는 벽으로 붙었다. 그리곤 자세를 낮추며 활을 들었다.

'이건? 그때의?'

벽을 가득 채운 혈관 같은 것들은 홍대 지하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흙이 아닌 기계로 이뤄진 동굴을 내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오랜만인데?'

나는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마주한 미션이었지만 새로운 정보를 하나 더 습득했다. 2회차나 3회차에서는 숨겨진 미션이 등장한다는 거다.

'어차피 이겨내야 돼.'

재능마켓이 우릴 훈련 시키고 있다면 이것도 꼭 필요해서 노출하는 것이리라.

나는 혈관을 바라봤는데 그 속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맥이 느껴졌다.

'이것도 그래픽은 아니겠지?'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그래픽이라고 부르곤 있지만 내게 보여지는 건 실제와 똑같다. 절대 구분할 수 없다. 우주선까지 만들어서 행성을 오가는 놈들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그런 기술력으로 왜 벌레냐.'

지력+4론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끝까지 살아남으면 언젠간 알게 될 일일 거다.

15분쯤 복도를 따라 걸었다. 중간에 문 따윈 없었다.

사람의 심장이 두근두근? 쿵쾅쿵쾅? 기분에 따라 다르게 들리겠지만 이 벽을 덩굴처럼 채운 혈관들은 울컥! 울컥? 하는 울림을 낸다.

그게 마치 배경음악처럼 긴장감을 더 고조시킬 때 저쪽 끝에서 빛이 보였다.

'끝인가?'

입구일 수도 있겠다.

걷는 속도는 일정했다. 1회차였다면 멈춰서 한참 망설였겠지만 이제 나는 달라졌다. 어떤 장애물이 있다고 해도 일단 달려들고 깨지고 맛보고 싸워서 이겨냈다.

'유니크 미션이니까 기본적으로 난이도는 높을 거야. 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좋겠지.'

스킬 하나가, 아이템 하나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이런 도전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생각하는 사이 끝 지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어마어마한 함성에 뒤덮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죽여라! 죽여!

-싸워라!

-목을 잘라버려!

어쩌면 이다지도 변화무쌍하냐…. 뭐하나 예상할 수가 없다.

-3번째 시합의 도전자는 33번 인간형 노예입니다!

-와아아아!

-나는 이쪽에 걸지!

-나는 인간형이 싫어! 그냥 싫다고!

이상했다.

'콜로세움?'

나는 지금 경기장에 있다. 오래전 유럽에서는 이런 흙 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피를 흘리며 싸웠었다. 지금도 스페인 같은 나라에선 소와 기술을 겨루고 한국에선 씨름을 한다.

'저것들은 뭐야?'

관중석엔 족히 5만 명은 되는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근데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반쯤 뭔가와 섞은 인간들이 가득한?

'벌레랑 합쳐진 건가?'

-이에 맞서는 가디언! 2번의 변태를 마치고 성공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전투형 XX227B입니다!

-와아아아아!

-멋있다!

-최고다!

차르르르륵.

쇠사슬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위로 열리자 안에서 커다란 녀석 하나가 성큼 튀어나왔다.

쿠웅!

앞발을 내리찍었더니 내 심장이 덜컥 반응한다.

'사마귀잖아….'

-진화 과정에서 크기를 키웠으며 앞발을 무기처럼 바꿨습니다! 그 때문에 도구를 사용할 순 없지만 저런 톱날 같은 앞발이라면 전혀 상관없겠죠!

-그렇지!

-꺄아아! 너무 멋있어!

키가 8미터는 된다. 앞발 하나가 드리트리의 검만 하다. 저런 게 우리 세상에 있었다면 인간은 아마 오래전에 멸종했을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실험에서 살아남는 최종 우승자의 형태로 모든 시스템을 맞출 것입니다! 여러분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더 열광하여 주십시오!

-죽여라! 죽여라!

-싸워! 어서!

-우와아아아아아아!

'이놈들이 처음 이곳에 온 뒤로 얼마 안 된 시점인 건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천년 지네도 이놈들 작품인 것 같았다.

'나는 표본 중 하나겠고….'

쿠웅! 쿵!

위협적으로 바닥을 찍으며 다가오는 사마귀를 보면서 나는 흐음,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장단은 맞춰줘야겠지?'

설마 나보고 저 많은 관중과 다 싸우라는 건 아닐 테니 앞의 적부터 치우자.

【인내가 발동합니다.】

【화살에 기가 담겼습니다.】

【스크류 스킬을 적용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놈이 좀 더 다가오길 기다릴 때 환호성이 하늘 끝까지 울려 퍼졌다.

-죽여!

-우와아아아아아!

-227B! 227B!

-네게 전 재산을 다 걸었다고! 놈의 머리를 부숴버려! 227B!

일방적인 응원에 힘입은 사마귀가 취르르르륵! 괴상하게 생긴 입을 벌리며 포효했다. 그리곤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

-우오오오오!

-먹어버려!

-가라! 227B!

놈과의 거리가 3미터 남았을 때,

티잉-!

시위를 놨다.

그리곤 콰르르르르르륵! 회전하는 화살이 녀석의 세모꼴 머리로 날아들었다.

퍼엉-!

-…엥?

-뭐냐….

-227B?

관중석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사마귀 머리는 몸집에 비해서 작았는데 그마저도 날아가 버린 몸뚱이가 허무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허어! 무려 두 번이나 진화를 마친 가디언이 도전자의 일격에 쓰러졌습니다! 인간형 도전자의 승리! 놀랍습니다! 역시 강한 외피보다는 도구를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더 유리한 걸까요? 귀한 데이터를 수집한 경기였습니다!

반짝.

사마귀 근처에서 돌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재료 수집망을 꺼냈는데 메시지가 들렸다.

【대상을 수집할 수 없습니다.】

'안되나.'

돌을 줍자 저쪽 문이 열렸다.

【다음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대기실로 입장하세요.】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경기장을 떠나 열린 문으로 걸어갔다.

-자! 이어지는 오늘의 마지막 경기! 현 챔피언이자 무려 3번의 진화를 거친 A333A!

-와아아아아아아!

문으로 들어가자 훅-! 냄새와 열기가 나를 덮쳤다.

"…?"

그리고 뒤이어서 우르르 여럿이 모여들었다.

"대단한 경기였어! 어떻게 한 거야?"

"그 무서운 놈을 한 방에 날려버리다니!"

"최고의 경기였어!"

여긴 마치 온 세상의 인종을 다 모아놓은 시장통 같았다. 50여 명의 도전자들은 꾀죄죄한 몰골이었고 다리가 잘린 사람도 있었다.

'어르신처럼 생긴 사람도 있네.'

귀가 뾰족한 여자도 있었고 비슷하게 생겼지만 피부가 초콜릿처럼 까만 남자도 있었다.

"아, 음…."

뭘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저쪽에서 또 함성이 들렸다.

-이에 맞서는 도전자!

"제기랄! 또 시작됐다!"

"누가 나가야 하죠?"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어."

모두의 안색이 변할 때 가장 키가 작은 남자의 몸이 빛났다.

"거부해봤자 죽을 거야."

"놈들이 우리 몸에 벌레를 심어뒀다고!"

"끔찍해!"

"그게 기어 나오느니 차라리 나가서 죽는 게 나아!"

-94번 인간형 노예입니다!

-와아아아아!

-이번엔 확실히 죽이자!

-화끈하게 날려버려!

작은 남자가 도끼를 들었다. 양날의 도끼는 우람했는데 그의 키보다도 컸다.

"쳇, 내 차례군."

그가 해탈한 모습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저분이라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제도 살아남았으니까 어쩌면…."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아요! 그 최악의 괴물이라고요!"

나는 문득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소통이 된다는 건….'

어떤 메커니즘인진 모르겠지만 내가 도울 방법도 있다는 게 아닐까?

"이봐."

나는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가는 남자를 불렀다.

"음?"

그가 어르신을 닮아서 마음이 쓰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확인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속는 셈 치고 마셔봐."

휙! 드링크를 하나 던졌다.

"이게 뭐지?"

그걸 낚아채며 불신의 눈으로 나를 보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어차피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잖아. 그게 도움이 될 거다."

"…."

남자는 드링크를 가만히 보다가 피식 웃곤 마개를 따서 쭈욱 마셔버렸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5,000P를 얻었습니다.】

저 드링크의 등급을 생각하면 5,000포인트 정도론 한참 부족하겠지만 나는 내 직감을 믿었다.

"고맙군. 왠지 힘이 나는 것 같아."

그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문으로 달려갔다.

"죽지 마세요!"

"제발 이기세요!"

"챔피언은 힘이 세요! 정면승부는 피하셔야 해요!"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남자를 걱정했다. 그가 죽으면 다음은 자신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도전자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경기장에 서자 아까처럼 저쪽의 문이 열렸다.

-와아아아아아아!

-챔피언! 챔피언!

사마귀보다는 작았지만 인간보다는 큰 몸집의 무언가가 밖으로 나왔다.

나는 놈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 개미?'

-경기 시작합니다!

홍대개미가 더듬이를 빠르게 움직이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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